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당신의 일곱 개 가방
정미형 지음 / 알렙 / 2017년 12월
평점 :





마재순은 자신이 이렇게도 판단력이 생긴 것이 기뻤다. 내일은 먹지 않았던 그 아보카도를 잘라 먹어 보리라 생각했다. 새로운 것에 대해 용기를 가지는 것이야말로 모든 나쁜 것을 물리친다는 것을 떠올렸다. 그렇지 않은가? 그 모든 것이 다 밤에 읽는 이 책들 덕분이라는 것을 아침에 일어나면 관장에게 말하리라 마재순은 다짐했다. (p.43)
여기저기서 꺼내온 일곱 개의 가방은 조금씩 낡고 빛이 바래져 있었다. 그리고 모든 가방에는 시간을 되돌리는 열쇠가 있었다. 이 가방들이라면 기억을 잃어버린 어머니에게 기억을 일깨울 수 있지 않을까? 어머니의 악어가죽 가방은 약간은 붉고 엷은 커피 빛이 도는 태국산으로, 한가운데 악어의 등껍질 돌기가 그대로 남아 있다. 손질은 그런 대로 잘 되어 있었다. 나는 가방의 손잡이를 쥐고 거울 앞에 서 보았다. 이십 년 넘게 사용한 악어 가방은 어머니가 모임을 가고는 할 때 마지막에 레이스 장갑과 함께 선택하던 것이었다. 아버지의 선물 중에서 가장 마음에 들어 하던 것이었다. (p.92)
나는 네게서 들었던 파이프 이야기가 새삼 떠올랐다. 막혀진 벽 속에 숨어 있는 파이프. 그러고 보면 너는 좀 더 오래 살 수 있었을 것인데 어쩌면 사는 것에 지쳐 너를 스스로 돌보지 않은 것인지 모른다. 너의 몸 속의 파이프를 말이다. (p.113)
너는 어디에서 오고 어디로 가 있는가? 내가 너를 잠깐 만나고 너를 생각하고 일상의 시간 속에서 너와 얘기를 나누지만 이 모든 게 꿈 같다는 것을 안다. 너는 따스한 불빛이 그리워 이곳을 다시 찾아와 사는지 모른다. 그러고 보니 네게 너 말고도 이렇게 다시 살아가는 이들이 있는지 물어보지 않았다. 너는 이미 네가 한 번 죽었다는 것을 알고나 있을까? (p.124)
이제 늙은 아버지는 천천히 마늘을 까거나 라디오를 고치거나 벽의 못을 뽑으며 산다. 어두운 구름이 창가를 덮고 있는 집에서 엄마는 보랏빛 콩을 수도 없이 쏟아내 놓는다. 콩 한 알, 콩 두 알. 그러는 사이 아버지는 마늘 한 쪽 마늘 두 쪽을 가르며 까놓는다. 이래저래 엄마 말대로, 사는 것은 모두 샘샘이고, 부끄러운 것이 많이지는 것은 살아온 시간이 많아서다. 아버지는 알고 있었을까? 낮은 음성으로 느리게 부르던 그 자장가를 먼 훗날 내가 그리워하게 될 거라는 것을. 그러고 보면 아버지는 내게 자장가로 남는 단 한 사람이다. (p.178)
<당신의 일곱 개 가방>은 병환으로 쓰러진 어머니를 간호하며 어머니의 젊은 시절을 거슬러 올라가 그녀의 삶과 마주한다. 재봉질을 하는 어머니의 의자 옆에 기대서서 바지런히 심부름을 하며 어머니의 이야기를 들으며 자라온 그녀. 어린시절 그녀 귀에 익숙하게 들려왔던 재봉틀의 실이 끊임없이 돌아가고 젊은 어머니의 인생의 시간은 길고도 질겨서 이야기의 마지막은 이빨로 질끈 물어 뜯어서야 툭 끊어졌다. 마치 실을 끊어 내듯이 말이다. 그러던 어느 날 어머니가 목욕탕에서 쓰러지던 순간 그 실은 영영 끊어져 버렸다. 풍을 맞아 뻣뻣해진 어머니의 몸은 하루 삼십 분씩 경사침대에 묶여 있다. 그 모습은 마치 발사대에 서서 카운트다운을 기다리는 우주인처럼 보인다. 손가락 하나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고 세 번의 뇌수술로 찌그러진 머리통을 가지게 된 늙은 어머니. 어머니의 이야기들과 기억들과 시간들은 어머니가 평소 쓰시던 일곱 개의 가방 속에 차곡차곡 들어 있다. 악어 가죽 가방, 구슬 가방, 은색 가방 등 각각의 사연을 담은 이 가방들은 어머니의 삶 그 자체. “말이 그렇다는 거지. 내가 어디 멀리 가냐” 이 말 한마디에 눈물이 하염없이 쏟아진다.
<초록 아보카도가 있던 방>에서는 폭설로 인해 고립되어 버린 두 사람이 등장한다. 아버지가 세운 도서관을 물려받아 운영하던 도서관장인 나와 그곳에서 일하는 마재순. 나는 이곳에서 벗어나려 가방을 정리하고 또 정리하는데 반해 마재순은 한 번도 가방을 챙긴 적이 없다. 이 둘은 눈에 푹 싸인 도서관에서 구호물품에 의지하여 삶을 연명해나가지만 그마저도 여의치 않다. 나는 그속에서 어릴적 자신이 떠나온 옛집으로 가는 길을 떠올리려 그 기억이 떠오를 만한 책을 도서관에서 찾으려 하지만 결코 쉽지않다. 그리고 어떤 일이 있어도 이곳을 떠나지 않을거라는 마재순. 두 사람은 많은 이들이 떠나 버린 이곳에 쓸쓸히 남아 삶을 이어나간다. 눈이 이 도시를 재앙으로 빠트리고 얼려 버려 하루하루가 불안한 이 시점에 어울리지 않게 그들에게 구호물품으로 전달된 초록 아보카도.
저자는 이
상황들을 그저 담담히 써내려간다. 여덞 편의 이야기로 묶여진 책은 작가가 앞서 말했듯이 대부분이 떠나는 자들이거나 혹은 어딘가를 거쳐 온 이들의
이야기로 그녀의 소설 속 인물들은 모호한 공간 속에서 떠나와 어딘가 모를 곳으로 걸어 나가는 이들이 많다. 간추려서 말하자면 이곳을 떠나는
이들과 지나간 과거에서 돌아오는 이들이 모여 지금 이 소설 속의 공간과 시간을 만들어 나간다. 저자는 이 소설집을 두고 오직 그들이 왔다 간
것을 기록한 것일 뿐이라고 말한다. 각 이야기마다 등장인물들은 고단함과 두려움, 그리움, 나약함 등 저마다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벗어나고자
무던히도 애를 쓰지만 좀처럼 그곳에서 벗어나질 못한다. 이 이야기는 정말 읽으면서도 이게 꿈인지 현실인지 구분을 못할 정도로 내용이 상당히
몽환적이다. 사실 이 책에 나오는 책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삶은 하나같이 힘겹고 어렵다. 각자가 마주한 상황에서 겨우 숨통을 틔우고 간당간당 삶을
이어나간다. 그래서 책을 읽다보면 자연스레 숨이 턱턱 막혀온다. 나라면 이 상황에서 얼마나 견뎌낼 수 있을까. 내 몸이 거부반응을 일으켜 좀처럼
그들의 삶에 스며들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