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주가의 결심 - 2018 한경신춘문예 당선작
은모든 지음 / 은행나무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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찻잔을 감싸듯 슬그머니 술병을 쥐어본다. 유백색 표면으로 전해지는 온기를 조금 더 느끼고 싶다. 데운 술이 가득 찬 술병은 아직 지나치게 뜨겁다. 몇 초쯤 손을 떼었다가 손끝으로 병목을 기울여 투명한 술을 따른다. 술잔 위로 흐릿하게 피어오르는 훈김을 보면 언제나 마음이 놓인다. 하물며 두 볼이 에이도록 거센 겨울바람을 맞은 뒤라면 더더욱, 데운 술만큼 반가운 것은 없다. 그대로 잔을 들어 단번에 술잔을 비운다. 뭉근한 단맛이 느껴지는 후끈후끈한 술이 입안을 채웠다가 온몸으로 부드럽게 퍼져나간다. 이렇게 다정한 존재가 또 어디에 있을까. 누가 이토록 내 마음을 잘 알아줄까.  

 

술하면 역시 술주희! 대학시절 술이 제일 잘 어울려 술주희라는 별명으로 불리게 된 그녀는 지금까지 필름이 끊긴 적이 한 번도 없을 정도로 술 앞에서는 언제나 강했다. 그녀가 태어나서 가장 자주 들은 칭찬이 술을 맛있게 마신다는 것, 그리고 그녀가 마시는 술은 유달리 맛있어 보인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그녀의 인생에서 술은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였다. 술 앞에서 모두가 그녀를 향해 엄지를 치켜들었다. 그런 그녀가 이 선배가 쌍둥이를 가진 뒤 모유 수유를 마칠 때까지 이 년 가까이 무알코올 맥주로 어르고 달래온 심신에 드디어 음주를 허하는 날 그리 좋아하는 술 앞에서 기여이 무너지고 말았다. 그녀가 왜?! 사케에 소맥에 본격적인 술자리가 시작되자마자 또 주종이 바뀌어서 그런건지 아니면 졸업하고서부터 한 오년을 궁상만 떨며 죽어라 모은 돈으로 시작한 푸드 트럭을 홀랑 다 까먹고 빈털터리지만 오랜만에 기분 좋게 마시며 진탕 취하고 싶어서 그랬는지 이유는 모르겠지만 필름이 끊겨 버렸다. 언제 일어나서 어떻게 돌아왔는지 아무리 떠올려보려 해도 떡볶이 국물이 묻은 소매를 닦아주는 이 선배에게 몸을 기댄 채 속없이 웃었던 순간을 끝으로 한 톨의 기억도 남아 있지 않았다. 창피했다. 할 수만 있다면 그에 앞서 간밤의 모습들을 지워버리고 싶었다. 여태 지갑 한번 잃어버린 적 없다고 자부했던, 민폐와 거리를 둔 애주가였건만. 인간의 몸이란 이렇게 불쑥 약해지고 늙어가는 것일까.

정신없는 와중에 사촌인 우경 언니로부터 전화가 걸려오고 지난 밤 자신이 술기운을 빌어 이사한지 1년이 되도록 가보지 않았던 언니 집을 방문하기로 약속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그녀는 언니가 있는 망원동으로 향한다. 그 곳에서 우경은 자신의 사정을 이야기하며 주희에게 이곳으로 이사오지 않겠냐며 솔깃한 제안을 하고 손해날 일은 하나도 없겠다는 생각이 들던 차 술로 가득한 술창고를 통째로 주겠다는 그녀의 말에 주희는 주저없이 그러겠노라 대답한다. 그렇게 우경의 제안으로 이사 온 주희는 그 동안 일과 시간에 쫒기며 살아온 자신에게 휴식이 필요함을 느끼고 한동안 자신이 가진 시간을 탕진하기로 마음먹는다. 기왕 용기를 낸 김에 할 수 있는 최소한만 일하면서 제대로 탕진하기로. 시한부에 불과해도 어엿한 한량으로 지내보기로 결심하고 한동네에 사는 술친구 배짱과 함께 망원동 일대를 누비며 갖가지 술에 젖어든다.

제목에서부터 술냄새가 확 풍겨오는 이 책은 곧잘 등장하는 술 때문인지 읽다보면 술 생각이 절로 난다. 술이 너무나 고파온다. 술이 한 잔, 두 잔 오고 갈 때 마다 술 생각이 간절해지는데 그걸 보고 맨 정신으로 버틸 수 있는 자가 몇이나 될까. 한 손에 책을, 또 다른 손엔 맥주라도 들고 책을 읽어야 할 듯하다. 짬뽕국물에 고량주, 감자전에 막걸리, 위스키, 칵테일 등 책에는 갖가지 다양한 술들이 등장한다. 그리고 술이 더해지니 자연스레 인생이야기가 흘러나온다. 하루하루 우리가 쌓아온 이야기가 담겨진다.
정말 열심히 일하며 아낌 없이 모은 돈으로 오너 셰프라는 꿈을 가지고 도전한 푸드트럭의 운영에 실패한 뒤 무일푼이 된 주희에게 지금 이 시간은 일과 시간에 쫓겨 버둥거리던 자신을 뒤돌아보는 시간이자 재충전의 시간이다. 주희는 지금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꿈을 위해 정말 열심히 노력했다. 한시도 자신을 쉬게 놔두지 않았다. 그것은 비단 주희뿐만 아니라 책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 그리고 우리도 마찬가지. 언제부턴가 뭔가에 쫓기며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듯하다. 삶에 여유라고는 술 한잔을 입에 털어 넣을 때 뿐인 것 같다. 그래서 그들의 이야기를 쉬이 흘러 들을 수가 없었다. 자신은 하고 싶은 게 없어 뭔가 하고 싶은 게 있다는 주희를 부러워하는 우경도, 부모님의 반대를 이겨내고 반수를 거쳐 자신이 원하는 대학에 입학을 하고 이제는 영문학 석사 과정을 밟으며 분명히 좋아하는 것을 하고 있지만 전세값 때문에 혹은 어쩔 수 없이 종종 번역 작업을 맡고 호구지책으로 입시 과외를 하며 스트레스를 받는 미영도, 해고 통보를 받고 그 마음을 달랠 길이 없어 집 밖으로 나오지 않는 예정까지 모두 이해가 간다. 모두 하루하루가 힘들다. 그 고통을 잠시나마 잊게 해주는 건, 자신을 위로해주는 건 곁에 있는 친구들과 술 밖에 없다. 그 술에 마음이 담겨있다. 술에는 인생의 쓴맛도 있고 달콤함도 있고 똑같은 술이라도 마시는 사람에 따라 그 맛은 천지차이. 우리의 삶도 그런 것 같다. 내가 느끼기에 따라 지금 상황이 지옥일수록 천국일수도 있는거겠지. 연일 불경기가 계속 되고 있는 탓에 술집에는 한숨이, 신세한탄을 늘어놓는 사람들이 늘어간다. 기분좋게 마시면 얼마나 좋으냐 만은 삶에 여유보다는 초초함이 묻어나는데 어떡하랴. 너도 나도 우리 모두 한 잔의 술에 고민도 슬픔도 다 넘겨 버렸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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