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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이아리 - 누구나 겪지만 아무도 말할 수 없던 데이트 폭력의 기록
이아리 지음 / 시드앤피드 / 2019년 9월
평점 :





그가 내 앞에 무릎을 꿇는다.
자책하고, 눈물을 흘리며, 반성한다고 말한다.
내게는 평생 남을 끔찍한 기억이
그에겐 찰나의 실수일 뿐이었다.
용서를 해주면 그는 면죄부를 받는다.
‘내가 이렇게 해도 나를 받아주는구나.
그만큼 얘도 나를 사랑하나 보다.’
폭력이 반복될수록
면죄부는 쌓이고 쌓여
그에게 단단한 방패를 쥐어주고,
더 큰 위협의 칼날을 휘두를 수 있게 만든다.
사람은 절대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지독한 방식으로 알게 되었다.
나로 인해 상대가 달라질 수 있을 거라는 달콤한 상상은
현실에서는 좀처럼 일어나지 않았다. (p.64)
아침이 오는게 힘들다.
잠에서 깨고 나니 또 괴롭다.
영원히 잠들고 싶다.
이성적으로 생각해서 그에게 이별을 말했지만
하루에도 몇 번씩 속에 있는 울음이 터져 나왔다.
친구는 내 상태를 눈치 채고
핸드폰으로 메시지를 보내왔다.
너는 사랑받을 가치가 충분한 앤데
왜 그런 사람과 사귀느냐고.
그 말을 듣고 또 울었다.
나는 향해 웃고, 다정하게 말하던 그의 모습과
시뻘건 얼굴로 윽박지르며 폭력을 휘두르던 그의 모습이
머릿속에서 뒤섞여 점점 더 나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p.84)
피해자에게 쏟아지는 화살과
가해자를 막을 수 있는 강력한 법과 체계의 부재.
그 속에서 나는, 어쩔 수 없이 도망친다.
만약, 운 좋게 그가 나를 놓친다면 그는 반성할까?
다음 피해자는 생기지 않는 걸까?
나를 만났던 이 사람이 가면을 쓰고
당신에게, 당신의 친구에게, 가족에게
다가갈 수도 있는데
그럼에도 피해자가 도망치는 것이,
가해자의 비위를 맞추는 것이
과연 해결책이라고 말할 수 있는지 묻고 싶다. (p.211)
내가 이렇게 맘 졸이는 동안 그는 아무렇지 않게 지냈겠지. 나는 이 끔찍한 기억을 평생 안고 살아가야 한다. 기억은 지워지지 않는다. 흉터도 사라지지 않는다. 다만, 그 위를 다른 기억들이 덮을 뿐이다. 그리고 그 마저도 언제든 뚫고 나와 나를 집어 삼킬 수 있다. 나는 조급했다. 빨리 이 상처를 지우고 싶었다. 당신이 없어도 행복하다고. 아니, 당신이 없어야 내가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었다. (p.258)
그녀는 몸매가 어떻든 짧고 타이트한 옷을 좋아하는데, 그는 그녀의 옷차림을 항상 지적했다. “너 노출증 있냐?” “그렇게 입으면 너 쉽게 봐.” “누구 보여주려고 그러냐?!” ‘표현이 좀 거친 것 같은데···. 날 너무 좋아해서 그러는 거겠지?’ 어린 나이, 처음 해보는 연애에서 그녀는 모든 게 서툴렀고, 아는 것도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둘은 사소하게 다투게 되었고 그녀는 그에게 헤어지자고 말했다. 그의 얼굴은 금방이라도 터질 것처럼 새빨개졌다. 그리고 순간, 그녀의 뒷목을 세게 잡고 골목 안으로 들어갔다. 그날은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그녀는 한쪽 신발이 벗겨진 채로 그에게 끌려갔다. 골목 끝에 그가 멈춰 섰을 때, 그녀의 발은 물웅덩이를 밟고 있었다. 그제야 그는 정신을 차렸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에게 있어 그녀는 같은 인간으로서 존중해줘야 할 대상이 아니라, 말 잘 듣고, 예쁘고, 착하게, 길들이고 싶은 존재가 아니었을까. 사랑이라는 이름 아래 못하는 것은 없었다. 그는 그녀의 주변을 철저하게 정리했다. 남자일 경우에는 연락처를 지우거나 차단시켰다. 여자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는 그녀의 인간관계와 스케줄 모든 것을 관리하면서 그것을 사랑이라 말했다. 뜨겁게 부어오르던 뺨, 분에 못 이겨 주먹으로 벽을 치던 그의 모습. 사랑하는 이가 나를 때렸다는 현실을 직시할 때마다 그녀의 세계가 무너져 내렸다.
지독한 집착과 통제, 끈질긴 스토킹, 반복되는 폭언과 폭행. 데이트 폭력 피해자의 경험과 목소리를 담은 웹툰이 책으로 출간되었다. 인스타그램에서 연재를 시작한 이 웹툰은 SNS 독자들의 폭발적인 공감을 불러일으키면서 순식간에 10만 팔로워를 달성했고, 연재 초기에 이미 네이버 도전 웹툰과 다음 1부 리그에 오르며 120만뷰가 누적될 만큼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길을 걷다 당신과 한 번쯤 마주쳤을지 모를 평범한 사람. 데이트 폭력의 피해자. 그리고 그 경험을 만화로 그린 작가 이아리. 저자는 자신의 이야기를 생생하게 들려준다. 자신이 직접 겪었던 일을 바탕으로 피해자의 무력감과 공포를 적나라하게 그려내며, 연재 당시 각각의 에피소드에 달렸던 공감과 지지의 댓글을 수록하고, 또 다른 이아리들의 사연들도 더해 그들의 아픔을 올곧이 담아냈다.
데이트 폭력?! 이런 연애는 당장 끝내야 한다. 뒤를 돌아볼 필요도 없다. 단번에 끊어내는 게 옳다. 폭력적인 성향은 절대 변하지 않는다. 하지만 사랑에 가려져 사랑한다는 이유로 옳고 그름을 분간할 수 없다. 그 일은 직접 겪어 보지 않은 사람은 잘 모르는 일이다. 누구나 겪지만 아무도 말할 수 없던 데이트 폭력의 기록. 나도 모르게 목이 메어 온다. 손이 떨린다. 그 기억들을 떠올려 글로 담아내는 과정이 결코 쉽지 않았을 텐데 용기를 내어주신 작가님께 참 감사하다. 이제 더는 아프지 않았으면, 더 좋은 사람 만나 마음껏 사랑하고 또 아낌없이 사랑받았으면. 다 이아리. 누구나 다 ‘이아리’가 될 수 있다.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세상에는 수많은 아리들이 숨어있다. 우리 더 이상 침묵하지 말아요. 용기를 내어주세요. 도움의 손길을 요청해주세요. 기꺼이 그 손을 잡아 드릴게요. 그러니 이제 그만 그곳에서 벗어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