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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내셔널의 밤 ㅣ 아르테 한국 소설선 작은책 시리즈
박솔뫼 지음 / arte(아르테) / 2018년 12월
평점 :




한솔은 이제 못 보게 된 아이들은 영영 못 보게 될 아이들처럼 여겨졌다. 아이는 사람의 인생에서 너무 짧은 시기여서 못 보게 된 아이들은 영영 만날 수 없을 가능성이 높았다. 우리는 어른이 되고 뭔가 빼먹은 얼굴이 돼서 만난다. 그건 못 보는 것과 같지 않을까. 그게 아니라면 전혀 새로운 사람과 만나는 것이 아닐까. 새로운 사람으로 다음 장면 같은 장소에서 만나는 것이겠지. (p.26)
이름을 감추고 여러 가지를 속여도 주민등록은 지나치게 촘촘했다. 모두 때가 되면 관공서로 가 지문을 등록하고 피할 수 없는 국민의 망 속으로 들어갑니다. 어떤 식으로 자신을 속일 수 있을까요? 누구는 사기를 치고 해외로 도피하고 여권을 위조하고 얼굴을 바꾸고 그렇게 살아가기도 한다고. 그렇지만 그렇다는 것은 밝혀져버렸다는 것이잖아요? 어떻게 주민등록에서 도망칠 수 있을까, 어떻게 모르는 사람으로 사라질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은 매일 밤 잠자리에서, 물론 매일 밤은 아니지만 자주 반복되는 생각이었다. 사라질 생각은 없지만, 큰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지만 어떻게 한국에서 사라질 수 있을까 어떻게 숨을 수 있을까 혹은 한국을 빠져나가 외국에서 다른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 (p.36)
사람들은 나를 해치지 않는다. 사람들은 나를 붙잡지 않는다. 나미는 그런 확신을 얻기 위해 어쩌면 열차 옆에 앉은 사람에게 말을 걸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보면 교단에 누가 끌고 간 것도 아니고 거기서 채찍질을 당하거나 감금을 당한 것도 아니다. 굶기지도 않았고 강압적으로 요구 받은 것도 없었다. 학교도 다녔고 외출도 했다. 다만 교묘하게 일상이 교단을 중심으로 짜이게 되었고 점점 공동생활 밖으로 나가지 않게 되었다. 사라진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문득 주변이 다르게 보였다. 나미는 어쨌거나 도망을 쳤다. 그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했다. (p.64)
나는 혼자 서 있는 사람이야.
→ 나는 혼자 서 있고 가끔 벼랑 끝에 서 있고 지금도 혼자 있다. 외롭거나 고독한 것, 처참하고 우울한 것과 무관하게 모든 개인처럼 혼자 서 있다. 혼자 서 있는 사람으로 서 있다. 나는 모든 혼자 서 있는 사람처럼 서 있나? 아니면 나는 다른 사람으로 모든 사람들과 다르게 혼자 서 있나? 아니 나는 혼자 서 있고 멀리 다른 혼자 서 있는 사람들이 있다. (p.91)
올해로 등단 10년을 맞은 박솔뫼 작가의 여덞 번째 작품 <인터내셔널의 밤>. 책은 서울에서 부산으로 향하는 기차 안에서 만난 한솔과 나미, 이 두 여행자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름 모르는 사람들이 왔다가 사라지는 곳 기차역. 기차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저마다 그곳에서 내리면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지만 한솔과 나미는 알 수 없는 끌림에 그곳에서의 만남을 인연으로 이어나가며 대화를 통해 세상으로 조금씩 나아가기 시작한다. 한 달 전 일본에서 살고 있는 친구로부터 청첩장을 받고 거절을 할 것인지 아니면 참석을 할 것인지를 두고 고민을 하다 조금씩 변해갈 자신의 모습을 친구에게 자주 보여주고 싶어 부산으로 향하는 기차에 몸을 실은 한솔과 사이비 교단에서 도망친 이후 도무지 도망갈 곳을 찾지 못하다 가까스로 이모를 떠올리고는 무작정 이모가 일하는 병원으로 찾아가 도움을 구하고 그날 이후 이모의 집에서 두문불출하며 숨어 살다가 이모의 소개로 부산에서 새롭게 출발하기 위해 부산행 기차를 탄 나미. 한솔은 수술로 인해 달라져 버린 사람들의 시선 속에서 숨으려고 하기보다는 눈에 띄고 싶어하고 누군가에게 기대고 싶은 마음을 인정하며 나름 보편시민이 되기 위해 노력하지만 나미는 그와 반대로 이제껏 자신을 보호해주던 곳에서 빠져나와 누군가 자신을 붙잡으러 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어떻게든 자신을 숨기려고 한다. 하지만 한솔을 만나며 점차 시간이 흐를수록 조금씩 여유가 생겨나고 그제서야 주변의 모습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수술과 호르몬 투여를 하면서 새로운 성을 부여받고 앞으로 자신이 살아가면서 부딪쳐야 하는 상황들에 혼란을 느끼지만 그럼에도 자신이 선택한 그 삶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한솔과 자신을 구속하던 곳에서 벗어나 이제 자신의 삶을 살아나가려는 나미의 삶은 다른 듯하지만 어딘가 모르게 닮아있다. 누군가에게 기대기보다는 스스로 삶을 개척해 앞으로 나아가려 하는 것이 말이다. 사실 이 두 사람의 이야기는 흔하디흔한 그런 이야기가 아니다. 도망치듯 떠나와 그동안 자신이 살아온 모습들을 떠올리는 두 사람의 삶은 오히려 평범하지 않기에 안타까움이 더해져 그들의 사연이 더 눈에 밟혀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