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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미 히피 로드 - 800일간의 남미 방랑
노동효 지음 / 나무발전소 / 2019년 4월
평점 :
절판





‘점을 찍는 여행’과 ‘선을 따라가는 여행’. 둘 중에 어느 것이 더 나은가, 하는 문제는 여행자의 취향에 달렸다. 그리고 여행자의 취향이 다르면 가진 돈의 사용처도 달라졌다. 어떤 여행자는 맛집, 어떤 여행자는 투어프로그램, 어떤 여행자는 나이트클럽, 나의 경우엔 다른 경비를 아껴서라도 길과 풍경을 보는 데 돈을 투자했다. 지구상의 모든 길을 다 보고 싶었기에. 물론 나의 욕망이 불가능한 욕망이란 건 잘 알고 있다. 모든 길을 다 보았다 한들, 지나간 길에서 또 다른 길이 태어나고 자랄 테니까. (p.57)
레인보우 패밀리 오브 리빙 라이트Rainbow Family of Living Light. 줄여서 레인보우 패밀리라 부른다. 지구 행성 어느 대륙에나 존재하는 가족이지만 이끄는 사람은 따로 없다. 그럼에도 무지개 모임은 1972년 이후 현재까지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무정부주의 성향 유랑자 집회로서 조직이 워낙 느슨하다 보니 관심주제도 다양하다. 비폭력 평등주의, 환경주의, 페미니즘, 평화 행동주의 등등. 모든 관심주제는 ‘사랑과 평화’로 귀결된다. 그들은 말한다. 무지개 모임은 1960년대 히피들이 뿌린 꽃씨에 물을 주고, 씨앗을 퍼트리는 것이라고. (p.75)
사람들은 내가 여행을 좋아할 거라고 여긴다. 그러나 내가 진정 사랑하는 건 언제나 ‘다른 곳에서의 삶’이었다. 여행을 하든, 관광을 하든 ‘다른 곳으로 가는 길’은 늘 존재하지만 ‘다른 곳에서의 삶’이 늘 존재하는 건 아니다. 가령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도 한 달을 보냈다. 아름다운 작품들로 가득한 미술관, 화려한 쇼와 수많은 볼거리들. 어디에서나 ‘다른 곳으로 가는 길’이 있었지만 ‘다른 곳에서의 삶’은 없었다. 마르델플라타엔 ‘다른 곳에서의 삶’이 있었다. 내게 여행이란 단 한 번의 인생에서 여러 겹의 생을 경험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 마르델플라타에서 보낸 또 다른 생은 행복했다. (p.154)
삶은 어떤 우연에 의해 전혀 다른 곳으로 방향을 틀기도 한다. 오늘의 기쁨과 환희가 내일의 슬픔과 고통으로 돌아오기도 하고, 오늘의 슬픔과 고통이 내일의 기쁨과 환희가 되어 돌아오기도 하듯이. 강도 사건을 겪고 키토를 떠나 도착한 마을에서 만난 떠돌이 히피들. 다들 호스텔에서 처음 만난 사람들이었다. 국제방랑서커스단. 내 앞에 한 번도 경험한 적 없는 삶이, 또 다른 세계가 기다리고 있었다. (p.247)
그에게 남아메리카는 방랑의 대륙이었다. 히피, 거리의 악사. 호보(떠돌이 일꾼). 히치하이커. 떠돌이 명상가. 유랑 서커스단. 떠돌이 수공예가. 지구 행성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없는 방랑의 물결이 남아메리카를 흐르고 있었다. 물론 짧은 여정으로 대도시만 찍고 가는 관광객들과 출장 비즈니스맨에겐 보이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세상 조류에 아랑곳없이 시간을 향유하는 여행자는 만나게 될 것이다. 남아메리카의 터미널과 광장에서 큰 배냥을 메고 꽃잎처럼 떠도는 방랑자들을. 남아메리카는 가난한 나라들로 이뤄진 대륙. 북아메리카의 히피들처럼 타고 다닐 컨버터블 자가용이나 폭스바겐 버스 따윈 없었다. 황량한 도로엔 히치하이킹 차량조차 드물었으니까. 남아메리카에서 태어난 ‘꽃의 아이들’은 제 몸으로 익힌 기예와 기술로 여비를 벌며 대륙을 떠돌기로 했다. 길 떠난 아이들은 낯선 나라의 광장에서 자신이 만든 수공예품을 팔고, 기예를 부리고, 악기를 연주해서 여비를 벌었고, 히치하이킹이나 대중교통을 갈아타며 길을 떠돌았다. 가진 것도, 잃을 것도 없는 가난이 북아메리카 히피가 가졌던 한계를 넘어서게 한 것이다.
지구 풍경과 삶의 베일을 벗기기 위해, 2~3년 주기로 대륙을 옮겨 다니며 여행하는 작가 노동효. 그가 7년 만에 내놓은 신작 <남미 히피 로드>. 페루에서 시작해 볼리비아, 파라과이, 아르헨티나, 우루과이, 칠레, 에콰도르, 콜롬비아, 브라질, 쿠바에 이르기까지 저자가 남아메리카를 떠돌며 전직 방랑자였거나 현직 방랑자인 자매형제들과 어울려 보낸 800일간의 기억을 여기 이곳에 가득히 담아냈다. 그는 보통의 여행가들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많은 여행안내서에서는 남미를 가르켜 치안이 불안하고, 불량배로 가득하고, 소매치기와 강도 사건이 비일비재하다고 소개하지만, 작가는 오히려 각 도시에서 가장 허름한 숙소를 찾아다니며 유럽이나 북미출신 배낭 여행자나 일반 관광객이 아닌 현지에서 살아 숨 쉬는 방랑자들을 만난다. 국내 최초로 공개되는 히피 공동체 ‘레인보우 패밀리 RAINBOW FAMILY’와 안데스 산자락에서의 숲속 생활, 콜롬비아 커피 마을의 서커스 학교 체험, 남아메리카의 광장과 거리에서 만난 악사, 방랑 시인, 떠돌이 명상가, 유랑서커스단, 길거리 수공예가, 쿠바의 젊은 음악가 등 남아메리카의 자유 영혼, 그리고 히피 무리와 어울리며 지낸 체험담을 실제 그들의 모습을 담은 사진과 함께 생생하게 그려낸다. 그만큼 그에게 남아메리카는 여행자들의 불안과 불편을 털어버릴 만큼 강력한 매력을 발산하는 곳이었다. 그의 여행 방식은 장기체류 후 이동. 지구란 행성과 인간을 더 잘 알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고, 넓은 대륙이나 지역의 경우 최소 2년이 소요되었다. 그를 이끌어가는 원동력은 바로 “저 너머엔 무엇이 있을까?”. 궁금증과 호기심이 그를 이처럼 끊임없이 움직이게 만든다. 그가 살아 있는 한, 길이 존재하는 한, 그는 이 길을 계속 따라갈 것이다. 각 지역에 맞는 속도로 너무 빠르지 않게, 너무 느리지 않게. 이 책 뭐지? 떠나고 싶지만 떠날 수 없어 책을 들었더니 책이 오히려 등을 떠민다. 그와 함께 하는 길은 즐거웠고 감동적이었으며 눈에 직접 담고 싶을 만큼 아름다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