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크맨
C. J. 튜더 지음, 이은선 옮김 / 다산책방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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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소녀의 머리가 황갈색 낙엽 더미 위에 놓여 있었다. 아몬드 모양의 눈은 차양처럼 우거진 단풍 나무와 너도밤나무와 떡갈나무를 올려다보고 있었지만 나뭇가지 사이를 머뭇머뭇 뚫고 숲속 땅바닥 위로 금가루를 뿌리는 햇살을 쳐다보는 건 아니었다. 검은색으로 반짝이는 딱정벌레들이 동공 위에서 종종걸음 쳐도 눈을 깜빡이지 않았다. 어둠 말고는 더 이상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P.9) 

 

 

그때 나는 처음으로 모든 게 한순간에 달라질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 같다. 우리가 당연하게 여겼던 모든 게 한순간에 날아 가버릴 수 있다는 걸 말이다. 어쩌면 그래서 나는 그걸 들고 왔는지 모른다. 뭐라도 붙잡고 싶어서. 그걸 안전하게 지키고 싶어서. 아무튼 속으로는 그렇게 중얼거렸다. 하지만 속으로 하는 중얼거림이 그렇듯 어쩌면 구리구리한 개똥구리에 불과했을지 모른다. (p.29)

 

 

오늘 아침에 받은 봉투를 열어서 그 안에 든 종이를 다시 한번 꺼낸다. 글씨는 없다. 하지만 메시지는 아주 분명하다. 막대행맨이 올가미를 두르고 있다. 크레용으로 그려졌다는 게 잘못된 부분이다. 그래서일까, 편지를 보낸 사람이 기억을 환기하려는 듯 추가로 뭘 하나 더 넣었다. 내가 봉투를 기울이자 그것이 조그만 먼지구름을 일으키며 책상 위로 떨어진다. 흰색 분필 조각이다. (p.69)

 

 

우리가 예단을 하는 이유는 그게 좀 더 쉽고 게으른 방법이기 때문이다. 떠올리면 마음이 불편해지는 일들에 대해 너무 열심히 생각할 필요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생각을 하지 않으면 오해가 생길 수 있고 어떤 경우에는 비극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
예단은 다른 방향의 실수를 유도하기도 한다. 그 때문에 상대방의 본모습을 보지 못하고 기존에 알고 지내던 사람들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할 수 있다. (P.375)

 

 

화창한 어느 토요일, 주인공 에디와 뚱뚱이 개브, 메탈 미키, 호포 그리고 니키는 다 같이 만나기로 되어 있었다. 거의 매주 토요일에 만나서 서로의 집에 번갈아 놀러가거나 놀이터에 가거나 가끔 숲에서 노는 그들이지만 그 주 토요일은 축제 때문에 다른 날과 달랐다. 그해 처음으로 어른 없이 아이들끼리 축제에 다녀와도 좋다는 허락이 내려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에디와 친구들은 포스터가 동네 여기저기 나붙기 시작한 몇 주 전부터 이날을 손꼽아 기다렸다. 축제 당일, 에디와 친구들은 범퍼카, 별똥별, 해적선, 회전바구니 등 놀이기구에 달려들어 흥분과 설렘으로 서로 깔깔대고 웃으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그러다보니 어느새 날이 제법 저물었다. 이제 남은 돈으로 놀이기구나 두세 번 더 타고 집으로 돌아가려 하는데 에디의 주머니 속에 들어있어야 할 지갑이 보이지 않았다. 즐거웠던 하루를 이런 식으로 망치고 싶지 않았던 에디는 잃어버린 지갑을 찾으려 홀로 왔던 길을 되짚으며 바닥을 훑기 시작하지만 지갑은 없었다. 그러던 중 얼굴이 새하얀 남자를 발견하고 그가 쳐다보는 쪽을 향해 시선을 돌렸을 때 그 소녀를 보았다. 심장이 철렁 내려앉도록 예쁜 얼굴이었다. 그런데 잠시 후에 그 얼굴이 사라졌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그녀의 얼굴이 에디의 눈 앞에 있었는데 귀청을 찢는 끔찍한 소리와 함께 놀이기구의 축에 달린 회전 링이 부러지며 은색의 무언가가 소녀의 얼굴을 덮쳤다. 축제장은 한순간 아수라장이 되어 사람들의 비명과 고함이 가득한 가운데 에디와 아까 그 새하얀 남자는 소녀를 구해 영웅이 되지만, 극적으로 살아난 소녀는 숲속에서 머리 없는 시체로 발견되고 만다. 머리 없는 소녀의 시체, 분필로 그린 섬뜩한 그림, 그리고 소름 끼치는 살인. 한 마을을 공포에 떨게 한 그 날 이후 30년이 지난 어느 날, 에디에게 올가미를 두르고 있는 막대인간의 그림과 흰색 분필 조각이 담긴 편지 한 통이 도착한다. 글씨는 없다. 하지만 메시지는 아주 분명하다. 그리고 사건은 다시 시작되었다. 

