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룩한 게으름뱅이의 모험
모리미 토미히코 지음, 추지나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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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사람을 찾아보시죠! ······대체 왜 접니까?”
“정의의 사도가 되는 데 이유가 있을까.”
괴인의 목소리가 숲속으로 멀어져 간다.
“직감이야, 직감. 이 몸에게는 딱 왔다.
자네라면 할 수 있어, 할 수 있어야 한다고” (p.63)

대학원을 졸업하고 모 화학공업기업의 연구원으로 근무하고 있는 주인공 고와다. 그의 일상은 동료들로 하여금 ‘논바닥의 우렁이와 막상막하’라 불릴 만큼 고요하고 태평했다. 연구소 부지 안 기숙사에서 살며 평일에는 아침부터 밤까지 연구소에서 일하고, 주말에도 기숙사에서 공부하거나 드러누워 지냈다. 온다 선배가 말을 걸지 않는 한 외출하지도 않는다. 그저 빈둥빈둥거리다 기숙사 방에서 캔 맥주를 마시며 밤늦게까지 꾸벅꾸벅 졸면서 ‘아내가 생기면 하고 싶은 일 목록’을 열심히 고치는게 그의 커다란 즐거움이자 멋지게 휴일을 보내는 방법이었다. 폼포코 가면이 그의 앞에 나타나기 전까지는!

 

 

 

“그렇지, 이 몸은 폼포코 가면이다,”
폼포코 가면은 자신을 타일렀다.
“모두가 이 몸을 원하고 있다. 세상을 위해, 사람을 위한 일!
게으름 피울 새는 없다!” (p.122)

 

그와 반대로 교토 거리의 인기인 폼포코 가면은 부지런하다. 사람들에게 인기를 얻기 위해서 괴상해 보이는 너구리 가면을 쓰고 주말은 물론, 평일에도 틈틈히 착한 일을 한다. 본인이 하고 싶어서 하는 일이라 불평은 하지 않지만 그도 사람인지라 가끔 몸의 내면에 사는 게으름뱅이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그에게도 게으름은 있다. 남국의 바다라도 가서 상쾌한 수상가옥 베란다에 누워 망고 프라푸치노라도 마시면서 빈둥거리거나 정처 없이 국내선을 타고 산속 무인역에 내려 매미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싶다. 어릴 적처럼 여름 축제에 가서 긴 여름방학을 떠올리며 가슴이 부푸는 경험을 하고 싶다. 심심해서 진력이 날 때까지 게으름을 피우고 싶다. 

 

 

 

 

“있잖아, ‘굴러가는 돌맹이에 이끼가 끼지 않는다.’라는 말 알아?”
“압니다.”
“다시 말해 부지런해지자는 거야. 알겠지?”
“······좀 더 이끼가 끼어 부드러워지겠습니다.”
“야, 너는 지장보살이 아니잖아.”
온다 선배는 한숨을 내쉬면 말을 이었다.
“잘 들어. 우리에게는 모험이 필요해. 막연히 시간의 흐름에 몸을 맡기는 건 안 돼. 인생이란 그저 성실하게 일한다고 보상받을 수 있는 게 아니라 이 말씀이야.”
“그렇지 않아요. 성실한 게 제일입니다.”
고와다는 투덜거렸다. (P.57)

 

“조금은 긴장감을 가져, 이 게으른 인간아.”
“우리는 인간이기에 앞서 게으름뱅이입니다.”
“게으름 피울 여유는 없어.”
“인간은 자신이 진실로 추구하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법이죠” 라고 말하면서 고와다는 절벽 끝에서 겨우 버티는 큰바위를 힘차게 미는 듯한 감촉을 느꼈다. (p.293)

 

한여름의 토요일 아침, 교토 기온 축제를 하루 앞둔 전야제의 날, 고와다는 폼포코 가면으로부터 자신의 뒤를 이어 정의의 사도가 되라는 권유를 받고 비장하게 대답한다. “게으름 피우느라 바쁩니다!”
세상에 이런 일이! 일이 바빠서도 아니고 고작 게으름을 피우느라 바빠서 안된다니 너무 황당한 대답에 피식 웃음이 새어 나온다. 이런 사람이 주인공이라고??!! 무슨 이런 독보적인 캐릭터가 있단 말인가! 그는 그저 빈둥거리며 주말을 보내고 싶었을 뿐인데, 폼포코 가면과 엮이게 되면서 원치 않게 그의 주변에 모험의 기운이 스물스물 다가오기 시작한다.

계속해서 실랑이를 벌이는 두 사람, 이쯤되면 폼포코 가면의 정체 보다도 고와다가 과연 그의 제안을 받아줄지 아닐지가 더 궁금해진다. 고와다는 다른 사람을 찾아보라며 분명히 거절의 의사를 표했는데도 폼포코 가면은 번번히 그를 찾아와 뒤를 이으라고 다그치고 그때마다 고와다는 고집스럽게 거절한다. 고와다에게 모험이라니?! 기숙사에서 빈둥빈둥 뒹구는 그에게 있어서는 실로 위험한 일이었다. 하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뒤를 이어 줄 때까지 몇 번이고 찾아오겠다는 폼포코 가면. 그리고 그런 그를 피해 열심히 도망치는 고와다. 도망치면 쫓아오고 또 도망치면 쫒아오고 이 둘은 대체 몇 번이나 똑같은 실랑이를 되풀이 하는건지. 끈질기게 찾아오는 폼포코 가면에게서 고와다는 빈둥거리는 휴일을 굳건하게 지켜낼 수 있을까. 그러던 중 축제 당일 갑자기 폼포코를 잡으려는 이들이 등장하고 그는 피하는 대신 정면으로 맞서 얽히고 설키며 그 실체에 다가서고 그 와중에도 고와다는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폼포코 가면을 피해 요리조리 달아나며 깨알같은 재미를 선사한다. 이 둘의 케미 정말 흥미진진함!

<야행>, <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의 모리미 도미히코 작가님의 최신작 <거룩한 게으름뱅이의 모험>

지금까지 이렇게 게으른 주인공은 없었다. 늘 천하태평! 무슨 일에도 동하지 않고 지장보살처럼 견고하고 너구리처럼 게으른 고와다와 누구에게나 친절한 괴인 폼포코 가면, 세계에서 가장 게으른 탐정 우라모토 그리고 주말이면 그의 밑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허당 조수 다마가와, 늘 티격태격 싸우지만 사이 좋은 온다 선배와 모모키 등 책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하나 같이 어딘가 부족해 보인다. 그래서 왠지 더 친숙하게 느껴진다. 완벽하지 않아서 더 애착이 가고 그들을 응원하게 만든다. 특히 저 혼자 잘 먹고 잘 살기 바쁜 세상에서 곤경에 빠진 사람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미는 폼포코 가면, 아무 조건 없이 자신을 희생한다는게 요즘 세상에서 가당키나 한가. 우리 사회에도 이 같은 인물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기분 좋은 상상을 펼쳐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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