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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살인자에게
아스트리드 홀레이더르 지음, 김지원 옮김 / 다산책방 / 2019년 2월
평점 :





엄마는 남편에게서 아들로 대물림된 공포에 완전히 지쳤다. 빔은 어린 소년일 때부터 엄마에게 폭군처럼 굴었고 엄마는 늘 그걸 형편 없는 아빠 탓으로 돌리곤 했다. 그래서 이렇게 나이가 들어서도 오빠가 엄마를 쓰레기 취급하는 걸 그냥 두었다. 그래서 중범죄를 저질렀는데도 아들을 절대로 버리지 못했다. 그래서 첫 번째 유죄 판결을 받은 뒤에도 아들이 바뀌기를 바라면서 교도소에 계속 면회를 갔다. 심지어는 부동산 거물들에게 돈을 갈취한 죄로 두 번째 유죄 판결을 받은 뒤에도 마찬가지였다. 어쨌든 빔은 여전히 엄마의 어린 자식이니까. (p.30)
아빠의 폭력은 우리 가족의 구석구석까지 스며들어 우리를 완전히 적셨다. 아빠에게 화를 낸다는 건 선택지에 없었기 때문에 절망적인 상황을 서로의 탓으로 돌리고 서로 싸워댔다. 우리는 신경이 날카로운 아이들이었고, 집에서 겪는 계속된 위협 탓에 관용이나 상호 이해 같은 걸 베풀 여지가 남아 있지 않았다. 공격성과 폭력성이 의사소통 전략이 되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다른 방법을 몰랐다. 그래서 폭력은 세대에서 세대로 이어졌다. (p.42)
“내가 어떻게 할지 너희도 알지, 응?”
오빠는 우리가 우리 인생의 방향을 결정하려고 할 때마다 그렇게 협박했다. 그래, 우리가 오빠 말을 무조건 따르지 않으면 오빠가 어떻게 할지 잘 알았다. 빔과 우리 관계의 모든 것은 폭력에 대한 두려움에 의해 통제되었고, 그래서 우리는 오빠의 지배하에 살았다. 우리는 늘 살얼음 판 위에 있었고, 오빠의 다음 희생양이 되지 않기 위해서 모든 걸 했고, 오빠와의 삶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그리고 무엇보다도 입을 다물기 위해서 애를 썼다. 하지만 우리는 매일같이 코르를 배신하는 기분을 느꼈다. 그의 살인범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게 더러운 짓처럼 느껴졌다. 우리는 빔이 코르와 우리에게 한 일에 대한 대가를 치르기를 절실하게 바랐으나 그에게 맞서서 행동을 취할 용기는 없었다. 계속되는 살인에 우리는 점점 더 겁을 먹었다. 코르처럼 자신들이 오빠와 친구라고 생각했던 많은 사람들이 살해되었다. (p.180)
“난 엄청난 위험을 감수하고 당신들과 이야기를 하러 온 거예요. 오빠가 알게 된다면 그건 오로지 당신들에게서 이야기가 샜기 때문이라는 거 알아둬요. 이 대화가 어떤 식으로든 새어 나간다면 난 살아남지 못할 거예요. 오빠는 내가 오빠에 대해서, 오빠 일에 대해서 뭘 아는지 잘 알고, 날 죽이는 걸 서슴지 않을 거예요.”
