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이 - 심윤경 장편소설
심윤경 지음 / 한겨레출판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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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마나 한 생각이었지만 나는 조금 더 옛 기억에 집착했다. 원장님이 아기의 울음소리를 듣고 음식물 쓰레기통 속에서 나를 꺼낸 그 일에는 사람들이 잘 알아차리지 못하는 중요한 지점이 있었다. 그때 내가 운 덕분에 반대로 세상은 부끄러움을 조금 덜었다는 점이다. 예쁜 옷을 입은 아기가 음식물 쓰레기통 속에서 얼어 죽은 채 발견되었다면 이 세상은 지금보다 좀 더 부끄러운 곳이 되었을 것이다. 나는 예쁘고 아무 생각 없는 별이 되는 대신 피곤하고 부끄러운 유기아동이 되어서 세상의 몫이 되어야 마땅할 창피함을 대신 짊어졌다. 과연 이 바보 같은 세상은 그런 생각을 해보기나 했을까? 자기들이 나에게 얼마나 큰 빚을 지고 있는지 알기나 하려는지. (p.26)

 

나는 선택의 여지 없이 부모의 부재 속에 살아야만 했고 그것은 언제나 순식간에 나를 집어 삼킬 듯한 검은 안개와 같은 느낌이었다. 그 안으로 달려들어 잃어버린 것을 찾아 헤매야 할지, 아니면 그것과 반대 방향으로 있는 힘을 다해 달아나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새들은 동서남북을 가늠하는 나침반을 머릿속에 달고 태어난다고 하던데, 나는 시초부터 그 나침반이 고장 난 셈이었다. (p.53)

 

어른들은 모두 거짓말쟁이였다. 나도 이미 굉장한 거짓말쟁이가 되겠지만, 내 안에 아직 조금의 정직함이 남아 있을 때 이 모든 문제를 얼른 해결하고 싶었다. 어른이 되면 착한 마음으로 거짓말을 하고, 사랑하기 때문에 거짓말을 하고, 그것이 이상하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을 것이다. 누구나 그렇게 사니까 나도 그렇게 능숙하게 거짓말을 하면서 살면 된다고, 어른이 되면 이 모든 일들을 다 잊거나 혹시 기억하더라도 당연한 일로 여기게 될 것이다. (p.221)

 

이모는 설날 새벽에 버려진 아기를 사랑했다. 그 아이가 바로 나였다. 그것이 기적 같은 일이었다는 걸 이제까지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다. 이모가 나를 사랑하는 건 너무 당연해서 감사하기는커녕 값없고 하찮게 느껴졌고, 다른 아이들이 가진 젊고 세련된 ‘진짜’ 부모들이 부러워 입술을 삐죽거렸다. 어버이날 감사 편지는 항상 원장님께 썼다. 이모의 몫이 아무것도 없는데도 이모는 아무 불만이 없었다. 복잡한 조건법 시제 따윈 없이 나는 그렇게 사랑받았다. 별다른 감사조차 없이 당연하게 받아먹었던 그 소박하고 따스한 사랑이 기적인 걸 이제 알았다. (p.271)

 

 

12년 전 눈발이 흩날리는 새해 첫날, 보육원 앞 음식물 쓰레기 통에서 발견된 아이 설이. 이는 TV를 통해 고스란히 전국에 방송되고 이후 설이는 보육원 원장의 소개로 좋은 조건의 가정에 입양된다. 하지만 2년 뒤 그 집의 사업이 흔들리면서 파양되고 그렇게 연이어 세 번의 입양과 파양을 겪으며 함묵증을 앓게 된다. 이제 다시 다니던 학교로 돌아가야하는 설이는 두고 풀잎보육원 원장은 설이가 놀림거리가 될 게 뻔하다며 새 학교로 전학 가서 새로 시작해야 한다며 위탁모 이모를 설득하고 이모는 원장의 뜻에 따라 설이를 우리나라 최고 부유층의 사립초등학교인 우상초등학교로 전학시킨다. 과연 이곳에서 설이가 6개월간 살아남아 졸업할 수 있을까?

 

소설판 SKY캐슬 <설이>. 책은 부모에게 버림받은 채 음식물 쓰레기 통에 내버려진 설이의 시선을 통해 “부모의 사랑이란 무엇인가? 아이가 잘 자라기 위해 필요한 좋은 환경이란 어떤 것인가?”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하며 이를 날카롭게 파고든다. 위탁모 이모의 노력으로 다니게 된 학교의 친구들은 그전 학교의 친구들과는 사뭇 달랐다. 자신이 가진 위치를 이용할 줄 알았고 학부모들은 그런 설이를 하찮게 보며 자기 자식을 위해서라면 어느 것 하나 포기할 줄 몰랐다. 그런데 설이가 교외대회에 참가해 상을 휩쓸고 여러 방면에서 두각을 내보이자 그들의 시선이 달라지기 시작한다. 하지만 같이 있어도 섞여지지 않는 기름과 물처럼 설이는 그들과 쉬이 하나가 되지 못하고 스스로 살아남기 위해 더 날을 세운다. 우여곡절 끝에 가게 된 시현이네 집에서의 생활은 설이가 그동안 꿈꿔왔던 것과 너무나 달랐다. 그녀가 생각하던 이상적인 가정은 어디에도 없었고 그 이면에는 어른들의 이중적인 모습과 이기심이 자리잡고 있었다. 부모된 입장에서 아무렴 남의 자식보다 내 자식이 좀 더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한 것이라 이해는 되지만 그래도 그렇게 하면 안된다는 것을 알기에 그 사이에서 이러지도 저러지고 못하고 마음이 혼잡스러워진다. 만약에 내가 그 상황을 접한다면 안 그런다고 장담할 수 있을까? 내 마음의 소리에 귀를 기울일 수 있을까? 그곳 생활에 익숙해지면 질수록 설이의 답답한 마음은 커져만간다. 편해지기는 커녕 오히려 스스로 목을 조이는 것만 같다. 곽은태 부부가 시현이를 사랑하는 방식은 모두 이해할 수 있는 범위 바깥에 있었다. 환상은 깨져가고 설이는 또다시 상처를 받지만, 겸손하고 한결같이 순수한 이모의 사랑을 깨닫으며 다시 용기를 내어 세상과 마주한다. 매일 부모의 원망 어린 말을 들으며 커가는 아이들, 그리고 그곳에서 스스로 떨어져 나온 설이. 그 아이들이 불행한 걸까. 설이가 불행한 걸까. 어른들의 욕심에 상처 입어 가는 아이들의 모습에 가슴이 아려온다. 사실 이 리뷰를 쓰는데 상당한 시간이 소요됐다. 글을 쓰며 문득 문득 떠오는 질문과 마주해야했고 그 질문들로 인해 마음에 돌덩이가 하나씩 쌓여갔다. 부모의 자격이란 뭘까. 나는 지금 내 아이에게 내 욕심을 강요하고 있지는 않은지, 내 이기심에 아이의 행복을 가둬두고 있진 않은지 걱정이 자꾸 눈덩이처럼 불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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