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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아침 지하철에서 모르는 여자가 말을 건다 ㅣ 앗코짱 시리즈 2
유즈키 아사코 지음, 권남희 옮김 / 이봄 / 2019년 2월
평점 :
절판




마지막 휴일이 언제였는지, 이제 생각도 나지 않는다. 동기들은 몸과 마음을 다치고 하나둘 그만두었다. 그 땜빵으로 여기저기 뛰어다니다 마침보니 어느새 입사 5년차가 되었다. 지하철의 축축한 공기가 커다란 덩어리가 되어 온몸에 불어 닥쳤다. 아케미는 기력을 총동원해서 애써 의식을 붙들어 맸다. 빠아아앙, 하고 명치를 울리는 지하철 주행음이 벽과 발밑을 흔들었다. 마침내 에스컬레이터는 아케미를 플랫폼으로 밀어넣었다. 아직 여름은 끝나지 않았는데 차가운 콘크리트가 스니커 바닥을 통해 열을 빼앗아가는 것 같았다. 주위에 사람들 모습은 드물었다. 며칠 전에 생긴 주스 판매대에 아케미 정도의 키 큰 여자가 무표정하게 정면을 보고 서 있었다. 여자 앞에는 믹서가 다섯 대. 빨강, 보라, 노랑, 오렌지, 초록. 각기 다른 색의 재료가 들어 있다. 색채가 빈곤한 플랫폼에서 몇 미터 떨어진 곳에서 보아도 그 색의 조합은 눈에 띄게 선명하고 산뜻하며 촉촉하게 빛났다. (p.8)
“어이, 거기 감색 셔츠 아가씨!”
의아한 생각으로 검지를 얼굴에 대고 돌아보았다. 그래, 너, 하는 식으로 주스판매대 안쪽에 선 체격이 큰 여성이 턱을 깊이 당겼다.
“이리로 와봐요.”
덩 빈 플랫폼에 낮은 목소리가 낭랑하게 울렸다. 이타와 그룹이었다면 당장 클레임일 이 거만한 태도. 애초에 서비스업에서 이런 말투는 용서되지 않는다. 점장 시절, 연신 고객의 안색을 살피며 오로지 저자세로 행동해온 만큼 어이없다고 생각하면서도 강한 마력에 이끌리듯이 한 걸음 한 걸음 주스 판매대에 다가갔다. 뭔가 나쁜 일이 일어난 게 틀림없다. 자신은 누군가의 호의를 받을 부류의 인간이 아니다. 그래도 그 여자 앞까지 가니 왠지 마음이 놓였다. 자신보다 몸이 큰, 조금도 귀엽지 않은 단발머리의 중년여성. 참으로 일본에서는 비주류일 것이다. 그런데 주눅 든 모습 하나 없이 왕처럼 당당했다. (p.16)
순조로울 거라는 보장은 없다. 지금까지 노동청에 고소하거나, 회사를 그만두려고 하다 실패하여 갖은 힘든 일을 강요받고 부당한 대우를 당하는 동료를 많이 보아왔다. 일단 앗코 씨에게 소개받은 변호사를 만나 이야기를 해보자. 괜찮을 것이다. 회사만 그만둘 수 있다면. 그리고 지금 있는 아파트 월세만 낼 수 있다면, 아버지에게 의지하지 않고도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다. 아케미는 자립하기 위해 일을 할 것이다. 일을 꼭 찾을 것이다. 정사원이 아니어도 좋고, 아르바이트를 두 탕 세 탕씩 뛰어도 좋다. 수면과 최소한의 생활, 삼시세끼를 확보할 수 있는 노동환경. 자는 것과 먹는 것과 말하는 것. 그것을 욕심내는 것은 어리광도, 제멋대로여서, 주제를 몰라서도 아니다. 진지하게 일하기 위해, 누군가의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기 위해 꼭 필요한 것이다. 그리고 앗코 씨가 해주었듯이 언젠가 자신이 먼저 누군가에게 마음의 자양이 되는 일을 해줄 수 있다면······. 어쩌면 앞으로 친구나 애인도 만들 수 있을지 모른다. 자신의 이 판단이 크게 잘못됐다 하더라도 아버지나 다카하시 팀장에게 욕을 먹더라도, 아케미는 지금 태어나서 처음으로 자신의 길을 선택하려 하고 있다. (p.62)
