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지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권일영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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츠요시는 넋이 나갔다. 자기가 한 짓을 믿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눈앞에 있는 할머니가 죽은 것은 분명했다. 피가 묻은 드라이버를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여기서 얼른 도망쳐야 한다는 결론을 내리는 데만도 몇 초가 걸렸다. 허리 통증마저 느껴지지 않았다. 츠요시는 드라이버를 다시 벨트에 차고 일어섰다. 조심조심 걸음을 옮겨보았다. 발의 중심이 바뀔 때마다 허리에서 등줄기로 심한 통증이 느껴졌다. 하지만 멈출 수는 없었다. 거의 기다시피 간신히 현관을 지나 양발만 신은 채 밖으로 나왔다. 해는 아직 높이 솟아 있고, 푸른 하늘이 펼쳐져 있었다. 금목서 향기가 났다. (p.24)

 

츠요시의 범행 내용은 텔레비전이나 신문을 통해서 알게 되었다. 혼자 사는 노파의 집에 들어가 현금 백만 엔을 빼앗았지만 도주하려다 집주인에게 들켰다. 주인이 경찰에 신고하려 하자 갖고 있던 드라이버로 찔러 죽였다. 하지만 허리에 지병이 있어 멀리 도망치지 못하고 파출소 경찰관에게 발각되었다. 용의자가 오가타 씨 집을 노린 것은 예전 이삿짐센터에 근무할 때 그 집에 들어가본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용의자는 그 집에 부자 노파가 혼자 살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뉴스 캐스터의 말투나 신문 기사의 뉘앙스는 다케시마 츠요시를 냉혹한 살인마처럼 표현하고 있었다. 나오키가 보기엔 형과 전혀 연결되지 않는 이미지였다. 하지만 그런 보도에 잘못된 애용은 거의 없었다. 유일하게 정확하지 않았던 점이라면 범행 동기에 관한 내용이었다. (p.35)

 

차별과 편견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잘 알기에, 나오키는 현재 상태로는 자신이 행복하게 살 수 없을 거라고 믿었다. 그걸 손에 넣기 위해서는 뭔가 힘이 필요하다고 확신했다. 어떤 힘이건 상관없다. 뛰어난 재능이건 재력이건. 나카조 가문에는 그런 재력이 있다. 그걸 포기하는 것은 아사미에게 자기와 똑같은 고통을 강요하는 셈이다. 만약 츠요시 얘기를 숨긴다면. 나오키는 아사미에게도 숨겨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사미에게만 사실대로 이야기하고, 부모님에게는 비밀로 해달라고 할 수는 없었다. 아사미를 공범으로 만들고 싶지 않았다. 아니, 그 이전에 아사미는 그런 짓에 동의하지도 않을 것이다. 풍족하게 살아온 삶을 잃는다는 게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 아사미는 모른다. 형 이야기를 할 수는 없다. 평생 숨겨야 한다. 마음속에서 그런 생각이 서서히 굳어지고 있었다. (p.233)

 

 

츠요시에게 필요한 것은 오직 동생 나오키가 걱정 없이 대학에 진학할 마음을 먹게 할 수 있는 돈이었다. 츠요시는 나오키가 대학 진학을 거의 포기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다. 몰래 아르바이트를 한다는 것도 알고 있다. 직장을 구하러 돌아다니면 형이 화를 낼 테니 눈치채지 못하게 조심하면서 몰래 직원 모집 공고를 모으고 있다. 서둘러야 한다. 마음이 다급해졌다. 하지만 정기예금을 넣을 돈이 없다. 돈을 벌 일자리도 잃고 말았다. 이삿짐센터는 두 달 전에 그만두었다. 직접적인 원인은 허리와 무릎이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손재주도 없고, 기억력도 좋지 않았다. 자신 있는 거라곤 체력뿐이다. 그래서 그걸 살릴 수 있는 직장을 골랐는데 그게 오히려 화근이 되었다. 몸이 망가지자 어디서도 받아주지 않았다. 가난하다고 해서 남의 것을 훔쳐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다. 아무리 탄식하고 기도를 해봐야 돈이 솟아 나올 리 없다. 그렇다면 내 손으로 뭔가 할 수밖에 없다.

 

형이 사람을 죽이다니,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그런 혐의를 받고 있을 뿐이지, 뭔가 오해가 생긴 거라고 생각하고 싶었다. 실제로 전화를 건 사람에게도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상대방은 형이 모든 걸 자백했다고 천천히 말했다. 그 목소리가 나오키에게는 침착하다기보다 냉혹하게 들렸다. 뭐가 뭔지 알 수가 없었다. 나오키는 전화를 건 사람에게 물었다. 형이 왜 그런 짓을 했는지, 언제 어디서 누구를 죽였는지. 하지만 상대방은 무엇 하나 제대로 대답해주지 않았다. 상대방이 하고 싶은 말은 다케시마 츠요시가 살인강도 용의자로 체포되었다는 사실과 그 동생에게도 묻고 싶은 게 있으니 경찰서까지 와달라는 이야기뿐 이었다. 믿을 수가 없었다. 몇 번째인가 경찰서에 나가 조사를 받을 때 수사관에게서 들은 ‘진짜 동기’ 날카로운 창이 되어 나오키의 심장을 꿰뚫었다. 동생의 대학 진학 비용이 필요했기 때문에 범행을 저질렀다는 이야기였다. 왜 그런 바보 같은 짓을,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동시에 이해가 될 것 같기도 했다. 형이 아주 잠깐 동안이라도 정신이 나갔다면 그 원인은 하나뿐일 것이다. 동생을 위해서.

 

국내에서 출간된 지 약 10년 만에 리커버 에디션으로 우리들을 다시 찾아온 <편지>. 도대체 그의 능력은 어디까지 일까? 책은 그 흔한 반전이나 트릭 장치 하나 없이 그저 잔잔히 이어지는 이야기 하나만으로 대책없이 사람들을 책속으로 끌어당긴다.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던 살인 그 이후의 이야기. 죄를 지어 끊임없이 편지로 속죄하는 살인자, 죄는 없지만 끊임없는 차별을 받으며 살아가는 살인자의 동생과 그런 동생을 불편해하는 사람들. 책은 한마디로 차별과 속죄에 대한 이야기다. 저자는 살인자를 가족으로 두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이 사회에서 가해자의 가족이 겪는 유무형의 차별과 편견의 이야기를 담담하게 풀어놓으며 속죄의 범위에 대해 독자들에게 넌지시 물어온다. 살인자인 가족을 미워해도 될까. 차별이란 정말 나쁜 것일까. 속죄는 언제까지, 어디까지 계속되어야 하는 것일까. 결코 어느 것 하나 쉽게 답할 수 없다. 죗값을 치르렀다고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죄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니까. 아마 이 문제는 영원히 풀기 어려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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