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스 킬러 시리즈
이사카 고타로 지음, 김해용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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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관문에 열쇠를 끼워 넣는다. 천천히 넣었는데도 딸칵하고 소리가 나는 것이 풍뎅이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불길하게 느껴진다. 소리 나지 않는 열쇠가 발명되는 날은 오지 않으려나. 신경을 곤두세우고 손을 신중하게 돌린다. 걸쇠 풀리는 소리에 위가 따끔거린다. 문은 연다. 불을 모두 끈 집 안은 조용하다. 신발을 조용히 벗는다. 발바닥 전체를 사용해 미끄러지듯 복도를 걷는다. 거실은 어둡다. 이 집 사람들은 모두, 그래 봤자 두 사람이지만 이미 잠들어 있을 것이다. 숨을 죽이고 자신의 움직임에 주의하면서 2층으로 올라간다. 올라가 오른쪽 방으로 들어간다. 불을 켜고 귀를 쫑긋 세운다. 천천히 숨을 내뱉는다. 안도의 한숨이 나오는 순간이었다. (p.9)

 

평소에는 그냥 문방구 제조업체의 영업사원이지만 사실은 알아주는 킬러인 풍뎅이. 완벽한 일 처리 때문에 킬러 업계에서는 전설적인 존재로 불리는 그지만 집에서는 늦은 밤 귀가해 자신이 내는 소리에 혹시나 아내가 깨지 않았는지 숨죽이며 귀 기울일 정도로 아내의 눈치를 보는 공처가다. 그래서 오늘처럼 밤늦게 일을 처리하고 들어가는 날이면 아내가 깨지 않도록 소리도 나지 않고 오래가기도 해 배가 부른 어육 소세지를 먹으며 출출한 배를 달랜다. 아내가 없는 집은 마음이 편하다. 물론 아내가 거북하다거나 싫다거나 그런 것은 아니다. 오히려 애정은 오랜 결혼 생활을 통해 더욱 깊어졌으면 깊어졌지, 줄어들지는 않았다. 하지만 자꾸만 아내의 눈치를 살피게 된다. 고등학생 아들 가쓰미는 그런 아버지가 때론 조금 한심해 보인다. 가끔은 엄마한테 버럭 대들어 보면 좋겠는데 만날 혼만 나니까. 아버지가 좀 더 당당했으면 좋겠다.

 

 

“가능한 빨리 업계에서 발을 빼고 싶어요.”
“퇴원하려면 돈이 필요합니다.”
이 남자는 정말 나를 업계에서 은퇴시킬 생각이 있기는 한 걸까. 풍뎅이는 생각에 빠진다. 지난 20년 가까운 세월 동안, 일은 모두 의사가 중개해 주었다. 저 남자를 살해하라, 이 남자를 처치하라, 하고 지시를 내렸다. 아마도 의사는 풍뎅이뿐만 아니라 달리 몇 명의 업자를 ‘환자’로 끌어안고 있을 것이다. (p.25)

 

그는 지금 업계에서 은퇴하기를 원한다. 사실 가쓰미가 태어난 무렵부터 풍뎅이는 이 일을 그만두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실제로 5년 전 자신에게 일거리를 전해주는 의사에게 이야기했지만 의사는 놀라지도 환영하지도 않은 채 그만두려면 돈이 필요하다며 오히려 그를 설득했다. 어디에 쓸 돈인지 어디에 들어갈 돈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단독 주택 한 채 정도 살 수 있는 돈은 아무리 풍뎅이라 해도 당장 지불할 수가 없어서, 결과적으로 일을 그만두기 위해서는 그 일로 돈을 버는 부득의한 상황을 지속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잘못하면 가족이 위험해질 수도 있기에 아이러니하게도 살인을 계속하는 처지가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풍뎅이는 중개인으로부터 말벌이라는 업자가 자신의 목숨을 노리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된다. 이는 곧 누군가가 풍뎅이를 살해하길 원해 말벌에게 일을 의뢰했다는 의미. 그를 고용한 건 누구일까. 얼마 뒤 풍뎅이는 예상치 못한 곳에서 누군가로부터 습격을 받게되고, 자꾸만 위험한 사건들에 휘말린다.

