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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 가도 좋을 여행, 유럽 - 런던 암스테르담 그리고 델프트
다은 지음 / 피톤치드 / 2019년 2월
평점 :




수많은 여행자는 말한다. ‘여행은 첫 시작이 어려울 뿐, 한 번 다녀오고 나면 그 다음부터는 훨씬 쉽게 다가온다’라고. 그들이 이야기하는 ‘쉽다’는 말은 아마도 ‘여행을 대하는 마음가짐’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큰마음 먹고 다녀온 여행을 통해 내가 얻은 건 그럼에도 불구하고 떠날 수 있는 ‘용기’였다. (p.21)
기회가 쉽게 찾아오지 않을수록 그 간절함으로 얻어낸 기회에 따른 부지런함은 평소보다 배가 되기도 한다. 특히나 여행에서는 더욱 그렇다. 이번 여행에서 나는 간절함의 크기만큼 지나치게 부지런을 떨었다. 하지만 부지런히 움직여 아무리 열심히 계획을 세운다 한들, 그 계획이 반드시 그대로 실현된다는 보장은 없는 법. 때로는 부지런함이 통하지 않을 때가 있다. 그럴 때마다 필요한 건, ‘아쉬워도 어쩔 수 없지 뭐’ 하는 심정으로 쿨하게 넘길 줄 아는 여유로운 마음. (p.53)
정류장을 찾아가느라 버스를 기다리느라 그리고 버스를 타고 이동하느라 걸린 시간만 해도 이미 한 시간을 훌쩍 넘겼다. 그러나 마음을 비우고 아니 대신 그 자리에 여유가 찾아 들어왔다. 계획에 없던 길을 걸으니 오히려 새로웠다. 덕분에 우리는 런던 시내의 풍경을 하나하나 눈에 담을 수 있었다. 어쩌면 살면서 수없이 생기는 변수 앞에 이런 마음가짐을 갖는다면, 어떤 상황이 오더라도 얼마든지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지 않을까? 신이 아닌 이상 그 변수를 막을 방법이 없다면 때로는 그 변수 앞에 마음을 비워보기도 하는 것. 그러고 나면 그 자리에 다른 것이 채워질 거라는 믿음을 가져보는 것. 여행하며 변수에 대처하는 자세를 다시 한번 마음에 새겼다. (p.103)
여행 중 만난 자전거들은 대부분 매일 타고 다닌 흔적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낡은 모습이었다. 군데군데 녹이 슬어 있는 것은 물론이고, 길가에 아무렇게나 세워져 있는 모습은 꼭 자전거를 버린 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보기만 해도 생활감이 가득한 그 자전거들엔 알록달록한 구슬이 바퀴에 꿰어져 있는가 하면, 예쁜 조화로 손잡이를 장식해 놓는 등 자전거 주인의 개성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저마다의 방식으로 꾸며져 있는 자전거의 모습이 마치 사소한 것에서부터 오는 소소한 행복이 무엇인지 내게 보여주고 있는 것 같았다. 누군가에게 잘 보이기 위해 혹은 삶을 일부러 드러내기 위해서가 아닌, 삶의 작은 행복을 각자의 방법으로 표현하는 그들에게서 진정한 삶의 여유로움을 느꼈다. 자유로운 삶이라는 게 어쩌면 이런 게 아닐까? (p.215)
이 책은 프리랜서 디자이너의 여행 에세이다. 보통 여행서는 여행 전문가들이 쓰지만 이 책의 저자는 여행 초보자. 망설이고 낯가리고 목소리마저 낮고 작은 수줍음 많은 여자에게 여행은 쉽지 않은 일. 거기다 해외라니. 다행스럽게도 그녀의 곁에는 남편이 있었고 그 덕분에 용기를 낼 수 있었다. 대학 입학과 동시에 시작된 4천만 원이 넘는 학자금 대출, 짊어져야 했던 집안의 빚, 결혼 후엔 집 대출까지. 늘 허덕이는 일상의 연속이었다. 그것과는 별개로 대학 동기들이 유럽으로 배냥여행을 떠나는 것을 볼 때마다, 혹은 누군가가 유럽여행에서 담아온 사진을 볼 때마다, ‘나도 언젠가 유럽여행을 떠날 수 있는 날이 오겠지?’라는 생각을 마음속에 늘 품고 있었다. 그녀에게 있어 ‘여행’은 그저 ‘언젠가 해보고 싶은 꿈’이었다. 그러다 그녀의 마음에 불을 제대로 지핀 방송이 있었다. 바로 ‘꽃보다 할배’. 어김없이 본방사수를 하던 어느 날, TV 속 신구 배우님의 말 한마디가 그녀를 움직이게 만들었다. “제일 부러운 건 청춘이야. 젊을 때 한껏 하고 싶은 일을 해야 할 것 같아.” 돈으로도 살 수 없는 것이 바로 청춘! 그래서 그녀는 지금 당장 떠나기로 마음먹었다. 빚을 조금 더 천천히 갚더라도, 지금이 아니면 안 될 순간들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대부분의 여행자들이 그러하듯 저자 또한 무수히 많은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누구나 공감하듯 아무리 계획을 잘 세워도 계획대로 되지 않는 것이 우리네 인생. 계획은 바뀌기 위해 있었고, 여행을 여행답게 하는 법을 알고 있었던 그녀는 그 변화를 기꺼이 수용하며 즐겼다. 쫄보 여행자가 현지에서 체험하며 느끼는 모든 것, 영어 때문에 겪은 일, 부끄러워 몸 둘 바를 모르는 이들의 셀프 촬영 도전, 계획이 바뀌면 바뀌는 대로 아쉬워하지 않기 등등. 이런 저자의 태도 덕분에 모든 여행지의 작고 사소한 소재들도, 함께 나누고 누릴 만한 의미 있는 주제들로 바뀌었다. 런던과 암스테르담, 그리고 잘 알려지지 않은 도시 델프트를 중심으로 현지의 일상에 자연스레 녹아들자 평범하던 순간들이 반짝반짝 빛을 내며 특별하게 변해간다. 이 책을 처음 봤을 때 든 생각은 “아, 나도 여행 가고 싶다.” 하지만 책을 다 읽고났을 땐 “그럼에도 불구하고 꼭 가야겠다.”로 생각이 바뀌었다. 나에게 잠깐이라도 여유를 선물해 줄 수 있는 그런 여행이 하고 싶어졌다. 내 생에 그곳까지는 도저히 갈 수 없을 것 같아 책으로 그 마음을 달래보려 했건만 되려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여행에 대한 갈증이 점점 더 심해졌다. 기대감과 아쉬움이 번갈아가며 마음을 번잡스럽게 만들었다. 지금 당장은 무리고, 언젠가는 나도 꼭 떠나고 말테다. 유럽아, 기다려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