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텅 빈 마흔 고독한 아빠
이시다 이라 지음, 이은정 옮김 / 살림 / 2019년 1월
평점 :





고헤이는 스스로도 자신이 어떻게 계속 글을 쓸 수 있는지 이상하고 신기할 때가 있다. 비즈니스 관점에서는 도움이 되지 않는 작가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많은 편집자가 새로운 연재나 원고 의뢰를 해온다. 도시적이고 섬세한 문체, 부드러운 유머에 감칠맛을 더하기 위해 인생의 쓴맛과 슬픔을 한 방울 떨어뜨린 작품 성향. 고헤이는 10년 동안 ‘히트 예감’ 작가라는 말을 계속 들어왔다. 그리고 만년 베스트셀러 미만이라는 속 편한 자리에 익숙해져버렸다. 기복 따위 있을 리 없다. 출판계는 그런 그에게도 어떻게든 살 수 있게 안식처를 제공해준다. 양극화 사회라고 하지만 책의 세상은 결코 돈이 전부는 아니다. 그런 넓고도 좁은 출판계의 한 귀퉁이에서 자신이 좋아하는 소설만 쓰며 생활할 수 있다. 크게 성공할 일은 없겠지만 그런대로 행복한 인생이라고, 고헤이는 자신의 작가 생활을 그렇게 정의했다. (p.12)
고헤이는 아이 때부터 책을 좋아했다. 좋아하는 소설을 쓸 수 있다는 것은 더 바랄 수 없을 정도로 멋진 일이다. 이제 아주 조금이라도 좋으니까 책이 더 팔려서 생활에 여유가 생긴다면 이보다 더 좋을 순 없을텐데. 이 가구라자카의 아파트에는 앞으로 갚아야 할 주택대출이 20년이나 더 기다려야 한다. 마비라도 된 듯 얇은 TV 화면을 응시하고 있는 작가의 머릿속에는 수많은 숫자가 쓸쓸하게 미쳐 날뛰고 있다. (p.27)
글을 쓴다는 것은 끝이 보이지 않는 중노동이다. 고헤이는 멍하게 벽의 거울에 비치는 자신의 얼굴을 쳐다봤다. 어느새 나이를 먹어버렸다. 소설의 불가사의한 점은 아무리 책을 많이 써도 절대로 다음 책을 쓰는 게 편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작가는 새 작품을 쓸 때마다 전 작의 한계를 극복할 것이라고 기대한다. 작가의 일상은 일에 대한 불안과 긴장으로 점철되어 있다. 평범한 회사원이라면 마흔 살에 중간 관리직으로 승진한다. 현장에서 벗어나서 편해진들 전혀 이상하지 않을 나이다. 그렇지만 작가에게는 부하가 존재하지 않으며 언제나 혼자서 현장을 진두지휘한다. 그야말로 죽을 때까지 현역이다. (p.38)
고헤이는 글을 써야 한다. 글 쓰는 일을 평생의 직업으로 정하고 선택한 생활 아닌가. 이 아이를 위해서도 자신을 위해서도 가령 재능이 눈곱만큼도 없다고 하더라도 계속해나가야 한다. 자신에게서 소설을 빼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같은 업종의 누군가를 질투하거나 자신을 불쌍히 여길 시간이 있다면 한 줄이라도 앞으로 더 써야 한다. 그렇게 전진하면 되는 것이었다. 머리도 센스도 재능도 없는 인간이 알아서 멋대로 포기하면 어떻게 하나. 두 팔로 안은 가케루의 몸은 작지만 놀랄 정도로 뜨거웠다. (p.76)
고헤이는 서른아홉 살로
홀아비다. 3년 전에 의문의 교통사고로 아내 히사에를 떠나보내고 지금은 초등학교 4학년이 되는 가케루와 둘이서 살고 있다. 그의 직업은 소설가.
