-
-
할매가 돌아왔다
김범 지음 / 다산책방 / 2019년 10월
평점 :





“내가 네 할머니다.”
눈을 깜빡이며 한참을 생각해야 했다. 할머니는 내가 상황을 이해할 때까지 꼼짝 않고 기다려주었다. 내 할머니라니. 그렇다면 아버지의 어머니란 얘기고 할아버지의 아내란 소리며 어머니의 시어머니란 말씀인데. 가만있자, 이건 정말 대단한 사건이었다. 광복 직전 염병에 걸려 죽었다던 할머니가 부활하신 것이었다. (p.11)
60억 이후, 집안은 비로소 화해와 용서, 잃어버린 67년, 감동의 대 서사시가 엄숙하게 전개되었다. 할머니의 표정에 그 감동과 희열이 역력했다. 60억 이전, 할머니의 기괴한 모습들은 아마도 긴장과 공포, 불안과 어색함이 만들어낸 갑옷이나 방채 같은 것이었는지도 몰랐다. 내 감정 변화도 비호처럼 빨랐다. 경악과 흥분, 슬픔과 압박에서 벗어나 드디어 감격이라는 제자리로 돌아왔다. 생각해 보면 35년의 세월을 살고, 태어나 처음으로 친할머니를 만나는 이산가족 상봉의 자리였다. 눈물과 감동이 없다면 그게 이상한 일이었다. 바람이 났느니 하는 것들은 결코 근본적인 문제가 될 수 없었다. 누가 뭐래도 큰 흐름은 핏줄의 상봉, 바로 그것이었다. (p.41)
백파 최종태 선생. 고결한 흰 물결처럼 평생 하늘을 우러러 부끄러움 없는 인생을 산, 이 시대 인텔리였고 독립운동가였으며 전쟁 후 사업 실패 뒤에도 다른 나약한 지식인들과는 달리 가족의 생계를 위해 온갖 잡일을 마다하지 않았던 성실하고 강직한 사내. 늘 책과 사색을 가까이했던, 어느 동네에 살든 지역에서 존경을 받았던 고매한 인품의 그가 85세 나이에 한밤중 전립선이 막혀 가족들 앞에서 때굴때굴 구르다가 무른 똥을 지렸고 민족을 배반한 더러운 계집에게 짝불이와 조그만 그것을 마사지당했다. 난 그때 깨달았다, 인생이란 결코 정의롭지도 않고 인자하지도 않다는 것을. (p.96)
2012년 한여름 날이었다. 할머니가 돌아왔다. 광복을 코앞에 두고 염병에 걸려 죽었다던 할머니가, 사진은 물론 어떤 흔적도 남기지 않았고 어느 누구도 그분 얘기를 꺼내지 않아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던 인물처럼 그렇게 묻혀 있던 정끝순 여사가 어느 날 오후 갑자기 집 앞에 나타나 벨을 눌렀다. 누구인가? 가짜인가? 부활했나? 마치 원래 이 집에 살았다는 듯 능청스러운 모습으로 돌아와, 온 집안을 들쑤시는 그녀는 일본군과 눈이 맞아 남편과 백일이 막 지난 쌍둥이 자식을 버리고 도망친, 그러니까 세상에 원래 없었던 사람처럼 완전히 잊혀졌던 할머니. 그런 그녀에게 할아버지, 아버지, 고모 등은 너나 할 것 없이 무슨 낯으로 이제야 돌아왔냐며 당장 나가라고 야단이다. 하지만 그때 내뱉는 할머니의 한마디. “너희에게 줄 유산 60억이 있다.” 그러자 악다구니를 쓰고 있는 할아버지를 제외하고 나머지 식구들은 침묵했다. 각자 계산이 바쁜 모양이었다. 자신도 모르게 바뀌는 표정을 숨길 수가 없었다. 진짜 60억이 있기는 한 걸까. 아무도 관심이 없던 할머니가 반기는 이 하나 없는 가족의 품으로 돌아온 진짜 이유는 무엇일까.
역대 최강의 캐릭터! 세상을 내 맘대로 주무르는 시한폭탄 할매가 온다! 그녀의 귀환으로 촉발된 가족들의 60억 쟁탈전은 그야말로 포복절도의 연속. 할머니의 60억 발언 이후, 집안은 비로소 화해와 용서, 잃어버린 67년, 감동의 대서사시가 엄숙하게 전개되는 줄 알았으나,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60억 쟁탈전이! 60억이라는 소리에 호시탐탐 야욕을 불태우는 가족들. 그리고 이때다 하고 60억에서 600억으로 자꾸 부풀어지는 할머니의 유산. 그 속에서 휘둘리지 않고 묵묵히 자신의 일생을 인정받기 위해 투쟁하는 제니 할머니! 폭력의 역사를 끝내는 데 60억이면 충분했다.
재미와 감동 두 마리 토끼를 모두 다 잡았다. 읽다 보니 시간순삭! 책에서 눈을 뗄 수 없을 정도로 시종일관 유쾌했다. 손자 최동석의 시점으로 바라본 이야기에 호기심이 일었다가 이어진 가족들의 반응에 재미가 쏠쏠했다. 하지만 그다음부터 사건의 실마리가 하나둘 풀리기 시작하자 가슴이 미어지더니 장엄한 감동이 물밀듯이 밀려왔다. 누명으로 살아온 오욕의 시간들, 자신의 잘못된 역사를 바로잡기 위해 돌아온 그녀가, 그 걸음걸음이 결코 쉽지 않았음을 알아버렸기 때문이다. 60억 따위 없으면 어때, 그녀가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있도록 그녀의 성공을 간절히 바라게 된다. 우리 제니 할머니 흥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