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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부 매뉴얼
루시아 벌린 지음, 공진호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19년 7월
평점 :





테리는 버스 타기를 거부했다. 정류장에 앉아 있는 사람들은 그를 우울하게 만들었다. 그렇지만 그레이하운드 정류장은 좋아했다. 우리는 샌프란시스코나 오클랜드의 그레이하운드 정류장에 가곤 했다. 주로 오클랜드, 샌파블로 대로에 있는 곳에 갔다. 언젠가 그는 내가 샌파블로 대로 같아서 나를 사랑한다고 했다. 테리는 버클리 폐기장 같았다. 폐기장 가는 버스가 있으면 좋겠다. 우리는 뉴멕시코가 그리울 때 그곳에 갔었다. 삭막하고 바람이 많이 부는 곳, 갈매기들은 사막의 쏙독새처럼 높이 날아오른다. 그곳에선 사방으로 머리 위에 펼쳐진 하늘을 볼 수 있다. 쓰레기 트럭들은 우르릉우르릉 먼지 소용돌이를 일으키며 지나다닌다. 회색 공룡들. (p.53)
아버지는 어머니를 죽여버린 날 나를 더 이상 알아보지 못했다. 그 후로는 비서나 하녀에게 하듯 내게 명령했다. 어느 날인가 나는 아버지에게 내가 지금 어디 있느냐고 물었다. 아버지는 내가 도망쳤다고 했다. 어머니와 존 삼촌처럼 영락없는 모이니핸 종자, 나쁜 피. 나는 어느 날 오후 요양원 앞에서 떠났다. 구멍 네 개짜리 뷰익을 타고 온,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라틴계 놈팡이와 애슈비 대로를 따라 가버렸다는 것이다. 아버지는 그때부터 많은 시간을 환각 속에서 보냈다. 휴지통은 말하는 강아지로 바뀌었고, 벽에 드리운 나뭇잎 그림자는 행군하는 군대가 되었고, 크고 억센 간호사들은 이제 복장 도착증이 있는 스파이였다. 아버지는 줄곧 에디와 리틀 조 이야기를 했다. 그 두 사람은 아버지가 아는 사람들 같지 않았다. 그들은 매일 밤 나가사키 앞바다에서 탄약선을 타고 자유분방한 모험을 하거나 헬리콥터를 타고 볼리비아 상공을 날았다. 아버지는 내가 전에는 본 적이 없는 느슨하고 편안한 웃음을 웃곤 했다. (p.100)
우리는 저마다 혼자였다. 누구보다 어린 소녀들은 더했을 것이다. 그중 둘은 울고 있었지만 그들의 어머니는 자신들의 수치와 분노 속에 고립되어 방 안 어딘가를 응시하는 모습이 냉랭해 보였다. 혼자서. 나는 눈물이 차올랐다. 조는 떠났고, 엄마는 그 자리에 없었다. 언제나 그랬듯이. 나는 낙태를 원하지 않았다. 낙태할 필요가 없었다. 그 방의 다른 여자들은 끔찍하고 고통스러우며 곤란한 상황에 처해 있으리라는 것이 내가 상상한 시나리오였다. 강간, 근친상간, 온갖 심각한 사건들. 난 이 아기를 돌볼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가정을 이룰 것이다. 이 아기와 벤과 나. 진정한 가족. 내가 미쳤는지도 모른다. 적어도 이건 내가 내려야 할 결정이다. (p.120)
루시아 벌린은 스물네 살에 처음으로 단편소설을 발표했다. 서부의 탄광촌과 칠레에서 보낸 10대 시절, 3번의 실패한 결혼, 알코올중독, 버클리와 뉴멕시코, 멕시코시티에서의 생활, 싱글맘으로 네 아들을 부양하기 위해 일한 경험 등을 자신의 작품으로 가져와 감동적으로 그려냈다. 이 단편 선집에서는 세 번의 이혼과 네 아들의 싱글맘이자 알코올 중독자였던, 파란 많은 그녀의 인생을 조금 엿볼 수 있다. 1971년부터 1994년까지는 버클리와 오클랜드에서 고등학교 교사, 전화 교환수, 병동 사무원, 청소부, 내과 간호보조 등의 일을 해서 네 아들을 부양하는 가운데 글을 썼으며, 1994년에 콜로라도대학교에 초청 작가로 갔다가 부교수가 되어 6년 동안 학생들에게 큰 인기를 끌었다. 그러나 건강 문제로 2000년에 교수직을 사임하고 이듬해 로스앤젤레스로 이주했다. 말년에는 평생 시달리던 척추옆굽음증으로 허파에 천공이 생겨 산소호흡기를 달고 살았으며, 암으로 투병하다 2004년 사망했다.
아는 사람만 아는 작가였던 루시아 벌린. 그녀를 몰랐다면 지금이 바로 기회. 운이 좋게도 책이 정식으로 출판되기에 앞서 단편 16편이 수록된 가제본을 미리 받아서 읽어볼 수 있었다. 사후 11년 뒤에 다시 모습을 드러낸 루시아 벌린의 단편선집 <청소부 메뉴얼>. 책은 그녀가 살아생전에 출간한 76편 가운데 43편을 모아놓은 단편선집으로 우리는 이 작품집에서 레이먼드 카버의 근성과 그레이스 페일리의 유머에 루시아 벌린 자신의 위트와 애수를 더한 기적 같은 일상을 만나볼 수 있다. 그녀는 레이먼드 카버처럼 가난하고, 술과 마약에 중독된 사람들에 대해 썼고, 애니 프루처럼 미국 서부의 풍경을 놀랍도록 정밀하게 묘사했다. 읽어보면 알테지만 그녀는 정말 예상치 못한 모습으로 사람들을 끌어들인다. 잔잔하게 다가와서 소리없이 젖어든다. 이것은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인생이야기다. 상당수가 저자 자신의 인생에서 실제로 일어난 일을 바탕으로 한 까닭에 한 편 한 편을 눈여겨 바라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