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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지스탕스
이우 지음 / 몽상가들 / 2018년 7월
평점 :
품절

아버지, 아니 세상은 요구하고 있었다. 어서 철이 들기를. 하지만 내게 그 말은 철회하라는 요구처럼 들려왔다. 너의 모든 것을 부정하고 철회하라. 고갤 끄덕이면 이 세상에서 사라져버릴 것만 같았다. 문득 방 한구석 참담하게 쓰러져 있는 이젤이 떠올랐다. 아, 그것이 나의 자화상이 아니던가. 그들의 말이 맞는지도 몰랐다. 나는 아직 무엇 하나 이뤄낸 것이 없는 스물 아홉의 무명 화가, 아니 그저 화가 지망생에 지나지 않았다. (P.10)
조심스럽게 자신의 개인전을 만류하던 전공 교수의 말을 무시하고 어렵사리 연 전시회.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낸 그림들이었다. 이 정도면 관념과 느낌도 농익었고 표현과 기법도 세련된다고 자부했다. 그래서 이것들을 세상에 야심차게 보여주고 싶었다. 이 정도면 어느 경지에 이르렀다고, 나만의 세계를 구축했다고 말이다. 그렇게 그의 말이 틀렸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었다. 하지만 화가를 꿈꾸는 스물아홉 살의 기윤에게 세상은 가혹했다. 박수 갈채와 더불어 찬사를 받기는 커녕 평론가들의 적나라한 비평에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온 세상이 뒤흔들리고 무너져내렸다. 모든 것을 등한시하면서까지 그림 그리는 일에 열중해 작품을 세상에 내놓았지만 그에게 남겨진 건 메아리뿐이었다. 그런 그에게 아버지를 비롯한 주위 사람들은 평범하게 살기를 권유한다. 그제서야 기윤은 자신이 얼마나 비현실적으로 살고 있었는지 깨닫지만 이대로 꿈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그것이 자신이 가진 전부이기에.
그러던 중 오랜만에 참석하게 된 동창회에서 십년 만에 만난 친구들, 반가운 얼굴에 둘러싸이니 괜스레 기분이 좋아졌다. 따스하고 안락하기까지 했다. 술자리는 현재가 아닌 과거에 머물러 있었다. 추억을 곱씹으며 술잔을 주거니 받거니 웃음이 흘러넘쳤다. 그로 인해 조그맣게 세상을 향해 둘러친 그의 바리케이드가 잠시 허물어졌다. 하지만 과거로 향했던 시간은 다시 현재로 회귀했고 그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그의 직업을 비웃는 친구들의 험담에 쫒기듯 그 자리를 벗어났다. 더 이상 그곳에 있기가 싫었다. 그러던 중 기윤은 담배를 피우러 나온 친구 수형와 마주하고 그의 말 한마디에 그동안 까맣게 잊고 있었던 학창시절 단짝 친구 민재를 떠올린다.
“우리는 언제나 행복했던 시간 속에 영원히 머물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어. 그 순간들을 뒤로한 채 불확실한 미래로 나아가야만 하는 거지. 조류에 떠밀려가듯이 말이야. 그렇다면 사랑하는 사람이 우리의 곁을 떠나는 것도 하나의 순리라는 게 자명해지더라고. 나의 어머니가, 그녀가 내 곁을 떠난 것처럼···.”
그리고 잠시 뜸을 들이더니 말을 이었다.
“그렇지만, 사랑과 행복이 가득한 순간 속에 영원히 머물지 못한다 하더라도 내가 숨 쉬고 살아가야 할 이유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
나는 그것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아직은, 아니 앞으로도 그것이 무엇인지 규명할 수 없겠지만, 내 안에 점점 커져만 가는 순수하면서도 강인한 열망이 내가 살아갈 이유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어. 그건 말이지··· 사랑보다 지고한 그 무언가야. 나는 이제 그걸 위해 살아갈 거야···.”
(p.133)
물론 죽는다는 것은 슬프고 또 두렵기도 하지. 하지만 죽음이란 건 언제 찾아올지 아무도 모르는 일이야. 간밤에 이곳 강당에 불이 나서 우리가 내일 아침 눈을 뜨지 못할 수도 있고 말이야. 그저 극단적인 예를 든 것뿐이니, 인상 쓰지 말고 잘 들어봐. 그러니까, 내 말은 우리의 삶에 불현듯 죽음 찾아온단 사실은 곧 우리의 삶이 유한하단 증거라는거지. 이러한 삶을 자신의 내면의 소리를 따라서, 자신의 본성대로 멋지게 산다면, 그런 사람에겐 언제 죽는다는 건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해. 저 주인공처럼 말이야. 나는 그런 삶을 살거야. (p.149)
책은 스물 아홉살의 기윤 그리고 과거 그의 절친한 친구였던 열아홉 민재를 통해 치열하게 살아가는 젊은이들의 삶을 여과없이 그려낸다. 꿈을 향해 무던히도 노력했지만 인정받지 못해 결국 처참하게 무너져버린 기윤과 모두가 반대하지만 시인이 되기 위해 세상에 저항한 무척이나 모범적이었던 민재. 평범한 삶에서 몇 발자국 벗어난 그들의 삶은 처절했고 상처와 고뇌로 가득했지만 결코 포기란 없다. 꿈을 쫒아 지독하게 갈망한다. 세상의 요구에 순응하면서도 제 꿈을 손에서 놓지 않는다. 그래서 더 안타깝게 여겨진다. 다양함을 지양하지만 여전히 평범함을 강요하는 사회에서 남들과 똑같이 그저 평범하게 살아가면 편할텐데 스스로의 꿈을 끝내 포기하지 않는 그들의 모습에 한때 치열했던 나의 모습이, 또 앞으로 살아갈 내 아이의 모습이 오버랩되어 가슴 한 편이 먹먹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