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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사랑 ㅣ 나쁜 사랑 3부작 3
엘레나 페란테 지음, 김지우 옮김 / 한길사 / 2019년 6월
평점 :





나는 니나의 억양에 빠져들었다. 언어는 은밀한 독을 품고 있어서 이따금씩 부글부글 거품이 일곤 한다. 그럴 때는 해독제가 없다. 나는 어머니의 사투리에서 부드러운 억양이 사라지고 불만이 가득 차서 우리에게 악을 써대던 그때를 기억한다. ㅡ 어머니는 몇 번이나 우리를 버리고 떠나겠다고 위협했다. 아침에 일어나 보면 자기는 떠나고 없을 거라고 했다. 나는 매일 아침 눈을 뜰 때마다 어머니가 사라졌을까봐 두려워하곤 했다. 어머니는 실제로는 항상 우리 곁에 있었지만 말로는 계속해서 집을 떠났다. 그런 내 어머니에 비해 젊은 아이 엄마 니나는 평온해 보였고 나는 그런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부러움을 느꼈다. (p.28)
여자는 수천 가지 일을 해낸다. 힘겹게 일하고, 여기저기 뛰어다니고, 공부를 하고, 꿈을 꾸고, 무언가를 만들어내고 그러자 지쳐 쓰러진다. 그러는 동안 가슴은 커지고 질은 부풀어 오른다. 몸 안에 둥그렇게 웅크리고 있는 생명체 때문에 온몸이 욱신거린다. 그 생명체는 나의 것이고 나의 인생이지만 끊임없이 내 몸에서 뛰쳐나가려 한다. 내 뱃속에서 살지만 정작 내게는 관심이 없다. 나는 그 묵직하고 유쾌한 생명체를 격렬하게 사랑하지만 때로는 그 생명체가 혈관 속에 주입된 벌레의 독처럼 혐오스럽기도 하다. (p.59)
딸들의 불안과 고통과 갈등은 나를 끊임없이 억눌렀고 그럴 때마다 나는 쓸쓸함과 죄책감을 느꼈다. 나는 결국 딸들의 고통의 근원이자 배출구였다. 아무리 애를 써봐도 결국은 그렇게 됐다. 비앙카와 마르타는 나를 때로는 침묵으로, 때로는 악을 쓰며 원망했다. 비앙카와 마르타는 가시적인 신체적 특성의 잘못된 배분에 대해서만 나를 원망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보다 더 은밀한,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후에야 알아 챌 수 있는 특성들에 대해서도 불만이었다. 예를 들면 육체가 내뿜는 아우라 같은 것 말이다. 그것은 독한 술처럼 정신을 혼미하게 만드는 에너지였다. (p.106)
나는 인형을 품에 안았다. 그동안 나는 얼마나 많은 것을 망가뜨리고 잃어버렸던가. 지금 이 순간 내가 망가뜨리고 잃어버린 모든 것의 존재가 느껴졌다. 그 모든 형상이 소용돌이치며 눈앞을 스쳐갔다. 순간 내게 나니를 돌려주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깨달았다. 두렵기도 하고 양심의 가책이 느껴지기도 했지만 그래도 인형을 갖고 싶었다. 나는 인형의 얼굴과 입술에 입을 맞추고 엘레나가 그랬던 것처럼 꼭 껴안았다. 인형은 욕지거리를 내뱉듯 꾸르륵 소리를 내더니 갈색 침으로 내 입술과 셔츠를 더럽혔다. (p.109)
주인공 레다는 마흔여덟 번째 생일을 앞두고 있는 대학교 영어 강사다. 그녀는 나폴리 출신이지만 대학교 진학을 위해 고향을 떠나 피렌체에서 살았다. 젊은 나이에 결혼해서 마르타와 비앙카라는 두 딸을 낳지만 남편과 이혼한다. 그리고 딸들이 아직 어릴 때 자기 자신을 찾고 싶다는 명분하에 가족을 떠났다가 3년 만에 아이들 곁으로 돌아와 딸들을 키우는 데 최선을 다한다. 그런데도 두 딸은 어머니 곁이 아닌 아버지가 있는 캐나다를 삶의 터전으로 선택한다. 하지만 그녀는 전혀 속상한 기분이 들지 않았다. 오히려 마음이 가벼웠다. 힘든 임무를 완수한 후 마침내 부담감에서 벗어난 것 같았다. 이제 딸들의 일정이나 딸들이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신경 쓰지 않고 일할 수 있게 되었다. 25년 만에 처음으로 맞이하는 기적 같은 해방감. 오랜 시간 자신을 옭아매던 중압감에서 벗어난 그녀는 해변으로 휴가를 떠난다. 하지만 그녀가 찾은 해변은 평온과는 거리가 멀다. 그곳에서 레다는 나폴리에서 온 소란스러운 대가족을 만나고 가부장적인 남편과 육아의 고통으로 힘겨워하는 젊은 엄마 니나의 모습에서 자신의 과거를 떠올리며 그녀의 삶에 자신의 감정을 이입한다.
<잃어버린 사랑>은 나쁜 사랑 3부작 중의 한 권으로, ‘나쁜 사랑 3부작’은 ‘나폴리 4부작’으로 세계적인 작가가 되기 전 엘레나 페란테가 써낸 소설들이다. 이 책은 1999년 출간된 그녀의 첫 소설 「성가신 사랑」과 2002년의 「버려진 사랑」, 2006년의 「잃어버린 사랑」으로 구성되어 있다. 중단편이라기에는 길고, 장편이라기에는 짧은 이 작품에서 그녀는 여성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소설은 레다의 자동차 사고로 시작해 사고가 나기 전 여름휴가 동안 어떤 일이 있었는지 회상하는 플래시백 기법으로 진행되며 극 중 등장하는 엘레나의 인형 나니는 소설의 중요한 장치로 주인공 레다의 심리를 날카롭게 짚어 낸다. 인형은 니나와 엘레나의 사랑을 품고 있었다. 그들 모녀의 서로에 대한 열정과 구속력을 품고 있었다. 평온한 모성의 눈부신 증거였다. 그것을 통해 레다는 자신의 어머니와 딸들에 얽힌 기억을 떠올리며 과거 자신이 딸로서 경험하지 못하고 엄마로서 해주지 못했던 이상적인 모녀상을 보고 부러움과 질투를 동시에 느낀다. 엄마이기 때문에. 엄마는 어른이니까. 책은 어머니가 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자식과의 관계가 얼마나 복잡한 것인지 그 진면모를 여실히 보여준다. 또한 모두가 당연시 여기는 엄마의 역할에 적잖은 파장을 불러일으킨다. 엄마라면 모두가 모성애를 느껴야 하는 것일까? 엄마라면 누구나 겪게 되는 그런 일들. 레다와 니나의 삶을 두고 누가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을까. 그것은 어떤 잣대로도 평가하기가 어렵다. 그만큼 엄마가 된다는 건 참 어렵고도 힘든 일. 여자는 약하지만 엄마는 강하다? 아니 그 말은 틀렸다. 엄마도 엄마이기 이전에 여자다. 엄마도 아프고, 엄마도 힘들고, 엄마도 두렵고, 엄마도 약하다. 애써 강한 척 할 뿐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