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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자살되세요, 해피 뉴 이어
소피 드 빌누아지 지음, 이원희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18년 12월
평점 :





아빠가 새벽에 세상을 떠났다. 전화벨이 울렸을 때, 대번에 병원이라는 걸 알았지만 받을 용기가 없었다. 뭐하러? 무슨 말을 들을지 아는데. ‘아버님께서 오늘 아침 숨을 거두셨습니다. 아버님은 떠나셨어요. 고통은 없었습니다.’ 나는 이제 고아다. 마흔다섯 살짜리 고아는 정말이지 불쌍하단 생각이 들지 않는다. 세상에 피붙이가 아무도 없으니 고아나 다름없지만 그래도 마흔다섯 살이나 먹은 나를 입양하려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거다. 나는 유통기한이 지났다. 이를테면 자식을 갖기에도, 한 남자를 갖기에도 기한이 지났으니까. (p.7)
방금 일어난 일로 완전히 굳어버린 나는 내가 물에 빠진 이에게 박수를 보내고 싶은 유일한 사람이라는 걸 깨닫는다. 나는 물에 뛰어들 용기를 낸 이 남자가 부럽다. 이 남자처럼 나도 죽고 싶다. 일종의 계시처럼 위안이 되고 자명한 이치로 느껴진다. 나는 죽고 싶다. 정말로. 5년 후나 10년 후가 아니라 지금 당장 죽고 싶다. 충격 받은 나는 비틀거리며 집으로 향한다. 뇌가 끓는 것처럼 뜨겁다. 그래, 나는 죽고 싶다. 그래, 죽을거다. 하지마 누군가에게는 말할 필요가 있다. 베로니크는 아니다. 자살 욕구가 살해 욕구로 바뀔 위험이 있다. 하지만 베로니크는 내 가장 친한 친구다. 털어놓을 만한 다른 사람은 떠오르지 않는다. 나는 죽고 싶다. 하지만 누군가에게는 죽고 싶다는 말을 할 필요가 있다. 그래야 위안이 되니까. 내 말을 이해해줄 수 있는 귀를 찾아야 한다. 나라는 존재가 죽음은 아주 좋은 결정이라고 외치고 있으니까. (p.17)
무관심의 중심에 서 있는 나. 나처럼 평범하고 솔직한 사람은 나의 눈에 잘 띄지 않는다. 여성인권단체 페멘의 일원으로 모노프리에 가는 거라면 몰라도, 내게 포위망을 뚫고 나갈 기회는 얼마든지 있을 거다. 나에게 부족한 것을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싶다. 링에 올라갈 준비가 된 복서처럼 나는 심호흡을 한다. 나는 이 내면의 싸움을 위한 정신적인 준비를 해야 한다. 나는 도둑이 아니라 그저 스스로의 한계를 알고 싶은 자살하려는 여자다. 이건 연습니고, 인지행동요법의 일환으로 하는 삶의 체험이다. 나는, 사디스트지만 지독하게 섹시한 치료사의 손에 걸려든 모르모트이자 인간 심리학 월권행위의 희생자다. 그러니 최저 임금을 받고 일하는 보안직원은 내가 자아를 찾지 못하도록 막을 수 없는 거다! (P.41)
엄마는 나의 전부였는데 예고도 없이 떠났다. 한 마디 말도 없이, 현모양처답게 장을 보고 돌아오는 길에. 엄마는 점심 식사 메뉴를 생각하다 돌연 사망한 게 틀림없다. 전등을 끄는 것처럼 간단하게. 아빠의 죽음은 길고, 힘겹고, 고통스러웠다. 몇 주일 동안의 화학요법이 아무 소용없자 치료를 중단했다. 그리고 기나긴 빈사지경. 나는 병원 침대에 누워 꼼짝 못 하던 아빠를 떠올린다. 비쩍 마르고 창백한 얼굴, 차례로 아빠를 놓아버리는 세포들. 아빠의 몸이 무너져갔다. 파란 눈빛마저 사라져갔다. 이미 유령 같았던 아빠는 겁에 질려 두려움에 떨었다. 겁먹은 소년 같았다. 마침내 아빠는 나에게 물었다. 당신이 죽느냐고. 나는 대답할 수 없었다. 아빠는 다시 물렀고, 나는 고갯짓으로 아니라고 했다. 하지만 내 눈에 차올랐던 눈물이 아빠에게 그렇다고 말했을 거다. 아빠를 안심시켜주지 못한 내가 아직도 원망스럽다. 나는 그럴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혼자서는 아빠를 안아서 일으키는 것이 너무 버거웠다. 하지만 이제 나는 두렵지 않다. 이제 나는 통제할 수 있다. 내가 원하는 곳에서, 내가 원하는 때에, 내가 원하는 대로. (P.101)
