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 만난 물고기
이찬혁 지음 / 수카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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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 모든 종류의 음악이란 참 신비한 게 재생되는 순간부터 그 공간의 흐름을 바꾸어버린다. 달과 밤을 짙은 남색 물감으로 흩뿌려 표현해놓은 미술작품이 조금 전 녹색 창가가 차지하던 공간을 대체했다. 이런 마법 같은 일이 벌어지면 나는 그 작품에 이름을 붙인다. 저 작품은 ‘공연이 끝난 후’ 정도가 되겠다. 우아한 테마가 방 안을 채워나가는 것이 마치 차가운 공기가 위에서 아래로 가라앉는 것과 비슷했다. (p.18)

 

음악이 없으면 서랍 같은 걸 엄청 많이 사야 될 거야. 원래는 음악 속에 추억을 넣고 다니니까. 오늘 우리가 이곳에 온 추억도 새로 산 서랍 속에 넣고는 겉에 ‘작은 별’이라고 쓴 테이프를 붙여놓아야 할걸. 아마 번거롭겠지. 근데 그럴 필요까진 없어. 우리에겐 바다가 있으니까. 바다는 아주 큰 서랍이야. 우린 먼 훗날 바다 앞 모래사장에 걸터앉아서 오늘을 떠올릴 수도 있어. (p.52)

 

자신이 한 말을 지키는 사람. 그건 손이 떨리도록 멋진 말이었다. 나는 그날 합주를 거기서 마무리할 수밖에 없었다. 음악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내가 어떻게 사느냐가 중요한 것이지. 그 순간에 나는 다짐했다. 수많은 거짓과 모방이 판치는 그곳을 비집고 들어갈 수 있다면, 그 사이에서 ‘진짜’가 될 수 있다면, 그때 진정한 예술가로서 음악을 할 것이라고. (p.65)

 

행복의 가치는 모두에게 다르지요. 누군가에게는 사랑이 될 거고 누군가에게는 재산이 될 거예요. 몇십억 명이나 되는 사람들의 조건을 충족시키는 건 불가능하답니다. 그래서 긴 고민 끝에 이 일을 선택한 거예요. 남들이 하지 않는 걸 하는 것. 하지만 세상을 위해 꼭 필요한 것. 내가 없다면 전봇대는 쓰레기에 깔려 진작 무너지고 말았을 겁니다. 이 동네는 악취로 가득 찰 것이고, 소중히 생각하는 집값이라든지 그런 것들은 바닥을 칠 거예요. 하지만 난 그들이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것보다 더 소중한 것들을 지켜주고 있어요. (p.112)

 

 

 

 

앨범 발매를 앞두고 녹음 작업 중 창작의 한계에 부딪치자 자신이 추구하는 예술가로서의 삶을 찾기 위해 작업을 중단하고 일 년 간 여행을 떠난 ‘선’. 하지만 여행을 시작한 이후 수많은 예술가를 만났지만 그들에게서는 그가 기대하는 모습을 전혀 찾을 수 없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오만과 망상으로 가득했고 이상한 세계에 도취되어 있었다. 여전히 갈등이 해소되지 않은 상태에서 선은 마지막 여정의 깊은 밤, 파도가 부서지는 갑판 한가운데에서 우연히 한 여자의 목숨을 구하게 되고 이후 삶의 답을 찾기 위해 여정을 함께하는 동안 그녀에 대한 의문과 불만에 휩싸이게 된다.

 

 2012년, 데뷔한 이래 꾸준한 음악 활동을 펼치며 대중들에게 수많은 사랑을 받아온 악동뮤지션. 이 책은 그들 남매 중 찬혁군의 소설 데뷔작으로, 평소 그가 생각하던 삶의 가치관과 예술에 대한 관점을 소설 <물 만난 물고기>를 통해 은유적으로 녹여냈다. 세상을 다른 관점으로 바라보는 질문들, 그리고 정규앨범 「항해」를 대중들에게 어떻게 이해시킬 수 있을지에 대한 저자의 깊은 고민이 소설에 담겨있다.

 

책을 읽자마자 다채로운 표현력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이 작품이 저자의 데뷔작인 걸로 알고 있는데 지나치거나 모자람 없이 매끄럽게 이어진다. 예술가로서 그만이 그려내는 독특한 시선이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리드미컬한 울림에 귀를 기울이면 각자의 리듬에 맞춰 글자들이 춤을 춘다. 쿵짝 쿵짝, 느리게 더 느리게, 고개가 위아래로 오르락내리락. 하얀 종이 위로 그들의 발자취가 섬세하게 그려진다. 감성이 이렇게 오랫동안 넘실거릴 수 있는 걸까. 그래서 소설이라기보다는 음악을 담은 한편의 뮤지컬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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