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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품정리사 - 연꽃 죽음의 비밀
정명섭 지음 / 한겨레출판 / 2019년 5월
평점 :





화연 역시 한양살이가 괴로웠다.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는 동안에도 주변에서 온갖 이야기가 들려왔다. 역모를 꾀하다가 들키자 수치심에 못 이겨 자살했다는 이야기부터, 같은 패거리들이 입을 다물게 하기 위해서 자객을 보냈다는 소문까지 돌았다. 심지어는 화연의 어머니와 손을 잡은 집안 사람들이 자기들 살겠다고 아버지를 죽이고 불을 질렀다는 이야기도 들렸다. 이런저런 목소리들 사이에 정작 아버지를 애도하는 목소리는 없었다. 화연의 아버지는 매사에 엄격했지만 가족에게는 누구보다 따뜻하고 자애로웠다. 자식이라곤 외동딸인 화연뿐이라 주변에서 양자나 소실을 들이라고 야단이어도 듣지 않았다. 나랏일에 있어서도 누구보다 열심이었다. 익명의 투서 한 장으로 목숨을 잃고 손가락질까지 받을 만큼 허투루 살아온 사람이 결코 아니었다. (p.20)
“우리 아이는 올해 스물하나였네. 남편의 삼년상을 치르고 바로 따라갔지. 참으로 대단하지 않은가?” 소위 양반가에 법도로 자리 잡은 열녀라는 것이었다. 화연도 전해 듣기는 했으나 직접 목격하기는 처음이었다. 죽은 지아비를 기리기 위해 멀쩡한 여성들을 사지로 내모는 무언의 압력에 분노가 일어 화연의 얼굴은 계속해서 구겨지고 있었다. (p.123)
화연은 화를 참지 못했다. 어린 여자라는 이유로 틈만 나면 무시하고 따돌리는 세상에 분노가 일었다. 규방에 있을 때는 몰랐지만 세상 밖으로 나오자 그 삐뚤어진 관념들이 얼마나 끔찍하게 여자들을 얽매는지 깨닫고 있었다. (139)
대개의 가정은 남자가 바깥일을 해서 가족을 먹여 살리고, 여인이 아이를 키우며 살림을 도맡았다. 하지만 감 소사처럼 남편이 도박에 빠졌거나 무능력한 경우에는 여인들이 두 가지 일을 다 떠맡아야만 했다. 그런 여성들의 삶이 얼마나 고달프고 위험한 것인지 김 소사의 마지막 모습에서 절절하게 느낄 수 있었다. (p.154)
한밤중에 아버지가 계신 사랑채에서 갑자기 불길이 일었다. 그리고 그 화재로 화연의 아버지가 죽었다. 밤에 자다가 이상한 소리가 들려서 나와봤더니 사랑채 쪽에 누군가 있었고 그자가 아버지를 죽이고 사랑채에 불을 지른거라고 소리를 높여 말했지만 아무도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목격자도 증거도 없는 사건, 포도청은 이를 자살로 마무리한다. 이를 두고 화연은 격분해하는데 화연의 어머니는 자신도 지금 이 상황이 억울하지만 화연의 아버지가 역모 혐의를 받다가 돌아가신 지금 남은 우리가 살려면 억울하고 분해도 참아야 한다며 화연을 다독인다. 그 사이 저잣거리에서는 임오화변의 가담자들을 숙청하려는 대비마마(혜경궁 홍씨)의 흑막이라는 흉흉한 소문이 떠돈다. 이후 아버지의 장례가 끝나갈 무렵 화연의 어머니는 집안 살림을 정리하고 외삼촌이 계신 과천으로 내려가 다 잊고 살자며 화연을 설득하는데 화연은 아버지가 일생에 걸쳐 쌓아온 것들이 전부 부정당하는 상황에서 한양을 떠날 수 없다며 이를 단호히 거절한다. 끝내 한양에 홀로 남은 화연은 몸종인 곱분과 아버지 죽음의 비밀을 파헤치고자 하루가 멀다하고 사건을 담당한 포교 완희를 찾아가 재수사를 요청하고 완희는 그런 그녀에게 시달리다 아버지의 기록을 찾아볼 수 있도록 해줄테니 죽은 여인들의 시신과 유품을 수습하는 일을 해달라고 제안한다.
영조와 사도세자의 갈등, 그리고 이후 왕위에 오르게 되는 정조. 책은 조선 정조 시대를 배경으로 하여 역모 혐의를 받던 아버지의 죽음을 둘러싼 비밀을 파헤치기 위해 유품정리사가 된 화연의 삶을 그리고 있다. 그리고 그 속에는 여성을 대상화하는 사건들, 젠더의 역할과 정체성을 고착화시키는 사회, 피해자들이 가해자의 굴레를 쓰는 모순 등 오늘날까지도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는 메시지들이 담겨있다. 화연이 시신과 유품을 정리하며 만난 건, 여인들의 고달픈 삶이었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다가오지만, 이후의 과정들은 전혀 공평하지가 않았다. 부유하고 권력을 가진 자들의 죽음은 장엄하고 정중한 반면, 힘없고 약한 자들의 죽음은 비참하고 스산하기 때문이다. 조선이라는 세상에서 여성과 아이, 노비들이 바로 그런 존재였다. 그동안 알지 못했던 세상의 민낯과 마주한 화연. 그녀들은 왜 죽은 것일까? 그녀들은 왜 죽을 수밖에 없었을까? 화연의 물음이 커질수록, 여인들의 죽음 이면에 놓인 비밀은 아득하게 멀어져만 간다. 과연 죽은 이들의 물건만으로 화연과 곱분은 죽음의 비밀을, 세상의 진실을 찾아낼 수 있을까? 그리고 아버지의 죽음 뒤에 숨어 있는 거대한 음모를 밝힐 수 있을까? 남편에게 맞아 죽은 아내와 겁탈을 당하고도 오히려 죄인처럼 처벌받은 여성, 그 와중에 버려진 아이들까지. 역사적 사건과 실제 사연들을 바탕으로 저자의 상상력이 더해져서 이야기가 더욱 사실감 있게 느껴진다. 가독성 엄치척! 첫 페이지에서 마지막 페이지에 이르기까지 무조건 직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