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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여행은 끝났다 - 다시 시작한 서울살이
김소망 지음 / 꿈꾸는인생 / 2019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관계라는 게 세심함과 노력을 필요로 하는 일인데, 꽤 오랫동안 덜 세심하고 덜 노력해도 괜찮은 시간 속에 있었구나 싶다. 며칠 전에는 지인으로부터 “누가 누구에게 상처를 줬다더라, 누구는 누구에게 상처를 받았다더라” 하는 얘기를 들었다. ‘나는 상처 안 주도록 조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면서, 이게 정말 오랜만에 느끼는 감정이라는 걸 깨달았다. 바로 이거지. 내가 한국에서 어려워하던 것. 이게 한국에서의 생활이었지. 상처주고 상처받는 것. 혹은 상처 주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것. 조금 덜 노력해도 되는 쿨하고 대범한 인간관계를 좋아하는데, 쉽지 않다. 서로 좋아하는 관계일수록 더욱 그렇다. (p.45)
메일함을 한참 들여다보고 있으면 아직도 내가 여행자라는 착각이 든다. 한 여행사는 내가 좋아할 만한 여행지를 계속해서 추천해 주고 있었다. 제목만 읽고 넘어갈 나라를 추천하는 날이 있는가 하면, 어느 날은 아주 기가 막히게 내 취향을 저격한다. 빅데이터는 무섭다. 어떤 메일은 제목만 읽고도 마음이 요동쳐 입맛이 쓰다. 지금 당장 아이슬란드 숙소를 예약하라니. 너무 비현실적이잖아. (p.73)
이야기는 누구에게나 다 있더라. 일 년 동안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세계 여행을 가지 않아도 짜릿한 일들은 얼마든지 일어났고,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지 않아도 생각의 폭이 넓어질 만한 일들은 발생했다. 그리고 정말 모든 사람이 일 년 동안 매우 성실하게 살았더라, 우리를 포함해서. 성실함이란 아무 하는 일 없이 빈둥댄 사람은 꺼낼 수 없는 단어가 아니었다. 고민과 불안, 시도와 실패와 관련된 말이었다. (p.114)
사람들은 종종 우리에게 “이제 좋은 시절 다 지났네, 얼른 현실로 돌아와야지?”라고 얘기하지만 좋은 게 좋지만은 않았던 것처럼 이 또한 나쁘지만은 않을 것이라는 게 우리의 생각이다. 재취업이 여행자들을 현실로 컴백시키는 가장 강력한 힘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나는 다시 일하기 시작한 지 3개월이 넘었는데도 사람들이 말하는 ‘현실’로 돌아온 느낌이 별로 없다. 그들이 말하는 현실이라는 게 ‘언젠가 찾아올 좋은 날을 위해 오늘 하루도 어찌어찌 잘 버텨 본다’는 힘듦을 뜻하는 것이라면 말이다. 창연의 새 직장이 창연을 최대한 늦게 현실로 보내 주면 좋겠다. 아예 안 보내 주면 제일 고맙고. (p.184)
절대로 돌아가고 싶지 않은 곳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한국으로 여행을 가고 싶다고 생각한 날들도 드물지만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얼른 집에 돌아가고 싶다고 생각한 적은 없다. 어차피 언젠간 돌아갈 한국, 몇 주 혹은 몇 달 늦게 갈 수 있다면야 최선을 다해서 늦게 돌아가고 싶었다. 이들의 마지막 여행지는 방콕. 계획대로라면 일 년 여를 여행하며 가 본 숙소들 중 가장 럭셔리한 호텔에서 묵었어야 했다. 실외 수영장이 있고, 호텔식 뷔페 조식을 먹을 수 있는 곳. 하지만 시댁에 건강이 좋지 않은 어린아이가 한 명 있었는데 갑자기 상태가 심각해졌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고 도저히 그럴 수 없었다. 지금 당장 한국에 들어오라고 말하는 아무도 없었다. 오히려 오지 않아도 된다고, 어차피 일주일 뒤에 오는 것이 아니냐며 그때 보자고 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래서 예약했던 호텔 숙박권과 비행기 티켓을 찢고 여행의 끝을 일주일 앞당겼다.
“여행이 가르쳐 준 대로 사는 시간이다. 삶에 회피할 수 있는 건 없고, 저녁까진 울겠지만 밤에는 웃을 수도 있다는 걸 기억하면 덜 슬프고, 증오보다 사랑으로 걷는다. 내 일상은 고작 나만 알아차릴 정도의 아름다움을 덧입었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여행을 떠나면서 여행이 자신을 변화시켜 줄 거란 기대는 저자에게 애초부터 없었다. 변화가 꼭 여행 중에 일어나야 한다는 집착도. 하지만 그럼에도 그녀는 달라졌고, 더 분명해졌다고 한다. 이제 다시 서울에서의 삶을 시작한다. 조금 달라지고, 많은 부분은 여전한 모습으로. 세계 여행은 끝났다.
여행에 대한 이야기는 많다. 하지만 그 이후의 이야기는 극히 드물다. 그래서 흥미가 일었다. 모두의 궁금증. 세계 여행을 끝내고 그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현실에 잘 적응할 수 있을까. 미련이 생겨 다시 여행하고픈 마음이 들지는 않을까. 세계 여행 후 다시 시작한 서울살이 이야기 <세계 여행은 끝났다>. 책은 1년의 세계 여행을 마치고 서울에서 맞는 첫날부터의 일상 이야기를 차곡차곡 담아낸다. 남편과 일 년 동안 이사하듯 돌아다닌 세계 여행. 그러고 다시 돌아온 한국은 우습게도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한국이구나, 한국이야. 한국에서의 생활이라는 건 이제 돈을 벌어야 한다는 것과 인간관계가 시작되었다는 것.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 때문에 매우 행복했다가 때때로 마음이 어려워지기도 한다는 것, 그리고 기피하고 싶은 순간들을 맞이하리라는 걸 뜻하는 것이었다. 안 하다가 하려니 아주 살짝 빡세다. 여행병이 다 무어냐. 순식간에 치고 들어오는 감정들이 많아서 그럴 틈도 없다. 여행이 끝난 후 느껴지는 어려움이 이런 것이라니. 하지만 책을 읽다 보면 저절로 깨닫게 된다. 여행은 여행대로 일상은 일상대로 의미가 있고, 나의 오늘이 꽤 괜찮을 수 있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게 나에게는 크나큰 위로가 된다. 나는 나의 삶을 살고, 너는 너만의 삶을 살고 인생이란 건 어찌 보면 각자 떠나는 여행이 아닐까. 내 인생의 황금기는 바로 지금 이 순간. 삶은 도전하고 노력하는 사람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