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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모해도 괜찮아, 쿠바니까
김광일 지음 / 이담북스 / 2019년 8월
평점 :





‘어떻게든 되겠지’ 하는 근거 없는 자신감은 공항에 도착해서야 깨어졌다. 2주치 짐 15kg이 담긴 캐리어를 수하물로 보내고 나니 그제야 슬슬 겁이 나기 시작했다. 사람은 궁지에 몰려야 비로소 절대자를 찾는다고 하던데. 때마침 인천공항 출국장에 있는 ‘기도실’이 눈에 들어왔다. 원래 이런 게 있었나? 그동안 수도 없이 오갔던 길인데 기도실은 처음 봤다. 《해리포터》에 나온 마법, 9와 4분의 3번 승강장 같은 느낌이었다. 이어 좁은 통로를 따라 들어갔다. 두 평 남짓 되는 엄숙한 공간이 모습을 드러냈다. 눈을 감고 조용히 두 손을 모았다. 하나님, 제가 혼자서 뻘뻘대며 사막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 지라도 안전하게, 그리고 건강하게 지켜주소서. (p.17)
돌아가는 길엔 가방에 있던 고프로 카메라를 꺼내 눈에 보이는 것들을 닥치는 대로 찍어 댔다. 영상에는 방파제 위에서 낚시하는 청년들, 공놀이 하다 아크로바틱 묘기로 재롱을 떠는 꼬마, 호세 마르티 공원의 선명한 쿠바 국기와 올드카의 향연, 거리 음악가들의 살사 리듬이 모두 담겼다. 하지만 그땐 미처 몰랐다. 사진에 찍힌 사바나의 모습이 얼마나 아름다울지. (p.45)
오지랖이 넓은데다가 기자라는 직업까지 갖게 되면서 하루에도 많은 사람들을 만나며 살게 됐다. 하지만 난 기본적으로 혼자 있을 때 에너지를 회복하는 편이다. 사방이 사람들로 둘러싸일 때면 잠기 동굴로 숨어서 마음을 달래고 싶어진다. 물론 그런 ‘고독한 자유’가 유별나게 극단적으로 표출된 사례도 적지 않다. 야밤에 캄캄한 산을 혼자서 오른다거나 통신이 되지 않는 지역을 굳이 찾아 들어가 혼자만의 시간을 갖는 식이었다. 그러다 보면 ‘사서 고생’ 해야 하거나 심할 경우 위험에 빠질 수도 있지만 언젠가부터 내게는 꼭 필요한 시간이 됐다. 이번 쿠바 여행도 애초에 그런 마음에서 출발한 게 아닌가 싶다. 그런 내가 이곳 쿠바에서 줄곧 사람들을, 그것도 굳이 한국 사람들을 자꾸 찾게 된 건 의외였다. 나는 고독할 자유를 스스로 걷어차고 있었다. 새로 맺어지는 관계들이 어느 정도 피로를 수반할 수밖에 없다는 걸 알면서도 자꾸 그랬다. (p.84)
첫 잔은 역시 모히토. 모히토 잎의 싸한 맛이 특히 강한 것이었다. 한 잔 받아 들고 곧바로 바다로 나왔다. 선베드를 90도에서 180도 사이 어딘가 적당한 각도로 젖히고 누웠다. 감았던 눈을 떠 보니 청명한 하늘에 속이 뻥 뚫리는 느낌이 들었다. 그 아래로 몽실몽실한 구름, 수평선, 파란 바다가 차례로 보였다. 볕에 쨍쨍하지만 그늘 아래 자리를 잡아 시원한 바람을 맞았다. 왼손에는 청록색 모히토 잔이 들려 있고 주변은 고요했다. 윤영과 은주는 한 잔 더 받아 오겠다고 자리를 떴고 블루투스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오는 음악은 마음을 녹였다. 낙원이었다. (p.152)
삶의 다양한 관계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책임감에서 잠시나마 벗어나고 싶어 떠난 쿠바여행은 생각보다 험난했다. 극한 직업으로 알려진 수습기자, 그리고 지난 4년 동안 몸 바쳐 일했던 사회부 생활보다 더 하면 더 했지 덜 하진 않았다. 구글 지도 어플도, 네이버 검색도 안 되는 곳을 정처 없이 쏘다니다 길을 잃고 배회하기 십상이었다. 현지인들에게 다가가 ‘돈데 에스타(~가 어디 있나요?)’ 하고 길을 물어도 영어인지 스페인어인지 알아들을 수 없는 대답만 돌아왔다. 혼자 다닐 때면 거인국에 간 작은 걸리버가 된 것 같았다. 그만큼 현지인 사이에서 긴장을 놓지 못했다. 무섭고 불안했고 외로웠다. 그래도 이 책은 해피엔딩이다. 아무도 그에게 특정한 역할을 강요하지 않았기에 이곳에서는 꼭 착하고 유능한 사람이 될 필요도 없었다. 그는 그저 또 한명의 지나가는 나그네일 뿐이었다. 타인에게 피해만 주지 않는다면 적당히 이기적이고 적당히 계산적이어도 괜찮았다. 온종일 늘어져 있다 새벽 늦게까지 취해 있어도, 쓸 만한 글감이나 좋은 사진을 찍지 못해도 자책할 필요가 없었다. 고독한 자유를 스스로 포기하면서부터는 좋은 사람들을 만나 적당히 이기적이고 적당히 계산적이어도 괜찮았다.
평범한 직장인이 모든 것을 버리고 낯선 땅으로 날아간 일상 탈출기 <무모해도 괜찮아, 쿠바니까>. 쉴 새 없이 이어지는 취재-보도와 다양한 관계에서 오는 책임에서 잠시나마 자유를 누리기 위해 떠난 쿠바여행. 고독을 찾아서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오롯이 철저하게 혼자이고 싶어 떠났지만 오히려 저자는 그곳에서 만난 인연을 통해 관계의 소중함을 배워나간다. 쉽지 않아 무모했지만, 이 모든 것이 쿠바이기에 괜찮았다. 오래되고 낡아서 더욱 빛이 났다. 이 책은 쿠바가 주 배경이지만 쿠바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그곳을 여행하는 여행자에 대한 이야기다. 사람과 사람이 함께하고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 곳에서 진정한 쉼과 회복을 경험했던 저자의 이야기다. 기자라는 직업에 걸맞게 저자는 가는 곳마다 끊임없이 호기심을 발산하며 쿠바의 곳곳을 파헤쳐나간다. 그리고 그 속에서 만난 사람들을 통해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며 삶의 이치와 깨달음을 얻는다. 이 책은 눈으로만 읽는 것이 아니다. 저자는 글만 보고는 상상하기 어려운 현장의 모습을 독자들이 생생하게 보고 들을 수 있도록 여행 중 액션캠으로 찍었던 영상을 거칠게 편집해 게시해 놓았다. 그러니 책장을 넘기다 본문 양쪽에 QR코드가 보이면 스마트폰으로 찍어보자. 이국적이고 흥겨운 쿠바의 분위기에 흠뻑 빠져든다. 무모해도 괜찮아, 쿠바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