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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락 ㅣ 아르테 한국 소설선 작은책 시리즈
은모든 지음 / arte(아르테) / 2018년 12월
평점 :




할머니가 자신의 ‘수명 계획’을 밝힌 이후에, 엄마는 한숨을 쉬고 또 쉬었다. 한숨을 쉬는 것만으로 정말 땅이 꺼질 수 있다면 이십일 층에 위치한 우리 집이 꺼지고 꺼져, 지면 아래로 가라앉을 만큼의 깊은 한숨이었다. 나는 이따금 적당히 하라고 짜증을 내고, 대체로는 엄마를 달래면서 그 주를 보냈다. (p.25)
화면 속 아나운서는 십 년 전인 지난 2018년부터 시행되었던 일명 ‘웰다잉법’과 오늘 통과된 법안에 대한 차이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기존의 웰다잉법은 사망이 임박한 상태의 환자가 심폐소생술이나 인공 호흡기 착용 같은 인위적인 연명 치료를 거부할 수 있도록 한 점이 주요 골자였다고 했다. 이와 같은 형태는 임종을 목전에 둔 환자가 인간으로서의 존업을 지키며 죽음을 맞이할 수 있도록 하는 최소한의 법적 장치였다고 아나운서는 덧붙였다. 그렇게 임종 과정에 돌입한 환자만을 대상으로 했던 기존의 제한이 완화될 것이라는 의학 전문 기자의 설명이 이어졌다. (p.46)
눈물이 핑 돌았다. 나는 지금까지 한순간도 할머니의 선택을 지지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하지만 이후에 벌어질 일에 대해 온전히 다 알지 못한 채 말이 앞섰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그 순간 처음으로 했다. 할머니는 말수가 없어진 나를 물끄러미 들여다보았다. 나는 당장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다음 순간, 내 눈에 들어온 것은 할머니의 손이었다. 할머니는 무릎 위에 가만히 손을 올려놓았는데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내 시선을 의식했는지 할머니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지쳤다. 이제 정말 숟가락 들 힘도 안 남았어.” (p.75)
엄마는 할머니가 임종 일정을 잡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 뒤 더욱 감정 기복이 심해져서 매일의 기분을 종잡을 수가 없었다. 어느 날은 “부모고 자식이고 소용없고 어차피 인간은 다 혼자야.” 하면서 몇 시간이고 창밖만 바라보았다. 아빠가 애써 장난스럽게 “그래도 남편은 좀 다르지 여보. 부부는 촌수도 무촌이잖아.” 하고 말을 걸었지만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 또 어느 날은 청소를 한다고 욕실에 들어가서 나오지 않기에 가보았더니 타일 바닥에 주저 앉아 서럽게 울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자니 나도 덩달아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세제 거품이 묻은 엄마의 몸을 겨우 일으켜 세운 뒤에 나는 말했다. 이러는 동안에도 시간은 흐르고, 남은 시간은 많지 않으니 나와 할머니 집에 가자고 말이다. 그러나 엄마는 언짢은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어쩌면 저렇게 자기 감정만 우선일까, 나는 좀 신물이 났다. 그러면서도 마음 깊은 곳 한구석에는 자기 분이 풀릴 때까지 마음껏 울고 화풀이하며 감정을 표출할 수 있는 엄마를 내심 부러워하기도 했다. (p.93)
2018년 신춘문예로 등단한 신예 은모든 작가의 세 번째 작품 <안락>. 책은 벌써 구 년 가까이 요양원에서 생을 연명하고 있는 아흔일곱의 이모할머니와 자발적으로 수명 계획을 세우고 진행하려는 여든여덟의 할머니 그리고 그런 할머니의 결정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엄마와 이를 지켜보는 딸 지혜의 이야기로 죽음을 앞에 두고 떠나려는 사람과 이를 지켜보는 사람들의 다양한 감정선들을 여과 없이 생생하게 그려낸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 처음으로 외가의 삼대가 모두 모인 자리. 할머니의 충격적인 선언이 이어진다. 앞으로 오년 안에 나머지를 싹 정리하고 개운하게 갈 예정이니 모두 미리 마음의 준비를 해두라고 말이다. 이것은 할머니 본인이 오 년 안에 자의로 당신의 생을 마감하겠다고 선언한 것과 다름없는 말이었다. 시한부 선고를 받은 것도 아니고, 어디 죽을병에 걸린 것도 아니면서 본인의 의지로 생을 마감하겠다니 미리 언질을 받은 언니를 제외하고는 그 누구도 쉽게 이 선언을 받아들이지 못하는데 정작 할머니 본인은 이런 엄청난 말을 하고서도 너무나 태연하다. 이 와중에 국회에서는 안락사를 합법화하는 법안이 발의되고 할머니의 폭탄선언으로 집이 발칵 뒤집힌 지혜네 가족에게 이 일은 점점 심각하게 다가오기 시작한다. 그 사이 오랫동안 염원하던 법안이 국민 투표를 거쳐 제정되는 것으로 가닥이 잡히고 안락사 법안 통과를 위한 국민 투표의 진행 결과 할머니는 쾌재를 불렀다.
생명의 존엄성과 가치를 두고 어느 곳에 더 큰 비중을 두어야 할 것인가. 지금도 여전히 논란이 끊이지 않는 안락사 문제. 우리는 모두 죽음 앞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하지만 앞으로 다가올 미래에서는 분명 달라지겠지. 그럼 이제 죽음에서도 자유로울 수 있으려나? 당연히 죽음을 선택하느냐 하지 않느냐는 본인의 선택이겠지만 그 결정하는데 있어서 곁에 서 있는 가족들의 마음까지 헤아려 주었으면 하는 마음이 아직까지 더 크다. 솔직히 할머니의 입장도 이해가 되기는 한다. 어느 누가 자식들에게 고통스러운 모습을 보이고 싶을까. 본인도 조금이라도 덜 고통스럽게 평온한 모습으로 떠나고 싶은 마음이 클 것이다. 하지만 내 자신이 할머니 정도의 나이가 된다면 달라질지도 모르겠지만 어머니와 아버지가 건강하게 생존해있는 지금의 나에게는 상상만으로도 너무나 버거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책을 읽다 보면 개인적인 감정이 더해져 마음이 점점 더 격해진다. 내게 책에서 일어나는 일과 같은 일이 덮쳐온다면 혼자서 감당해낼 수 있을까. 내 곁에 가족들이 있긴 하지만 그것과는 또 다른 별개의 일로 치부될 것임을 알기에 자신이 없다. 그래서 책을 읽는 동안 당연히 너무나 슬펐고 괴로움에 몸부림을 쳤다. 이금래 할머니는 분명 행복하게 두 눈을 감으셨겠지. 마지막에 이르자 쉼 없이 눈물이 쏟아져 내린다. 작가님은 도대체 어떤 생각으로 이런 글을 쓰신 걸까. 죽음, 언제든지 일어날 수도 있는 일임에도 딱히 당장에 나에게 일어날 일이 아니라 여기며 소홀히 대했던 우리에게 경각심을 일깨워 주고 싶었던 것은 아닐지. 죽음이라고 해서 모두가 슬픈 것은 아니었다. 선택하기에 따라 가족들이 보는 앞에서 편안하게 죽음을 맞이할 수도 있으리라. 하지만 그 과정은 모두에게 정말이지 큰 고통이었다. 안락사가 과연 개인에게 안락한 일이 될 수 있을까. 지금도 여전히 나는 답을 내지 못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