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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귀엽게 보이는 높이
모리미 토미히코 지음, 김민정 옮김 / arte(아르테) / 2019년 5월
평점 :
품절




우리 주변에 펼쳐진 세계를 즐거운 눈으로 보려고 할 때 우리는 어린이의 눈이 된다. 물론 우리는 어른이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우리 안에 있는 어린이의 눈을 질끈 감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우리 안의 어린이란 녀석은 멍청해서 어린이의 눈으로 세계를 보려고 해도 잘 되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어린이의 눈을 감아버린다. 개중에는 눈을 너무 꼭 감아서 어린이 눈으로 세상을 보는 법을 잊어버리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대부분은 자기 안의 어린이의 눈을 자유자재로 감았다 떴다 한다.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 걷거나 달릴 때, 숲을 바라볼 때, 고양이를 쓰다듬을 때,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 어린이의 눈을 뜬다. 물론 어린 시절과 똑같이 넘치는 즐거움을 맛보기는 어렵다.그래도 그 시절에 배운 방법이 어른이 되 지금, 큰 도움이 될 것이다. (p.35)
소설을 쓸 때, 변함없이 유지하고 있는 유일한 방침은 ‘어쨌든 쓴다’는 것이다. 당연한 일인데, 이것 말고 여러분께 보일 다른 방법이 없다. 세상에는 마감이라는 시스템이 있어서 반사적으로 쓰게 된다. 물론 아무 바탕도 없이 ‘어쨌든 쓰는 것’은 불가능하므로 일정한 부분은 메모에 의존한다. 떠오른 조각들을 대충 적어서 팔짱을 끼고 노려보다가 그중에서 가장 효과적으로 끌어낼 수 있는 이야기가 무엇인지 골똘히 생각한다. 수수께끼를 푸는 것과 비슷하다. 잘하면 조각과 조각을 연결하는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또 너무 심각하게 고민하기보다 일단 써본다. 이 시점에서는 테마 같은 게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데 테마가 마지막까지 나타나지 않을 때도 있다. (p.116)
내 상상력의 기반은 초등학생 시절과 크게 다르지 않다. 호기심과 공포, 이것은 내가 소설 집필하는 데 필요한 중요한 연료이기 때문이다. 나는 지금 나라라는 곳에 살고 있는데, 최근 들어 주변을 탐험하는 버릇이 또 나오기 시작했다. 그중 자주 찾는 산책 코스 중 하나로는 철도 아래를 통과하는 터널이 있다. 아무래도 그곳이 신경 쓰여 가만히 있을 수가 없다. 터널 저편에 보이는 숲이 호기심을 자극하고, 새벽에는 그 터널 저편이 저승으로 연결되어 있을 것 같은 분위기마저 감돈다. 그리고 지금까지의 경험에 비추어보자면, 언젠가 나는 이 터널에서 시작되는 소설을 쓰게 될 것 같다. (p.347)
현실과 환상 사이를 자유롭게 오가는 소설가, 모리미 도미히코. 그가 선사하는 마법 같은 세계의 뒷이야기. <사람이 귀엽게 보이는 높이>. 이 책은 『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의 작가 모리미 도미히코가 처음 선보이는 에세이집으로 작품의 시작이 된 일상의 조각을 풀어 놓으며 개인적인 이야기와 일기까지 아낌없이 담아낸다. 장기간에 걸쳐 다양한 상황을 겪으며 쓴 글이라 분량이나 내용도 전혀 다르다. 독서에 대한 글과 작품 해설, 그가 좋아하는 것(영상물이나 아이템, 음식에 관한 글), 그의 소설과 관련된 글, 산책과 철도, 여행에 관한 글, 그의 일상, 이 책을 위해 모은 기고 및 대학원 시절의 일기, 2012년부터 2년간 대만의 문예지 <종합문학>에 연재한 칼럼 등 다다미 넉장반의 좁은 방에서부터 어디에서도 본 적 없는 마법 같은 세계로 이어지는 그의 여정은 짧고, 웃기고, 엉뚱하면서도 한편으론 묵직하게 책과 함께하는 밤을 더욱 풍성하게 만들어준다.
저자는 말한다. 자기 전에 읽어야 할 책. 그런 책을 한번 써보고 싶었다고. 철학서처럼 어렵지 않고, 소설처럼 마음을 사로잡는 책도 아니다. 그렇다고 재미가 없어 하품이 나오는 것도 아니고, 손에서 놓지 못한 정도로 어마어마하게 재미있는 작품도 아니다. 실생활에 도움이 되는 정보는 없지만, 읽고 있는 시간이 허무해질 정도로 무익하지도 않다. 독이 되는 것도, 약이 되는 것도 아닌 책. 중간부터 읽어도 되며, 읽고 싶은 부분만 읽어도 되는 책. 긴 것, 짧은 것, 농후한 것, 얄팍한 것, 능청스러운 것, 나름대로 성실함을 갖춘 것 등 다양한 글이 수록되어 있어서 그 몽롱한 분위기가 태평양에 떠 있는 이름 모를 섬의 모래사장에 왔다가 물러가길 반복하는 파도처럼, 책을 읽는 독자들을 평안한 꿈의 나라로 유혹할 것이다. 지금 이 책이 바로 그런 책이다. “읽다 졸리면 그냥 주무세요.” 라는 저자의 당부가 괜한 말이 아니다. 밤낮을 가릴 것 없이 아무 때나 졸리면 되는대로 쓰러져 자고 잠에서 깨어나 아무 때나 다시 들여다보면 된다. 머리맡에 이 책을 두고 저자를 만난다면, 잠에 들기까지 시간을 가득 채워 알차게 보낼 수 있다. 그만이 가진 무한한 상상력은 우리에게 신선한 자극제가 되어 우리들의 빈곤한 상상력을 한없이 부풀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