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
김원영 지음 / 사계절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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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 실격’이란 없다.
장애나 질병, 가난, 볼품없는 외모, 부족한 재능, 다른 성적 지향을 이유로
세상의 법정에서 실격을 선고당한 이들을 위한 변호사 김원영의 반론

 

우리의 부모는 우리의 존재에 대해 죄책감을 가져야 할 이유가 없다. 당신과 내가 ‘마음에 들지 않는’ 혹은 ‘열등한’ 혹은 ‘잘못된’ 어떤 속성을 가지고 태어났다고 해도 우리에게 다른 선택지는 없었다. 누군가에게 책임을 돌릴 수 없다는 사실이 당신을 더 화나게 할지도 모른다. 나는 왜 하필 이런 장애를 가지고 태어난 거지? 왜 나는 이렇게 키가 작지? 왜 내 지능은 좋지 않지? 왜 나는 아토피성 피부염이나 만성피로증후군을 타고난 거지? 누군가에게 화를 내고 싶겠지만, 우리는 우리의 삶이 잘못되었다고 주장할 수 없다. 이 ‘잘못된’ 상태가 아니라면 우리는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p.119)

 

 

질병과 장애에는 각각의 역사가 있고, 그 역사는 질병과 장애를 안은 채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 속에서 다시 해석되고 기록된다. 며칠 아팠다가 낫는 감기나 한 달 정도 입원했다가 치료를 받고 끝나는 일시적인 질병은 우리가 잠시 휴식을 취하는 계기가 되고, 몸에 대해 한번쯤 생각해보는 기회가 될 뿐이다. 하지만 만성적인 질병, 늘 약을 먹어야 하고, 할 수 있는 일이 제한되고, 때로는 빨리 죽음에 이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속에서 살아야 하는 질병이나 우발적인 사고로 갖게 된 ‘장애’라는 몸 상태는 한 사람에게 고유한 이야기가 된다. 내 몸이 가진 이 속성, 흔적, 경험으로 우리는 어떤 이야기를 쓸 수 있을까? 정제성이란 결국 한 사람의 이야기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p.129)

 

 

저자는 골형성부전증으로 지체장애 1급 판정을 받았으며, 열다섯 살까지 병원과 집에서만 생활했다. 검정고시로 초등학교 과정을 마치고, 장애인을 위한 특수학교의 중학부와 일반 고등학교를 거쳐 서울대학교 사회학과를 졸업했다. 이어 서울대학교 로스쿨을 졸업하고 국가인원위원회 등에서 일했으며, 현재는 서울에서 변호사로 활동하는 중이다. 그의 주변에는 장애, 질병, 가난을 이유로 소외받는 동료들이 있고 다른 한편에는 좋은 직업, 학벌, 매력적인 외모로 세상의 중심에 서 있는 동료들이 있다. 그 가운데서 저자는 진동하듯 살면서, 또 사회학과 법학을 공부하면서 자신의 정체성과 장애인 문제를 사회적 차원에서 고민하기 시작했고, 그 고민을 여러 매체에 글로 썼다.

부모, 형제자매, 친구, 연인과의 상호작용 속에서 자신이 존엄한 인간임을 확인한 소수자들은 이제 세상으로 나아간다. 변호사이자 국가인권위원회 장애차별조사관으로 일했던 저자는 법의 문지기로서 차별당하는 이들을 만나온 경험을 바탕으로, 법과 제도가 보호와 치료, 복지라는 이름으로 인간 존엄의 가장 기본적 전제인 개개인의 고유한 서사를 인정하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이들의 복잡하고 고유한 삶의 이야기, 배경, 몸의 경험이 무엇이든 오로지 법은 서비스를 받고 싶다면 정신질환자로 스스로를 인정하라고 요구한다. 법의 보호와 지원을 받기 위해서는 바로 그 보호가 필요한 이유인 ‘속성’ 또는 ‘배경’ 안으로 한 사람의 인격을 온전히 구겨 넣으라는, 즉 지체장애와 발달장애 그 자체로만 존재를 쪼그라트리라는 요청이다. 헌법은 개인이 고유한 저자성을 갖기 때문에 존엄하고, 그 존엄성을 보장하기 위해 자유권, 평등권, 인간다운 생활을 할 권리 등이 필요하다고 명시하고 있지만, 정작 그 권리 보호의 문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개개인이 존엄의 핵심인 저자성을 침탈당해야 하는 셈이다. 나아가 저자는 그러한 고유성, 자기 삶의 이야기를 스스로 써 내려가는 저자성authorship을 보장받기 위해 ‘이동권’과 같은 새로운 권리를 발명해나간 장애인들, 소수자들의 오랜 투쟁의 역사를 이야기한다. 타인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자신의 존엄을 확인하고, 그것을 법과 제도에 진입시키려 노력해온 소수자들은 이제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는 아름다움의 문제, ‘나는 법과 도덕, 교양, 인권 의식에 의존하지 않고도 그 자체로 매력적인 존재인가?’라는 질문 앞에 선다.

우리는 세상에 태어나 다른 사람들과 상호작용을 하고 자신만의 인생 이야기를 써나가며 저마다 차이는 있겠지만, 겉보기에는 아무리 별 볼 일 없는 사람도 모두 자기만의 색을 가진다. 다만 그 색을 드러낼 기회와 자원이 불평등하게 분배되어 있을 뿐이다. 인간의 존엄은 우리나라 헌법을 비롯해 국제법상 인정되는 보편적인 가치이지만 현실에서는 모든 인간이 존엄하고 가치 있는 존재하는 점을 변론하기가 결코 쉽지 않다. 나 자신을 포함해 우리는 때로 너무 한심하고, 무가치하고, 추해 보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들이 실격을 당했다고 생각하지만 어찌보면 오히려 실격을 당한 건 그들이 아니라 우리였는지도 모른다. 사실 이미 넘어졌는데 넘어지지 않은 척 행동하는 것처럼 실격당했으면서도 실격당하지 않았다고 생각하고 싶은 것이 아닐까. 저자는 변론을 통해 우리에게 넘어진 삶을 일으키는 방법과 스스로를 비난하지 않고 걸어가는 법을 알려준다. 우리 주변의 현실을 돌아보면 누구도 보려하지 않았던, 아니 보았으면서도 그냥 지나쳐버리는 일들이 너무나 많다. 저자가 하려는 일도 이와 같이 않을까. 우리와 무관하다고 생각했는데 전혀 무관하지 않았다. 그들도 우리와 함께 이 사회를 살아가는 구성원이고, 가족들 중 누구라도 그렇게 되지 않으리라 보장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남의 집 불구경이라도 하는 것처럼 먼 산을 쳐다보듯 눈여겨보지 않았고, 그들이 몸이 불편하다는 이유로 무시하며 우리가 사회적 강자인 척 지내왔다. 누가 강자이고 약자인지 그 기준을 우리 마음대로 정해놓고서 말이다. 그들이 실격을 받아야 하는 이유 따위는 없었다. 태어나면서 우리 모두는 축복을 받으면서 태어났다. 그런데 왜 누군가는 부당한 대우와 함께 실격을 받아야 하는 걸까. 우리 모두가 진지하게 생각해봐야 할 문제가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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