여자들의 우정에 천착해온 작가로, 여자들의 따뜻한 우정뿐만 아니라 서늘한 관계까지 그려내며 다양한 여성캐릭터를 창조해온 유즈키 아사코의 소설 『매일 아침 지하철에서 모르는 여자가 말을 건다』. 앗코라는 별칭을 가진 가수 와다 아키코를 닮아 앗코짱으로 불리는 구로카와 아쓰코. 소심한 파견직원 미치코의 성장을 일주일 동안 점심 바꿔먹기라는 자신만의 특별한 방법으로 도왔던 앗코짱이 이번에는 지하철 역 안에 스무디 가게를 차려 회사 바깥에 있는 사람들을 돕는다. 이 책에 등장하는 또 다른 미치코인 아케미에게 앗코짱은 고압적이고 불쾌한 사람이다. 다짜고짜 ‘이리로 와보라’는 앗코짱의 말에 강한 마력에 끌리듯 다가선 아케미는 앗코짱이 내미는 정체모를 음료를 거절 한 마디 못하고 받아들고 마시게 된다. 그 다음 날도, 또 다음 날도 이 강압적인 상황은 반복되지만 저항 한 번 못한다. 이는 아케미가 회사에서 보이는 태도와 동일하다. 상사의 폭압적인 태도에도 성희롱에도 저항 한 번하지 못하고, ‘내가 부족해서 혼나는 거야’, ‘이건 친근감의 표현일 뿐이야’라며 자신을 죽여 왔다. 하지만 앗코짱의 반복되는 간섭에 수요일에는 “제발 상관 말아달라”는 말을 겨우 내뱉는데, 이때 앗코짱은 의외의 반응을 보인다. “큰 소리를 낼 줄도 아네. 좋아요. 그런 습관을 길러요.” 회사에서라면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고, 들을 수 없는 말이다. 자기의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세상의 아케미들을 대신해 목소리를 내는 존재인 앗코짱은 매우 직접적인 방법으로 그들이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돕는다.
끊임없이 변화하고 성장하여 더욱 매력적인 선배로 돌아온 앗코짱! 이번에 그녀는 사회초년생은 물론이고 취업준비생의 상황과 마음을 무심한 듯 따뜻하게 어루만져주며 그들의 현재와 미래를 위해 작은 실마리를 풀어놓는다. 세상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은 27살 직장여성 아케미에게 어느 날부터 모르는 여자가 출근길에 스무디를 건넨다. 처음에는 고압적이고 불쾌한 사람으로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사람을 겪어보면 안다고 한 번 빠지기 시작하면 헤어나오기 힘들다. 거만한 말투로 스무디를 건네도, 상대방은 절대 거부할 수 없다. 그게 바로 앗코짱만이 가진 마력이다. 출근길에서 연거푸 한숨을 들이쉬며 힘들어하는 아케미의 모습에 절로 안타까운 마음이 앞선다. 어쩌면 우리가 매일 숱하게 마주하고 있는 현실이기도 한 이들의 이야기. 지하철 곳곳에는 아케미와 같은 사람들이 즐비하다. 그런 곳에 앗코짱과 같은 사람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럼 출퇴근 길이 그리 힘들지만은 않을텐데, 따뜻한 위로와 격려를 듬뿍 안겨다주는 앗코짱의 이야기에 오늘도 힘을 내어 본다. 앗코짱의 응원의 손길이 마음이 문득문득 그리워질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