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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하맨션
조남주 지음 / 민음사 / 2019년 5월
평점 :





L2 대부분은 주민 자격이 되지 않으나 고향을 떠날 수 없어 2년마다 모욕적인 자격 심사와 건강 검사를 받고 L2 체류권을 연장해 가며 타운에 남은 원주민과 그런 L2들이 양육의 의지 없이 낳은 아이들이다. 진경은 L2도 못 되었다. ‘사하’라고 불리었다. L도 L2도 아닌, 아무것도 아닌, 마땅한 이름도 없는 이들. 사하맨션 주민이라서 ‘사하’인 줄 알았는데 사하맨션에 살지 않아도 ‘사하’라고 했다. 너희는 딱 거기까지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p.15)
‘타운’이라 불리는 세계에서 가장 작고 이상한 도시국가. 밖에 있는 누구도 쉽게 들어올 수 없고 안에 있는 누구도 나가려 하지 않는 비밀스럽고 폐쇄적인 국가에서 사하맨션은 유일한 통로 혹은 비상구 같은 곳이다. (p.33)
“우리는 누굴까. 본국 사람도 아니고 타운 사람도 아닌 우리는 누굴까. 우리가 이렇게 열심히 성실히 하루하루를 살아가면 뭐가 달라지지? 누가 알지? 누가, 나를, 용서해주지?”
진경은 계속 입을 다물고 있었고, 도경은 길게 한숨을 내쉰 후 등을 돌려 누우며 덧붙였다.
“나도 타운 주민이 되고 싶어.” (p.51)
맨션에서는 사소한 싸움이 자주 일어났다. 타운 주민을 때리거나 난동을 피워 경찰에 끌려 가는 경우도 적지 않았는데 상대는 대부분 약속을 지키지 않은 업주였다. 결국 맨션 사람들이 돈을 못 받거나 치료를 못 받는 것으로 사건은 마무리되었다. 대가가 보장되지 않는 단순한 일을 기계처럼 반복하는 삶은 뒷걸음질 같았다. 두렵고 뎌디고 힘들게 도착하고 보면 늘 못한 자리. 맨션 사람들은 어려지고 유치해지고 단순해졌다. (p.74)
기업이 한 도시를 인수한다. 도시는 본국으로부터 독립, 세상에서 가장 작고 이상한 도시국가로 변모한다. 밖에 있는 누구도 쉽게 들어올 수 없고 안에 있는 누구도 나가려 하지 않는 비밀스럽고 폐쇄적인 이곳을 사람들은 타운이라 부른다. 안전하고 부유하며 높은 삶의 질을 보장하는 타운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 주민권이 있는 L과 체류권이 없는 L2. 일정 수준 이상의 경제력과 타운에서 필요로 하는 전문 능력, 두 가지 조건을 갖춘 사람들은 주민권을 획득할 수 있다. 미성년자는 주민의 자녀이거나 주민인 법정후견인이 보증할 경우 주민으로 인정받을 수 있다. 한편 주민 자격에는 못 미치지만 범죄 이력이 없고 간단한 자격 심사 및 건강 검사를 통과하면 체류권을 받을 수 있다. 이들은 2년 동안 타운에서 살 수 있다. 2년 동안은 걱정 없이 어떤 일이든 할 수 있지만 이들을 원하는 일자리는 대부분 건설 현장, 물류 창고, 청소 현장같이 힘들고 보수가 적은 일이다. 그리고 주민권은 물론 체류권도 갖지 못한 사람들이 있다. 사하맨션 사람들이다. 그들은 사하라 불린다. 본국에서 살인을 저지른 도경과 그의 누나 진경은 숨을 곳을 찾던 중 수십 년 전에 독립했다는 남쪽 어딘가의 도시국가와 그 안에 섬처럼 고립된 사하맨션을 떠올린다. 그곳은 정말 거기 있었다. 맨션에서의 평온한 생활도 잠시, 도경과 사랑에 빠진 타운 주민 수가 시신으로 발견되고 도경은 자취를 감춘다. 경찰은 수의 죽음이 강간, 살인에 의한 것이라 발표하고 그 범인으로 도경을 지목한다. 한편 사하맨션을 향하던 감시와 경계가 느슨해지더니 더 이상 제재가 가해지지 않는다. 타운은 왜 사하맨션을 철거하지 않는 걸까. 맨션의 정체가 모호해질수록 맨션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얼굴도 평범하지만은 않아 보인다.
책은 거부당한 사람들의 절망감을 통해 소외된 삶의 현재와 미래를 그려낸다. 기업의 인수로 탄생한 기묘한 도시국가와 그 안에 위치한 퇴락한 맨션. 그곳에서 국가는 오직 두 분류의 사람만 사람으로 대한다. 안전하고 부유하고 높은 삶의 질을 보장받은, 전문 능력이 있는 주민권 보유자. 2년 간만 머무를 수 있는, 힘들고 보수가 적은 일에 종사하는 체류권 보유자. 그리고 그 바깥에 사하가 있다. 본국의 국민도 아니고 타운의 주민도 아닌,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이들을 부르는 이름 사하. 사하맨션은 타운의 유일한 통로이자 비상구다. 비참한 생의 종착지이자, 그들에게 허락된 마지막 공동체. 도경과 진경, 사라와 만 등 책은 부러 딴청을 피우며 보려하지 않았던 우리들에게 사회 곳곳에 자리한 약자와 소수자가 마주한 차별과 혐오의 현상을 돌아보게 만든다. 30년 동안 맨션을 찾은 사람들은 국가로부터 반품되었거나 반입조차 불가한 사람들. 지금과 비교해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해지지 않았다. 그곳에서 그들은 공포와 불안, 절망과 좌절을 경험하며 하루하루를 삶을 이어간다. 권력층의 횡포속에서 소외되고 고립되고 단절되어 살아가는 이들의 삶에 한줄기 희망이라고는 보이지 않는다. 권력을 손에 쥔 자들은 자신이 가진 신분을 이용하여 온갖 부조리를 자행하고 그들은 죄인이 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들은 여기가 끝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포기하기는 커녕 그곳에서 또 하나의 세계를 만들어 나간다. 그리고 그 정신은 아이들이 성장하고 어른이 되면서 다음 세대로 이어진다. 우리의 삶이 이렇게나 치열했었나. 각자가 꿈꾸는 유토피아. 우리는 과연 그곳에 도달할 수 있을까. 우리가 지금 살아가는 이곳은 디스토피아. 사회적인 변화가 가속되면서 사람들의 가치관이 많이 달라졌다고는 하지만 내가 보기엔 아직도 그 영향력이 미미하다. 현재에 안주하여 사회에 더이상 발전이 없다면 어물어물하는 사이 이를 바꾸려 노력하는 이들의 수고는 무산되고 말 것이다. 사회적 문제로 부각되고 있는 이 부분에 있어서 사람들의 지속적인 관심과 변화가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