1986년 이제 막 사춘기로 접어든 열두 살의 에디와 친구들. 그들이 저지르는 가장 짖굳은 장난이라고 해보아야 분필로 친구의 집 앞에 막대인간을 그려서 자기들만 아는 비밀 메시지를 주고받는 정도였다. 하지만 그 초크맨이 등장할 때마다 섬뜩한 사건이 벌어지고 급기에 초크맨의 인도에 따라 숲속으로 들어간 에디와 친구들 앞에 토막 난 시신이 등장하면서 그들의 일상은 모든 게 달라져버린다. 새까만 길바닥과 새하얀 색이 선명한 대조를 이루며 길바닥에 그려진 초크맨! 처음에는 다른 친구가 그림을 그렸을 거라고 생각했다. 뚱뚱이 개브나 호포가 그렸을 거라고. 못된 장난이었을 거라고. 하지만 그들에겐 각자 정해진 분필 색이 있었다. 뚱뚱이 개브는 빨간색, 메탈 미키는 파란색, 호포는 초록색, 니키는 노란색, 에디는 주황색. 그들 중에 하얀색을 쓰는 아이는 없었다. 시간은 흘러 2016년. 어린 시절에 살았던 집을 지키며 아이들을 가르치는 교사가 된 에디에게 어느날 하얀 분필 조각과 초크맨이 그려진 편지가 배달되어지고 예전에 시신을 같이 발견했던 친구 중 한 명이 강물에 빠져 죽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과거가 다시 눈앞으로 펼쳐진다.

출간되자마자 스티븐 킹, 리 차일드 등 장르문학의 대가들과 가디언, 타임즈 등 유수 언론의 찬사를 받으며 2018년 상반기 가장 강렬한 데뷔작으로 자리매김한 <초크맨>. 스티븐 킹은 “내 스타일을 좋아하는 독자라면 이 작품도 좋아할 것이다.”라며 공식적으로 자신의 피를 이어 받았음을 알렸고, 가디언 역시 “이 자신감 넘치는 데뷔작에는 스티븐 킹의 피가 흐르고 있다.”라고 평했다. 리 차일드는 “서늘한 칼날이 내 뒷덜미를 누르는 듯 제대로 섬뜩하다,”며 압도적 신인의 탄생을 반겼다.
이 작품의 아이디어가 떠오른 것은, 딸아이가 두 살 때 생일선물로 받은 분필 덕분이었다. 딸과 함께 오후 내내 차고 진입로에 온갖 막대인간을 그려놓고 밤에 현관문을 열었는데, 방범등 불빛에 비친 그 막대인간들이 그렇게 섬뜩해 보일 수가 없었던 것이다. 저자는 그 길로 당장 집필에 들어갔고 그렇게 탄생된 원고가 바로 <초크맨>이다.

책은 일인칭 시점에서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박진감 넘치게 이어진다. 스티븐 킹을 비롯한 다수의 사람들이 극찬한 만큼 초반부터 흡입력이 엄청나다.
지루해 할 겨를이 없다. 과연 초크맨은 누구일까?! 결코 예단하지 말 것. 모든 것에 의문을 제기할 것.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할 것.
사건이 일어나는 곳마다 등장하는 초크맨, 이 초크맨이 등장할 때마다 충격적인 사건이 벌어진다. 온 마을을 충격에 휩싸이게 만든 그 사건이 이대로 점점 잊혀지는가 싶었는데 미지의 인물이 보낸 익명의 편지 한 통으로 과거의 사건들이 생생하게 다시 되살아나고 주인공 에디를 중심으로 해결되지 못한 그 사건들을 처음부터 다시 되돌아보며 뒤쫓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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