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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가 돌아왔다
C. J. 튜더 지음, 이은선 옮김 / 다산책방 / 2019년 6월
평점 :





절대 돌아가지 마. 사람들은 항상 이렇게 얘기한다. 상황이 달라져 있을 거라고. 기억하는 것과 다를 거라고. 과거는 과거로 남겨두어야 한다고. 물론 맨 마지막 충고는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과거는 자꾸 되살아나는 성향이 있다. 꼭 맛없는 카레처럼. 나도 돌아가고 싶지 않다. 진짜다. 내 위시리스트에는 쥐들에게 산 채로 잡아먹히기나 라인 댄스가 그보다 더 상위에 랭크되어 있다. 내가 나고 자란 거지 소굴을 그 정도로 다시 마주하고 싶지 않다. 하지만 살다 보면 잘못된 선택 말고는 선택의 여지가 없을 때도 있다. (p.16)
살짝 목이 멘다. 나는 무감각해지는 데 점점 익숙해지고 있다. 그래도 잠깐 평정심에 금이 간다. 희망으로 가득했던 인생. 하지만 모두의 인생이 그렇다. 희망이다. 확약은 아니다. 우리는 미래에 우리 자리가 마련돼 있다고 믿고 싶어 하지만 예약만 되어 있을 뿐이다. 그 자리가 경고나 환불도 없이, 얼마만큼 가까이 왔는지에 상관없이 당장이라도 취소될 수 있는 게 인생이다. 경치를 감상할 시간 조차 없이 달려왔더라도 말이다. 벤처럼. 내 여동생처럼. (p.26)
나는 귀신을 믿지 않는다. 우리 할머니는 입버릇처럼 얘기했다.
“네가 무서워해야 하는 쪽은 죽은 사람들이 아니야. 살아 있는 사람들이지.” 거의 맞는 말이었다. 하지만 나쁜 일이 남긴 잔상을 느낄 수 있다는 말은 믿는다. 그것들은 콘크리트에 찍힌 발자국처럼 우리의 현실이라는 천 위에 각인된다. 그 흔적의 원인은 오래전에 사라졌을지라도 남은 자국은 영영 지워지지 않는다. 어쩌면 내가 그래서 아이의 방에 들어가지 않는 건지 모른다. 이 집에서 사는 건 괜찮지만 이 집 자체가 괜찮게 느껴지지는 않는다. 어떻게 그럴 수 있겠는가. 이 안에서 끔찍한 사건이 벌어졌고 건물들은 그걸 기억하는데 말이다. (p.34)
사람들이 말하길 시간은 치유의 힘이 엄청나다고 한다. 이 말은 틀렸다. 시간은 지우는 힘이 엄청날 따름이다. 무심하게 흐르고 또 흘러서 우리의 기억을 갉아먹고, 여전히 고통스럽지만 감당할 수 있을 만큼 작고 뾰족한 조각들만 남을 때까지 불행이라는 커다란 바위를 조금씩 깎아낸다. 무너진 가슴은 다시 맞출 수 없다. 시간은 그 조각들을 거두어 곱게 갈 뿐이다. (p.68)
작은 마을 안힐에서 마을 전체를 충격에 빠뜨린 살인 사건이 발생한다. 엄마가 아들을 처참하게 살해하고 자살한 것이다. 엄마는 아이의 시신 위쪽 벽에 피로 ‘내 아들이 아니야’라고 휘갈겨놓았다. 사건의 처참함에 경찰조차 눈살을 찌푸릴 정도였다. 그리고 이 한 문장으로 인해 가슴 깊숙한 곳에 비밀로 묻어두었던 20년 전 처참했던 사건의 봉인이 다시 열리게 된다. 그 사건이 일어났던 건 20년 전. 조 손이 열다섯 살 때의 일이다. 조와 친구들은 갱도로 들어가는 입구를 찾았다는 친구 크리스의 말에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열어서는 안 되는 문을 한밤중에 몰래 열고 만다. 가파른 계단을 따라 내려간 그곳은 놀랍게도 어린아이들의 유골이 가득한 동굴 무덤이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조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자신의 어린 동생 애니가 몰래 따라왔을 줄은. 동굴에서 뜻밖의 딱정벌레 떼의 습격을 당한 친구들은 허겁지겁 도망치려 하다가 쇠지렛대로 애니를 치고 만다. 애니는 죽었다. 조와 친구들 모두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그 일이 있고 48시간 뒤…… 애니는 상처 하나 없이 집으로 돌아왔다. 오빠의 이름을 다정하게 부르며. 그리고 조의 끔찍한 악몽이 시작되었다.
이 책이 증명한다. 스티븐 킹, 리 차일드 강력추천, 출간 즉시 아마존 베스트셀러, 40개국을 매혹시킨 환상의 스토리텔러, 2019년 스릴러 최대 화제작 등 책에 따라붙는 수식어가 어느 하나라도 헛되지 않는다. 틀린 말이 아니다. 읽어본 사람이라면 공감할 것이다. 아주 그냥 초반부터 난리가 났다. 너무 무서운데 책을 덮을 수가 없다! 누굴까? 도대체 누구야! 함정에 제대로 빠져버렸다. 예단하지 말 것. 모든 것에 의문을 제기할 것.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할 것. 저자가 전작 <초크맨>에서 보여주었던 강렬한 도입부와 반전을 거듭하는 속도감이 배가 되었다. 거기다 음산하고 신비주의적인 분위기까지 더해져 옴짝달싹할 수가 없다. 모든 문장은 단서가 되고, 그 단서는 후반부에 이르러 반전으로 되돌아와 독자들을 강렬한 충격에 빠뜨린다. 이래도 되나 싶을 만큼 압도적이다. 허투루 쓰인 문장이 하나도 없다. 정말 순간순간 입이 마르고 숨이 멎는 듯했다. 미쳤다 이건! 더위를 순식간에 날려버린다! 더위? 그게 뭔데! 이 작가가 앞으로 또 어떤 작품을 내놓을지 벌써부터 기다려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