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은 내가 집에서 논다고 말했다
최윤아 지음 / 마음의숲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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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끝내 나는 집으로 돌아왔다. 결정적 한 방은 없었다. 회사에 더 이상 내가 앉고 싶은 자리가 없었고, 그토록 경멸 혹은 경계했던 인간으로 변해가는 내 모습이 싫었다. 말하자면 나는 치명적인 스트레이트 한 방이 아니라, 수십 번의 잽에 맞아 백기투항을 결심한 셈이다. 흰 수건을 링 위에 던지기 전 마지막으로 스스로에게 물었다. ‘다시는 일하지 못해도 괜찮겠냐’고. 두 번의 사표는 내게 ‘조직 부적응자’라는 주홍글씨가 될지도 모른다. 지금 그만두면 난 노동시장에서 최하등급인 ‘애 없는 기혼 여자’가 된다. 다시 일하기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수건을 던졌다. 다시는 일하지 못해도 좋다는 결심이 섰을 때였다. 전업주부로 산다면 더 이상 피말리는 100대 1 에 노출되지 않아도 됐다. 성취도 없지만 상처도 없는 세계, 그곳으로 어서 빨리 가고 싶었다. 지체하지 않고 사표를 냈다. 회사의 휴직제도도, 부모님의 필사적인 만류도 내게 브레이크를 걸지 못했다. 그렇게 나는 100대 1 사회에 이별을 고했다. (p.25)

 

이보다 더 완벽할 순 없었다. 기자와 저자의 궁합은. 일단 적성에도 맞았고 진로 상담을 한답시고 만난 역술가나 점쟁이들이 하나같이 기자를 하라고 권했다. 이건 운명이었다. 하지만 그 믿음은 기자가 되고부터 쩍쩍 금이 가기 시작했다. 나름대로 쉬지 않고 최선을 다해 일을 하는데도 성과가 없었다.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가지 못하는 나 자신 때문에 숨이 턱턱 막혔다. 그때부터 재능에 대한 회의가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이렇게 열심히 하는데 성과가 없는 건 재능이 없기 때문이란 생각에 사로잡힌 것이다. 재능이 없다고 확신하는 일을 매일, 그것도 하루 열 몇 시간씩 해야 하는 것도 정말 고역이었지만 무엇보다 자꾸 일에 겁을 먹었다. 난이도가 높지 않은 일인데도 두려움이 앞섰다. 어떻게 하면 혼나지 않을지 가능한 모든 시나리오를 그려보느라 일을 처리하는 속도도 무척 더뎠다. 상사에게 잔뜩 혼나고 집에 돌아오면 저녁을 먹으면서도 낮에 들었던 선배의 지적을 끊임없이 되새김 남편과 눈 한번 제대로 맞추지 못했다. 더 이상 재능 없는 일에 시간과 에너지를 쏟고 싶지 않았다. 무슨 일을 하면 대충해도 그럭저럭 잘 해낼 수 있을 까 고개를 돌리니 내 능력의 절반만 써도 잘할 수 있는 단 한 가지 일이 눈에 들어왔다. 살림이었다.
처음에는 그리 난이도가 높아 보이지 않았다. 특별한 기술이나 요령 없이도 부지런하기만 하면 거의 빈틈 없이 해낼 수 있었고, 실패해 봤자 요리를 살짝 태우거나 니트가 줄어드는 정도였다. 무엇보다 살림은 자신에게 상처를 줄 수 없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사랑하는 일이 아니기 때문에. 내가 120퍼센트 최선을 다할 일이 아니기 때문에. 하지만 그 생각은 오산이었다.

 

 

 

 

 

결혼 후 내게는 고민 하나가 더 추가됐다. ‘이 일을 과연 가정과 병행할 수 있을까’ 하는 문제였다. 그러나 남편은 이런 문제를 나만큼 진지하고 심각하게 고민하지 않았다. 이런 문제에 대해 내가 고민을 털어놓을 때마다 아직 닥치지 않은 일을 미리 걱정하지 말라고 나를 다독였다. ‘일과 가정의 양립’은 내게는 결혼과 함께 서서히 다가오기 시작한 문제였지만, 그에겐 아직 먼 미래의 얘기였다. 고민의 깊이와 정도가 다를 수밖에 없었다. 고민 없이 일하는 그가 부러웠다.
아주 가끔은 억울한 마음도 들었다. ‘토끼와 거북이’에 나오는 토끼처럼 낮잠을 자며 게으름을 부린 것도 아닌데, 단지 결혼을 했을 뿐인데, 어느새 거북이에게 추월당한 느낌이었다. ‘결혼을 하지 않았다면, 나도 저 자리에 있을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후회가 일었다. (p.159)

 

결혼 이후 남자와 달리 여자의 인생은 완전히 달라진다. 결혼을 하기 전이라면 퇴근 후 꿀맛같은 휴식이 나를 기다리고 있겠지만, 결혼 이후에 퇴근을 하고 집에 돌아오면 또 다른 일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 바로 살림! 예전과 달리 부부가 같이 한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아내의 손이 닿아야 하는 부분들이 더 많다. 그리고 친정과 시댁 등 신경써야 할 일들이 한 두가지가 아니다. 더불어 자식을 낳아야 한다는 무언의 압박까지. 내가 원해서 한 결혼이긴 하지만 한 남자의 아내, 며느리, 그리고 엄마가 되고나니 나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나에게 주어지는 의무들이 줄을 섰다. 물론 좋은 점도 많긴 하지만, 가끔은 내가 이럴려고 결혼을 했나 싶을 정도로 두 어깨를 짓누르는 부담감이 엄청나다. 특히나 일을 하다가 전업주부로 전향했을 경우, 주변에서 바라보는 곱지않은 시선들로 스스로 자존감이 상당히 낮아진다. 나름 스스로 일을 하고 있음에도 무시 당하기 일쑤다. 경력만 안쳐줄 뿐이지 엄연히 직업란에 전업주부라는 명칭이 있을 정도로 이것도 하나의 직업인데, 직업으로 대우해주기는 커녕 능력이 없다고 오히려 깔보고 무시하는 경우가 태반이다. 전업주부는 절대 놀고 먹지 않는다. 좀 알아주라!

이 책은 아이를 키우는 육아맘의 이야기가 아니라, 돈 벌지 않고 살아본 여자의 이야기다. 회사가 싫어 집으로 도망친 그러니까 퇴사만 하면 행복할 줄 알았던 워킹우먼이 전업주부가 되고 나서 겪은 이야기들을 가감하게 들려준다. 경제활동을 남편에게 의지했을 때 벌어지는 일들, 시댁을 향한 원인 모를 피해의식과 갈등, 점점 낮아지는 자존감, 전업주부는 페미니즘을 논할 수 없다는 같은 여자들의 차별까지 모두. 평온할 줄 알았던 전업주부는 생각만큼 편하지 않았다. 눈치 볼 필요 없지만 자꾸만 눈치를 보게 되고, 희생할 필요 없지만 저도 모르게 스스로를 희생하게 됐다. 회사를 그만두면 행복할 줄 알았는데, 주부가 되고 또 다른 방황을 하고 있었다. 책을 읽다보면 같은 여자라서 공감가는 글들이 상당히 많다. 이 책을 남자, 여자 할 것 없이 모두 한 번쯤 읽어봤으면 좋겠다. 남자분들이 읽어본다면 조금이나마 여자들이 고민하고 어려워하는 부분들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고, 결혼을 고민하고 있거나, 결혼을 앞두고 있거나, 계속 일을 해야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하고 있는 여자들이 본다면 그 궁금증을 풀어주는데 많은 도움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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