이 책의 주인공 실비 샤베르. 그녀는 개도 고양이도 없고, 자신을 위해 울어줄 앵무새도 없다. 누군가의 아내도, 어머니도 아닌 여자. 병든 아버지를 헌신적으로 수발하며 그것에 인생의 의미를 부여하고 살았것만 이제 아버지는 이 세상에 없다. 그녀는 이제 진짜 혼자가 되었다. 그 후 그녀를 찾아오는 외로움과 쓸쓸함. 공허하다. 육신은 있고 심장은 뛰고 있으나 영혼이 떠나버렸다. 이미 죽은 느낌이다. 그녀에게 남겨진 건 아버지가 돌 더미를 쌓는 죄수처럼, 자린고비처럼, 한평생 절약하며 모은 돈 50만 유로. 이 돈이면 여행을 하면서 행복한 순간들을 누릴 수 있었을 텐데 인생이 참 덧없다. 어느 날, 그녀는 센 강변을 산책하다 물에 뛰어든 한 남자를 발견한다. 의식을 잃은 남자는 센 강 중앙에 몸이 뒤집힌 채 둥둥 떠 있었는데 실비에게는 그 모습이 아주 편안하고 평온해 보인다. 그때 갑자기 예고도 없이 한 여자가 물속으로 뛰어들어 남자를 구해내고 사람들은 모두 기뻐하며 생명을 구한 젊은 여자에게 박수를 친다. 하지만 실비는 이와 반대로 물에 뛰어들 용기를 낸 이 남자에게 박수를 보내고 싶다. 그녀는 이 남자가 부럽다. 이 남자처럼 죽고 싶다. 이 일이 일종의 계시처럼 위안이 되고 자명한 이치로 느껴진다. 그래서 그녀는 크리스마스에 자살하기로 결심하고 누군가 자신의 자살을 이해해주길 바라는 마음에 심리치료사를 찾아간다. 그리고 뜻하지 않은 심리치료사의 활약으로 실비는 그동안 느끼지 못했던 삶의 재미를 알아가지만 역설적으로 ‘살 만큼 살았다’는 묘한 만족감을 얻으며 자살에 대한 의지가 더욱 확고해진다. 결국 자살 예정일을 앞당기겠다고 심리치료사에게 선언하고 집으로 돌아가던 중, 실비는 지하철역 플랫폼 바닥에 누워 신음하는 노숙자를 지나치지 못하고 다가가 손을 잡아준다. 그리고 그 순간 숨을 거둔 노숙자에게서 자신의 죽음을 엿본 실비는 크나큰 충격을 받게 된다.
책은 자살을 생각할 정도로 심신이 지쳐버린 주인공의 내면을 세밀하게 관찰하며 따뜻한 위로와 격려를 이끌어낸다. 블랙유머와 풍자가 주는 웃음과 삶에 대한 따스한 애정을 모두 느낄 수 있는 소설. 이번 크리스마스까지만 살기로 하고 진짜 자신을 알기 위해 두 달이란 시간을 자기에게 준 실비 샤베르. 조금씩 삶에 색채가 더해지지만 죽겠다는 결심엔 변함이 없는데, 어느 날 지하철에서 죽어가는 노숙자를 발견하고 자신도 모르게 곁에 앉아서 손을 잡아주고 얻은 깨달음으로 그녀는 자신의 삶을 다시 바라볼 기회를 얻는다. 남들에게는 있지만 자신에겐 절대 없다고 여겨졌던 즐거움과 행복이 실비에게도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그 덕분에 자신의 존재 가치를 부정하던 그녀는 나라는 존재의 사랑스러움을 알게되고 자신과 마주했을 때 생긴 놀라운 변화로 인해 크리스마스는 그녀에게 죽음이 아닌 선물이 되어 다가온다. 이제 자신의 곁에 아무도 없다는 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스스로가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인생이 달라지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