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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리게 천천히 가도 괜찮아 - 글로벌 거지 부부 X 대만 도보 여행기
박건우 지음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19년 4월
평점 :





목적지? 그런 거 없다. 앞으로도 목적지를 정하고 걷는 일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저 하루 20~30km를 걷고, 지치거나 해가 지거나 새로운 만남에 이끌리면 그곳이 목적지가 되는 것이다. 어깨에는 각각 10kg에 못 미치는 짐들이 얹혀 있다. 단기 여정으로는 가벼울지 모르나, 길게 보면 꽤 부담스러운 무게다. 대도시인 타이베이와 가오슝만은 대중교통으로 통과하려는 게 그나마 없던 계획 중 하나였다. 도시에서는 인도와 차도가 가중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시작부터 미키가 또 도발적인 발언을 한다. 타이베이를 걸어서 통과하자는 것이었다. (p.21)
오후 7시. 출발한 지 13시간 만에 호스트 집에 도착했다. 둘의 행색이 어찌나 꾀죄죄하던지 호스트를 쳐다보기가 민망할 정도였다. 호스트는 우리가 타이베이에서 걸어왔다는 얘기를 듣더니 자기가 힘겨운 표정을 지었다. 처음 연락할 때 걸어간다는 말은 했지만, 그 시작점이 타이베이라는 말은 하지 않았었나 보다. 우선 냄새 처리가 급했던 우리는 밥도 안 먹고 샤워부터 했다.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 귀찮았던 나는 샤워와 빨래를 동시에 할 작정으로 옷을 입은 채 무릎을 꿇고 샤워를 했다. 몸의 긴장이 풀리자 근육이 경직되기 시작했다. 미키도 나도 무릎이 굽혀지지 않아 골반 힘으로 다리 전체를 움직여야 했다. 내 기억 속에 이렇게 힘든 날은 일찍이 없었다. 경험 부족과 무모함이 만든, 일종의 임종 체험이었다. (p.61)
대화도 휴식도 없이 걷던 중 비까지 쏟아졌다. 태워준다며 멈춘 차도 있었지만, 언젠가 나올 마을을 기대하며 묵묵히 걸음을 계속했다. 그렇게 똥아오라는 마을에 도착했다. 몇 시간 만에 양팔을 자유롭게 휘두를 수 있는 자유가 생기자 그제야 농담이 나왔다. 똥아오는 곳곳에 원주민 상이 세워져 있는, 아주 작은 동네였다. 사방 어디에서도 야영이 가능해 보였다. 일단은 허기부터 달래고자 식당에 들어갔다. 식당 주인이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한국 사람! 일본 사람!”을 말하며 정확히 당사자들을 가리켰다. 가방을 보고 알아보나 싶었다. 또 무슨 말을 이어가야 하는데 의사소통이 되지 않자 재빠르게 핸드폰을 뒤적이더니 사진 한 장을 불쑥 내밀었다. 사진 속에는 우리가 찍혀 있었다. (p.92)
자칭 ‘대한민국 사회 부적응자’ 박건우와 ‘일본 활동성 히키코모리’ 미키가 만나 두 번째 만남에서 청혼하고, 오로지 느낌 하나로 결혼한 뒤, 스스로 ‘글로벌 거지 부부’라 칭하며 집도 절도 없이 인도, 라오스, 태국 등지의 동남아를 떠돌며 살아가는 이야기를 솔직하게 담아낸 국적 초월, 나이 초월, 상식 초월, 9살 연상연하 커플의 무일푼 여행기 <글로벌 거지 부부>. <느리게 천천히 가도 괜찮아>는 이들 부부의 두 번째 여행기로 68일간의 대만 도보 여행을 통해 걷는 사람들의 동물적 고민과 현지에서 만나는 사람들의 따뜻한 이야기가 담겨있다. 무엇이든 시작했다 하면 끝까지 해내고야 마는 근성을 가진 일본인 아내 미키, 울컥울컥 하지만 언제나 아내가 하는 말에 귀를 기울여주는 한국인 남편 박건우. 자국에서 일도 안 하고 추위를 피해 도망 온 이들 부부의 대만 도보 여행 대망의 첫날. 5km쯤 걸었을 때부터 바람이 심상치 않더니 금세 굵은 빗줄기가 쏟아지고 결국 쉴 새 없이 내리는 비는 멘탈을 쪼개나갔다. 비도 오고 배도 고프고 밤은 깊어만 가는데 잘 곳은 보이지 않고 녹초가 된 몸뚱이를 이끌고 무작정 찾아간 곳에서는 모두가 야영을 할 수 없단다. 연이어 들리는 불가능하다는 말에 마음은 급해지고 불안감은 커져만 가는데 그래도 살아날 구멍은 있었다. 구사일생으로 어찌어찌하여 정자 밑에 텐트를 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런 일은 도보 여행 내내 이어진다. 카우치서핑을 이용해 잘 곳이 생기지 않으면 어디라도 허락을 구해 자야할 곳을 정해야 했던 것.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이들을 알아보고 지나가던 이들이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 준 것이다. 처음 본 이들 부부에게 서슴없이 방 한켠을 내어주고 힘내라며 구호물자를 건내주고 그렇게 그들은 때로는 아찔하게 때로는 은혜롭게 도보여행을 이어 나갔다.
미키와 처음 대만에 왔던 4년 전. 그에게는 편견이 있었다. 대만은 중국과 다를 바 없을 거라는 편견이었다. 거기에 정치, 스포츠 문제로 격양된 반한 감정 등, 언론을 통해 대만에 대한 좋은 기사를 접한 기억이 없던 터라 대만에 대한 설렘이 없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모든 게 반대였다. 대만은 처음 발을 디디는 순간부터 엿새 후 떠나는 날까지 자유가 만연한 우호적인 나라였다. 저자는 이때 받은 인상을 평생 간직하리라 마음먹고 몸에 ‘I ♥ TAIWAN’을 새겼다. 고작 엿새 체류하는데 문신이라니 자칫 어리석게 느껴질지 모르지만, 그에게는 자신이 느낀 것이 기분 탓이 아니라는 확신이 있었고, 3년 뒤 홀로 대만 여행을 하면서 그 확신은 동경으로 바뀌었다. 1,113km. 길면 길고 짧으면 짧다는 양면성 따윈 따질 수 없을 만큼 죽어라 긴 시간이었다. 이 시간 동안, 저자는 ‘내 두 번 다시 도보 여행은 하지 않으리라’는 후회와 두 번 다시 느끼기 어려운 감동을 얻었으며, 지구상에서 이토록 친절한 나라를 없으리라 단언할 수 있을 만큼 대만을 잘 알게 되었다. 이 책은 관광지를 소개하는 가이드북은 아니지만, 인간의 자비에 대해서는 아주 좋은 사례를 소개한다. 저자의 말처럼 감성이 적나라하게 파괴되는 고행기에 가깝지만, 주인공들과 함께 걸어볼 만한 가치있는 이야기가 제법 많이 나온다. “느리게 천천히 가도 괜찮아” 구태어 빠르게 걸어갈 필요가 있을까. 천천히 걸어가는 여행이었기에 이것도 보고 저것도 보고 볼 수 있는 것도 느낄 수 있는 것도 더 많은 힘들었지만 신나고 유쾌한 알찬 여행이었다. 집을 떠나온 가치가 충분히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