 

 


일본 최고 권위의 나오키상에 다섯 번이나 후보로 선정되고, 최초로 일본 서점대상에 5년 연속 후보로 오르는 등 발표하는 작품마다 큰 반향을 일으키며 일본에서 가장 촉망받는 차세대 작가 이사카 고타로. 그가 이번엔 킬러에 대한 이야기를 들고 찾아왔다. 킬러라는 직업을 가진 주인공 풍뎅이를 중심으로 사회와 인간이 안고 있는 어둠과 욕망을 날카로운 시선으로 풀어내며 웃음과 재미를 적절히 섞어 개성 넘치는 인물들로 냉혹한 킬러 세계의 사건들을 스릴 있게 그려낸다.

킬러라고 하면 보통 혼자의 몸으로 재빠르게 행동하는데 반해 풍뎅이는 처자식이 딸린 킬러다. 그것만으로도 아이러니한데 이 분 심각하게 공처가다. 아내의 말에는 찍소리도 못할 만큼, 아내 앞에 서면 숨 쉬기 힘들 정도로 긴장한다. 늘 아내의 화풀이 대상이 되고 있다. 이런데 업계에서는 알아주는 킬러라니 정말 웃음이 안 나올 수가 없다. 그에게 중요한 건 가족 밖에 없다. 표적을 처리해야하는 바쁜 와중에도 아들 가쓰미의 진학 상담에 함께 하고, 원래 단 것을 좋이하는 편은 아니지만 아내가 원한다면 억지로 단맛 취향에 맞춰 줄 만큼 가족들을 아끼고 사랑한다. 이렇게 인간미가 풀풀 넘치는 킬러라니. 그가 바라는 것은 오직 하나! 가족의 평화다. 아내와 아들이 그럭저럭 평온한 인생을 누릴 수 있기를 바란다. 그리고 또 한가지 소원은 하루라도 빨리 이 일을 그만둘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하지만 그게 마음처럼 쉽지만은 않다. 자신에게 일을 알선하는 의사에게 말해보지만 그는 좀처럼 인정해 주지 않는다. 일을 그만두려면 항상 좀 더 돈을 벌어야만 한다고 말한다.

가족들이 그가 무슨 일은 하는지 아냐고? 전혀! 풍뎅이의 본업은 가족에겐 비밀이다. 가족은 당연히 그가 무슨 일을 하는지 모른다. 한 집안의 가장이 이런 위험한 일을 한다는 걸 알면 뭐라고 할까. 그것도 웃기지 않나. 설마 남편이 그 무서운 일을 생업으로 하고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할 것이다. 킬러라고해서 풍뎅이가 무조건 아무렇게나 일을 받아 들이는 건 아니다. 이상과 현실이 다르다는 건 알고 있지만 가능하다면 무해한 인간을 살해하는 사태만큼은 피하고 싶어한다. 그래서 위법이고 흉흉한 일을 생업으로 하는 동업자를 표적으로 삼아 자기 딴에는 죄의식을 줄이고자 한다. 그가 이 일을 하는 이유는 단 하나 바로 가족을 위해서다.

보통 킬러라함은 잔혹하고 냉철한데 이 킬러는 너무 친근하다랄까 너무나 인간미가 넘쳐 흐른다. 일도 아무 일이나 받지 않고 가려서 받는다. 나쁜 사람만을 골라 죽인다. 그에겐 아내의 기분을 신경 쓰는 것보다 적과의 격투가 훨씬 쉬운 일이다. 아내와 대화하는 것보다는 자신을 일을 하는게 더 쉽다니, 그를 보면 절로 웃음이 나온다. 미워할래야 미워할 수가 없는 캐릭터다. 우리 주변에서 찾아보면 흔히 볼 수 있을 법한 평범한 사람인데 킬러라고 하니 계속해서 읽다보면 혹시? 하고 주변 사람들을 쳐다보게 될 수도 있다. 마치 현실에서 평범해 보이는 누군가가 사실은 킬러일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하게 될 만큼. 점점 후반부로 갈수록 이야기는 무거워지고 깊은 울림이 전해져온다. 흡입력은 말할 것도 없고 얇지 않은 두께지만 한 번 읽기 시작하면 끝까지 정주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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