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문자 살인사건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민경욱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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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나를 노리고 있어.”
그는 버번 잔을 기울이며 말했다. 잔 속에 든 얼음이 달그락 소리를 내며 움직였다.
“노려?”
나는 반쯤 웃으면서 되물었다. 농담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뭘 노린다는 거야?”
“목숨을.”
그가 대답했다.
“누가 내 목숨을 노리고 있는 것 같아.”
나는 여전히 웃고 있었다.
“왜 당신 목숨을 노리는데?”
“글쎄.”
그는 잠시 침묵한 후 다시 입을 열었다.
“몰라. 왜 그런지.”
그의 목소리가 너무 무거웠던 탓에 내 얼굴에서도 웃음기가 사라졌다. (p.11)

 

누군가 자신의 목숨을 노리고 있다는 애인 가와즈 마사유키의 이야기를 농담으로 치부하며 웃어 넘겨버리려는데, 그는 진지했다. 느낌만이 아니라 정말 누군가가 자신을 노렸다고 했다. 그로부터 얼마 후 형사가 찾아와 그의 죽음을 알렸다. 도쿄 만에서 시체가 떠오른 걸 발견하고 시신을 인양해 신원 확인을 한 결과 그였다고 한다. 찬찬히 이야기를 듣고 싶어 근처 카페로 장소를 옮겨 형사와 마주 앉아 그의 이야기를 들었다. 살해당했다고 한다. 이미 예상했던 말이어서 크게 놀라지는 않았다. 그런데 잔인하게 살해됐다고 한다. 둔기로 뒷머리를 내리친 뒤 마치 쓰레기처럼 아무렇게나 항구에 버려졌다고. 자신의 애인이 쓰레기처럼 버려졌다니, 도데체 범인은 왜 그렇게까지 해야했을까? 
장례식을 치르고 이틀이 지난 저녁, 오랜만에 일을 하고 있는데 그의 동생 가와즈 사치요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마사유키의 짐을 정리하려는데 옷장 안에서 방대한 양의 자료와 스크랩이 나와 고향에 가져가려 했지만, 가까웠던 분에게 도움이 된다면 드리는 편이 오빠도 기뻐할 것 같다며 혹시 필요하다면 택배로 보내겠다고 말이다. 그의 여동생이 보내준 유품들을 하나씩 정리하면서 그녀는 지금껏 마사유키에 대해 전혀 몰랐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에 대한 이야기와 남겨진 물건들에서 비춰지는 남자는 자신이 알던 마사유키와는 달라서 낯설기만 하다. 그의 물건을 전해 받은 이후 주변에서 느껴지는 수상한 움직임. 뭔가 이상하다. 누군가 그를 노린 것 같다. 결국 그녀 애인의 죽음에 석연치 않은 부분을 파헤치기 위해 그의 수첩에 적힌 마지막 일정을 따라 행방을 쫓기 시작하고 그러던 중 그의 담당 편집자 다무라로부터 전해들은 이야기로 1년 전 요트 여행을 떠났던 사람들이 이 살인 사건과 관계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분명 그 여행 도중에 무슨 일이 있었다. 단순한 해난 사고는 아니다. 그리고 그것을 다른 사람한테 알리고 싶지 않은 누군가가 존재한다. 그와 같이 취재를 나갔던 니자토를 시작으로 그 요트 여행에 참가했던 사람들의 명단을 구해 그들을 추궁하지만 그들의 반응은 어딘지 탐탁지 않고 심지여 사건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자신이 조사했던 사람들이 하나둘씩 누군가로부터 살해당하기 시작한다.

