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당신과 가까운 곳에 있습니다
김종관 지음 / arte(아르테)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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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꽃 가운데 마음을 움직이는 꽃은 목련이다. 지는 벚꽃은 화려하지만 목련에는 좀 더 단순한 슬픔이 있다. 떨어지는 꽃의 무거운 중량감 때문일 것이다. 무거운 꽃송이가, 단두대 위에서 잘리는 무엇같이 툭, 하고 떨어진다. 흙먼지에 쉽게 더러워지고 뭉개지는 꽃잎을 보는 일은 자못 서늘하기까지 하다. 처음 목련의 매력을 느낀 때는 꽃을 피우는 모습이 아니라, 이렇게 툭, 하고 떨어지고 뭉개지는 꽃잎을 보고 난 이후였다. 그다음 해에야 꽃을 피우는 목련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했다. (p.12)

 

한 시간 후 나는 어느 작은 숲길에 있었다. 깊은 그림자가 드리운 숲 안에서 잘게 부서져 들어오는 햇살들을 보고 있었다. 새들이 초현실적인 대화를 이어가고, 나는 거기서도 알아듣고 있다는 표정을 짓는다. 올레길을 걷다 보면 느끼게 된다. 눈뿐만 아니라 귀도 열어두어야 한다는 것을. 새와 작은 벌레와 저 멀리 바다에서부터 시작된 바람과, 바람에 부딪히는 돌과 바람이 스치는 나무와 숲, 나의 숨소리, 그리고 가끔 내 이어폰에서 흘러나오는 카카오톡 알림음. (p.58)

 

왈츠를 추는 여인들의 편안한 얼굴과 그 우아한 손끝이, 불안정했던 나의 마음을 잡아주었다. 검푸른 바다도 기억 그대로였다. 하지만 <여름밤>을 처음 보았던 그때 느꼈던 막연한 낙관은 모양을 달리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 여행에서 얻었던 어떤 것들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으니까. 그림을 보고 돌아오며, 나를 지나치고 내가 잃어버린 것들에 대해 잠시 생각했다. 중요한 것은, 무언가를 잃어버렸지만 그림이 주는 위안은 그대로였다는 것, 그리고 그 잃어버린 것들 때문에 위안은 더 깊어졌다는 것. 달빛에 의지한 여인들의 왈츠가 있는 그림은, 지금 여기에서의 남루한 재회로 인해 비로소 의미가 생겼다. (p.82)

 

내 보잘것없는 작업들이 가진 큰 의미는, 내가 스쳐간 그 많은 순간들을 다른 방식들로 남길 수 있었다는 것이다. 아무것도 세팅되지 않은 채 거리와 그 거리의 사람들 앞에 카메라가 돌아가고, 가끔 기막힌 우연이 그 공간에 들어오는 기적을 만난다. 나는 그렇게 그 장소의 한 시절을 영화의 방식으로 기억할 수 있게 된다. (p.110)

 

 

 

이 책은 2012년 출간했던 저자의 첫 책 『사라지고 있습니까』의 개정증보판이다. 1부에서 4부까지 이어지는 글들은 『사라지고 있습니까』에 담겼던 대략 십 년 전에 쓴 글들이다. 십 년 전의 상태에서 그 전의 기억과 감정을 이야기했다. 십 년 동안 조금은 바뀐 것들이 있다. 계절은 매번 같은 얼굴로 찾아오지만 거리와 사람들 몇은 사라지고 모습을 달리하기도 했다. 그동안 저자가 살고 있는 거리도 바뀌었다. 십여 년 전까지는 이문동에 살고 있었지만 지금은 효자동에 살고 있다. 살고 있는 동네의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사소한 변화는 5부에 담아 놓았다. 그리고 6부에서는 안소희 주연의 <하코다테에서 안녕>과 아이유 주연의 <밤을 걷다> 시나리오를 담아냈다. <더 테이블>, <최악의 하루>, <조금만 더 가까이> 영화감독 김종관이 눈과 마음으로 기록한 어쩌면 잊혀질지도 모를 순간들.

 

창작이 정체된다고 느꼈던 시기, 저자는 에세이를 집필할 당시 십 년 전의 이야기와 현재의 변화에 이르기까지 소소한 일상의 변화들을 차곡차곡 담아낸다. 글은 어둠침침하고 쓸쓸함이 묻어 있다. 마치 빛바랜 사진을 꺼내어 보듯 저자의 지난 기억들은 옛 추억을 떠올리게 한다. 그 시절, 그 거리, 그 사람 등등 그 기억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이곳저곳에 많은 흔적을 남겨 놓았다. 글과 그 글들 사이로 간간히 드러나는 사진에 찰나의 순간을 가두었다. 한 걸음, 두 걸음, 저자를 따라 천천히 거닐다 보니 어느샌가 끝에 다다라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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