그들이 내 말을 별로 진지하게 여기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나는 그의 여동생이었다, 안 그런가? 그들이 지하세계의 삶에 대해 갖고 있는 유일한 이미지는 <대부> 같은 조직폭력배 영화에서 본 것을 바탕으로 하고 있었다. 가장이 오로지 자신의 가족에게만 사랑이나 연민을 드러내는 그런 영화들. 하지만 우리 삶은 대부 영화가 아니고, 낭만적인 범죄자 가족의 초상도 아니었다. 이것은 한 명이 나머지 모두의 삶을 비참하게 만드는 냉혹한 현실이었다. (p.215)
2016년 11월, 한 심야 TV 쇼에 등장한 책 한 권이 네덜란드 전역을 발칵 뒤집어놓으며 발매 첫날 초판 8만 부가 매진되고 베스트셀러 Top10에 연속 70주간 머물렀다. 네덜란드에서 가장 유명한 범죄자이자 하이네켄 납치사건의 주범인 빌럼 홀레이더르의 여동생 아스트리드 홀레이더르가 쓴 회고록 『나의 살인자에게』가 세운 기록이다. 가장 가깝고, 결코 끊어낼 수 없는 존재이기에 더 끔찍할 수밖에 없었던 가족이라는 괴물. 아스트리드는 한때 아버지의 자리를 대신해주었던 다정한 오빠가 살해 위협을 일삼는 괴물이 되기까지의 과정과, 그런 오빠를 배신하고 법정에 세운 고통스러운 심경을 생생하게 기록했다. “오빠를 위해 목숨을 던질 수 있던 시절도 있었다”고 아스트리드는 말한다. 그러나 오빠는 수많은 사람을 죽인 악마다. 어머니를 위해, 딸을 위해, 자신의 가족에게 희생당한 모두를 위해, 그녀는 자신의 친오빠를 단죄하기로 했다.
“오빠, 내가 왜 오빠에게 이런 일을 했는지 궁금하다면, 이게 내 답이야. 코르 형부를 위해서. 소냐 언니를 위해서. 사랑하는 조카 리히와 프란시스를 위해서. 오빠 때문에 아빠를 잃은 모든 아이를 위해서. 그리고 그 고통에서 구해주고 싶은 모든 아이를 위해서. 이제 살인을 멈출 때야.”
“내 오빠는 연쇄살인범입니다!” 목숨만큼 사랑했던 친오빠를 법정에 세운 여동생의 슬프고도 용기 있는 고백. 이 책은 가정폭력 피해자인 저자의 자서전적 기록이다. 이들 남매의 아버지는 알코올중독자에 가정폭력을 일삼는 가부장적인 남자였다. 부인을 가족과 친구들로부터 완전히 고립시키고 지배·통제한 후 자신을 보스라 부르게 하며 아직 어린 남매들에게도 똑같은 방식으로 폭력을 가했다. 그런 상황에서 오빠인 빌럼(=빔)은 폭력적인 아버지를 대신해 여동생을 챙기고 빈자리를 채워준 든든한 오빠였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빌럼은 아버지를 닮아가며 전형적인 사이코패스적 면모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돈을 위해서라면 동료들을 협박하고 ‘제거’하는 일을 서슴지 않았다. 가족도 예외는 아니었다. 어머니에게 폭언을 일삼고, 절친한 친구이자 동생 소냐의 남편이었던 코르 역시 살해했다. 그러고도 뻔뻔스럽게 코르의 장례식에 나타나 슬픈 척 연기했다. 잘생긴 외모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말솜씨 탓에 잔인하고 폭력적인 면모를 아는 사람은 오직 가족뿐이었다. 급기야 빌럼은, 자신의 조카, 즉 여동생의 어린 자식의 머리에까지 총구를 겨눈다. 그리고 이 일은 아스트리드가 빌럼을 ‘배신’하기로 마음먹은 결정적 이유가 되었다.
내가 사랑하는 가족이 살인자?! 이 잔혹한 이야기가 실화라는 게, 지금도 저자는 친오빠에게 살해의 위협을 받으며 살고 있다는 게 정말 충격적으로 다가온다. 남도 아닌 친혈육인 오빠가 동생에게 그런 일을 저지르다니 너무 끔찍하지 않은가. 자신의 가족인 오빠를 법정에 세우기까지, 그녀가 겪은 고통은 상상을 초월한다. 가정폭력, 여성차별, 각종 범죄 등 하지만 그녀는 참고 이겨낸다. 소중한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서. 그녀는 말한다. “나는 거의 모든 것을 잃었다. 내 일, 내 집, 전부 다 잃었다. 그래도 아직은 살아 있다.”고 그래, 그녀는 살아남았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 자신의 목숨을 걸어야하는 일임에도 그녀의 결단은 결코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