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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의 방문자들 - 테마소설 페미니즘 ㅣ 다산책방 테마소설
장류진 외 지음 / 다산책방 / 2019년 7월
평점 :





철컥. 걸쇠가 걸리며 문이 잠기는 차가운 쇳소리가 복도에 울려 퍼졌다. 남자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번호 키를 누르는 소리가 멈췄다.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여자의 머리카락이 곤두섰다. 마치 남자가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것만 같았다. 아니야, 저 사람한테 내가 보일 리 없어. 아무리 되뇌어봐도 소용이 없었다. 눈동자보다도 작은 렌즈가, 커다란 유리문이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문밖의 남자가 자신을 훤히 들여다보고 있는 것처럼 느꼈다. 그는 뭔가 발견했다는 듯 점점 가까이 다가왔다. 동그랗게 뚫려 있는 여자의 시야에 남자의 상반신이, 어깨가, 얼굴이 ······ 그리고 마침내 새까만 눈동자가 가득 들어왔다. 남자가, 렌즈를 빤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p.23)
그렇다. 내 뒤에 올 사람이 누구인지 나는 모른다. 하지만 자꾸, 이상하게도, 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아는 사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작업대 앞에 웅크린 채 혈당계를 조립하는 여자들이 떠올랐다. 나는 그들의 일부였고, 그들과 다르지 않았다. 내가 그만둔 뒤에 빈자리를 채우려고 들어올 여자 역시 나와 일부분을 공유할 것이다. 그림자에 겹친 그림자의 어둠과 그늘처럼. 금연구역이라는 안내판을 가리키던 룰루의 손가락이 얼마나 바들거렸던가. 그 뒤에 먹은 사탕은 작고도 달았다. (p.72)
어느 저녁 긴 구글링 끝에 나는 그루피라는 단어를 찾아냈다. 지난여름 내내 내가 정체를 밝혀보기 위해 노력했던 P와 나의 관계가 그 단어 안에 명확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내가 본 건 그루피라는 단어에 대한 정의가 아니라, 홍대 씬에서 그루피를 보는 일이 얼마나 불쾌한지에 대한 개인적인 소회를 적은 포스트였음에도 나는 곧장 그 의미를 알아챌 수 있었다. 그곳에서 사람들이 나를 보는 미심쩍은 눈빛과 P가 나를 대하는 태도에서 지겹도록 체화해온 것이기 때문이었다. 내가 아는 모든 것을 그러모아도 설명되지 않던 한 시절이 그 단어의 발견과 함께 빠르게 무너져 내렸다. 그날에 나는 울지 않았다. 문득문득 눈물이 난 것은 그 후로 며칠이 지난 어느 날, 또 몇 달이 지난 밤들이었다. 문자에 답을 하지 않자 P는 이내 뜸해지더니 다시는 전화하지 않았다 (p.134)
우리는 결코 우리일 수 없었다. 보라는 애써 잊고 있던 장면 하나를 불러온다. 그해 여름, 우리는 함께 걸었고 같은 구호를 외치고 있었다. 보라의 곁에는 그가 있고 돌아보면 지나가 있다. 그러나 지나는 틈만 나면 돌아보는 보라를 대놓고 외면한다. 행렬의 밀도가 낮아질 때마다 보라는 긴장을 풀고 생각한다. 내게 상처를 준 건 너희들이잖아. 보라의 상상 속에서 언제나 지나는 그의 은밀한 연인이다. 그들은 그토록 보라를 기만하는 중이다. 그런데도 그들은 보라와 보폭을 맞추어 걷고 같은 내용의 구호를 외치고 있다. 언젠가 그를 만난다면 보라는 묻고 싶었다. 지나와 무슨 관계였냐고, 너희들이 진짜 나를 기만한 게 맞느냐고. 그러나 지나를 떠나는 지금 보라는 다른 것이 궁금하다. 기억 속에서 언제나와 같이 청년위원회 사무실에서 난동을 피우는 그를 붙잡아 세우고 보라는 가만히 묻는다. 선배는 왜, 사람들을 화나게 해요? (p.188)
페미니즘 소설은 이제 하나의 장르다. 픽션이라고 단정할 수 없는 여섯 편의 이야기! <새벽의 방문자들>. 2019년 현대문학상 수상 작가 박민정, 2018년 신동엽문학상 수상 시인 김현, SNS를 뒤흔든 데뷔작 「일의 기쁨과 슬픔」 장류진, 심사위원 만장일치 문학동네 대학소설상 정지향, 생계밀착형 멜로드라마의 탄생 하유지, 뜨거운 공감과 위로의 에세이스트 김현진. 이들 여섯 작가가 담아내는 페미니즘 테마소설. 2년 전 독자들을 만났던 《현남 오빠에게》의 후속작으로 기획된 이번 소설집은 전작보다 다양하다. 눈먼 섹스를 하기 위해 찾아온 남자들의 얼굴을 캡처하는 여자, 무례하고 어린 남자 상사에게 한 방 먹이고 자발적으로 공장을 그만두는 나, 어른들의 세계에서 어떤 배려도 받지 못한 채 연애라는 이름으로 섹스를 받아들여야만 했던 미성년의 나, 정치적 올바름을 주장하느라 인간에 대한 예의를 상실한 애인과 친구를 떠나는 보라, 선생들의 추행을 고발하기 위해 학교 복도에 포스트잇을 붙이는 유미, 결혼을 꿈꾸며 함께 저축한 데이트 통장을 전 남친에게 털리고 멘탈도 함께 털린 나 등 우리는 책을 통해 어쩌면 내 이웃이나 내 가족에게 일어났을지도 모를, 혹은 자기 자신에게 일어났을 지도 모를 가해자와 피해자가 불분명한 사건들, 누구에게 책임을 물어야 하는 건지 누구에게 화를 내야 하는 건지 분별하기 어려운 사건들을 목격하게 된다.
현대 페미니즘 운동은 여성에게 많은 혜택을 줬지만 가부장제, 성차별주의, 착취와 억압을 근절하지는 못했다. 누구도 원치 않았다. 아니 누구도 원하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누군가에 의해서 또는 누군가로 인하여 우리가 아니 누군가가 경험해야만 했던 일들. 소설이라지만 소설이라고 할 수 없을 만큼 너무나 사실적이다. SNS나 여러 매체를 통해 이미 익숙하게 많이 들어봤던 일들, 그래서인지 충격적이면서도 뭔가 익숙하게 느껴진다. 답답하고 화가 나고 분통이 터지는 일이지만 어느 누가 나선다고 해도 쉽사리 해결할 수 없는 일임이 분명하다. 이게 바로 현대 사회의 곳곳에 숨겨진 어두운 이면의 모습. 암암리에 일어났던 일이지만 널리 알려지지는 않은, 지금에 와서야 모두에게 알려지기 시작한 일들은 개인과 사회에 엄청난 파장을 불러일으킨다. 이런 균열들이 모이고 견고한 벽이 무너져버릴 수 있도록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함께 읽었으면 좋겠다. 내가 소중한 만큼 남도 소중하다는 걸 느낄 수 있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