10년 전 <올 슈토>에서 신인상을 받으면서 작가로 데뷔하여 데뷔작을 연작으로 만든 <지정대는 데이즈>로 단숨에 단행본
데뷔를 일궈냈다. 하지만 그뿐, 데뷔작 이외의 작품은 모두 초판으로 끝났으며 3년 후에 문고판으로 재출간되었다. 그 후 10년 동안 ‘히트
예감’ 작가라는 말만 계속해서 듣고 있다. 낼모레면 마흔. 이젠 조금만 피곤해도 얼굴이 팍삭 늙어 보이는 건 어쩔 도리가 없다. 마흔 가까이
되니 밤샘 원고 작업도 힘들고 작품은 팔리지 않고 동료 작가의 신작을 읽고 난 이후에는 스스로 재능이 없는 것 같다며 점점 슬럼프에 빠져든다.
작가는 언제 일이 없어질지 모르는 비정규직, 자유의 정점을 찍는 직업이다. 보통 비정규직은 회사원보다 두 배에서 세 배 정도 더 많이 벌어야
겨우 회사원과 같은 생활을 할 수 있다고 한다. 그런 의미에서 고헤이는 분명 이 사회의 루저다. 이제 곧 마흔이니 작가 이외의 일을 찾기는
어려울 것이다. 다른 길로 바꿀 수도 없고 되돌아갈 수도 없는 상태. 진전이 없는 집필, 아내의 죽음 뒤에 남겨진 의문, 두 여성과의 연애.
그럼에도 소설가 아빠의 일상은 오늘도 그럭저럭 흘러간다. 그러던 어느 날, 고헤이가 문학상 후보에 올랐다는 소식이 전해져오고 이어서 피할 수
없는 과실인지 아니면 자살인지 수수께끼로 남아 있던 아내의 죽음을 풀 실마리가 발견되면서 잔잔하던 그의 일상이 시끌벅적해지기
시작한다.
<텅 빈 마흔 고독한 아빠>는 사랑하는 아내를 사고로 떠나보내고 초등학교 4학년 아들과 살면서 소설을 쓰는 아버지의 이야기로 작가는 이 소설을 통해 마흔을 눈앞에 둔 소설가이자 아버지가 성장해나가는 모습을 세밀하게 그려낸다. 갑작스런 아내의 사고. 가까운 사람의 죽음은 언제나 불합리하다. 주인공 고헤이는 그 충격을 견디고 담담하게 소설을 쓰고 아들 가케루와 둘만의 생활을 지켜왔다. 하지만 그 충격은 스스로도 상상 못 했을 정도로 마음속 깊은 곳에 균열을 만들었다. 그의 나이 이제 곧 마흔. 육아와 집필을 병행하면서 가끔은 술로 스트레스를 풀고 이리저리 헤매면서 일상을 그럭저럭 모면하며 살아오고 있지만 늘 아들 가케루가 눈에 밟힌다. 사회적 위치가 나름대로 괜찮은 작가라는 명함. 그러나 아버지로서의 업과 맞물리면 정답이 나오지 않는다. 아빠 노릇을 잘하고 있는 걸까. 남자 혼자서 아들을 키우며 행복한 가정을 잘 꾸려나갈 수 있을까. 아내의 부재로 아빠의 고민은 점점 더 깊어져간다. 이 묵직한 가장의 무게. 고헤이의 삶은 우리네 가장들의 모습과 겹쳐진다. 누구에게도 양보하지 않고 오직 홀로 견뎌내야 하기에 그 무게가 주는 중압감은 이루 말할 수 없이 혹독하다. 우리 모두가 알다시피 아버지의 역할은 어디에도 정답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우리 아버지들은 언제나 정답을 찾아 헤맨다. 불안하고 초조하지만 자식에게 내보이지 않으려는 가장의 모습에 가슴 한편이 찌르르 아파온다. 이래나 저래나 자식 걱정인 아버지. 쓸쓸하게 시작된 이야기는 소소한 일상이 모여 결국 행복으로 끝이 난다. 이 행복은 근원은 역시나 가족. 용기와 감동을 잔잔히 흘려보내는 이야기에 가슴에 따스함이 번져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