 

 

의외로 너무나 쉽게 끝났다.
마치, 그래 성냥을 태우는 것 같았다.
쿵, 하고 쓰러지더니 곧바로 추한 몸뚱어리만 남았다.
순간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그리고 이어서 정적이 온몸을 감쌌다.
나는 몇 초 동안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다가 잠시 후 민첩하게 뒤처리를 시작했다. 머리는 무서우리만치 차갑게 식어 있었다. 뒤처리를 끝내고 여자를 내려다봤다.
역시 이 여자도 답을 알고 있었다.
그것을 약해 보이는 교활함으로 숨기고 있었을 뿐이다.
내 증오의 불꽃은 꺼지지 않았다. (p.83)

 

손을 떼지 않으면 죽는다.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가 시간을 두고 천천히 내뱉었다. 역시 침입자가 있었다. 나에게 메시지를 남기기 위해 온 것이다.
손을 떼지 않으면 죽는다······고?
누가 이런 협박을 했는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하지만 그자는 내 행동을 알고 있다. 그리고 두려워하고 있다. 방법은 서툴렀을지 모르지만 우리는 틀림없이 실체에 다가가고 있었던 것이다. (p.146)

 

내가 그들을 용서할 수 없는 이유는 단순히 내게서 소중한 걸 빼앗아갔기 때문이 아니다. 그들의 행위가 자신들의 일방적인 가치관에 의해 이루어졌고, 따라서 그들이 어떤 수치심도 못 느끼고 있다는 데 격렬한 분노를 느끼는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행위를 당연한 것이었다고까지 생각한다.
인간이라면 당연한 일이었다고. 인간이라면? 말도 안 된다.
그들이 저지른 짓은 가장 인간적인 부분을 부정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나는 그들에게 참회를 요구하지 않는다.
나는 그들에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다.
그들에게는 무언가를 요구할 만한 가치조차 없다.
그들이 반격해온다 해도 나는 두렵지 않다.
에이스도 조커도 모두 내 손안에 있기 때문이다. (p.173)

 

책은 애인이 갑자기 살해당하고 난 후 그의 연인인 추리작가가 자신의 편집 담당자인 하기오 후유코와 함께 사건의 실마리를 풀어나가는 과정을 담고 있다. 애인의 죽음 이후 그의 죽음을 밝히기 위해 사건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그녀가 조사하던 사람들이 하나둘씩 살해당하기 시작하고 결국 본인도 위험한 지경에 처해진다. 살해된 사람들은 모두 지난해 해난 사고를 당했다. 그것 외에는 생각할 필요도 없다. 사고와 관련된 사람들은 하나같이 모두 그 날 있었던 일에 대해 언급을 피하고 있다. 경찰도, 그리고 주인공도 범인을 밝혀내지 못하고, 그런 그들을 비웃기라도 하듯 살인은 계속해서 이어진다.
 
전세계적 팬덤을 형성하고 있는 히가시노 게이고 작가님의 명성에 걸맞게 <11문자 살인사건>은 일본에서 드라마화 되면서 오랫동안 사랑을 받은 작품이다. 그의 작품은 언제나 치밀한 구성과 예상치 못한 반전으로 마지막 페이지를 넘길 때까지 절대 방심할 수 없게 만든다. 이 책 역시 마찬가지. 작가가 흐트려놓은 조각들을 하나씩 끼워 맞추다 보면 선과 악과 마주한다. 이 작품은 선과 악의 경계선이 명확하지 않다. 대부분의 추리소설에서는 선과 악이 명확하게 구분지어져 있는데 이 책에서는 선인도 악인도 없다. 내가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사건이 크게 달라진다. 악인을 비난하기보다 수긍하며 이해하게 되고 그들을 비난한다하더라도 조심스러워진다. 그들이 가진 악이라는게 대부분 우리 모두가 가지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어떤 생각, 어떤 관점으로 보느냐에 따라 악인과 선인이 수시로 바뀐다는 점이 상당히 독특하다. 선과 악의 경계란 무엇일까. 만약 내가 그 상황이었다면 그들과 다를 수 있었을까. 나도 뭐라고 장담할 수는 없을 것 같다. 하지만 그래도 그게 무엇이든, 어떤 이유에서라도 살인이 정당화될 수는 없다. 책을 덮고 나서도 한동안 그 여운이 쉬이 사라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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