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방랑
후지와라 신야 지음, 이윤정 옮김 / 작가정신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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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의 빙점

여행을 시작한 지 10년 만에 그런 ‘여행의 빙점’이 찾아왔다. 나는 얼어 붙은 채 무의미한 여행을 계속했다. 살아 있는 존재가 귀찮았다. 인간이 특히 귀찮았다. 나는 인간을 피해 풍경만 보고 다녔다. 이 시기의 내 사진과 글에는 인간이 등장하지 않는다. 이것은 하나의 위기다. 인간이 인간에게 흥미를 잃는다는 것은 ‘쇠약’이다.
나는 기사회생의 여행에 나섰다. 역치료라고 해야 할까? 얼어붙은 여행을 또 다른 여행으로 녹이려 했다. ‘동양방랑’이 그 여행이다.
이 긴 여행에서 나는 인간을 만나는 것을 과제로 삼았다. 멍청한 인간이든 고귀한 인간이든 눈앞에 나타나는 모든 인간을 일생일대의 인연으로 여기고 소중히 대하기로 했다. 변두리 유곽의 창녀에서 심산에 틀어박힌 스님까지 그 어떤 인간이든 철저히 사귀기로 했다. 여행의 중반, 콜카타에 도착했을 무렵 갑자기 나는 회생했다. 또다시 인간이 한없이 재미있어졌다. 얼어붙은 여행이 녹기 시작했다. 나 자신을 되찾았다. 누구에게나 ‘빙점’은 있다. 반드시 찾아온다. 인간의 빙점을 녹이는 것은 인간이다. 인간의 체온이다. (p.514-5) 

 

 

후지와라 신야는 스물다섯 살 때이던 1969년 여름, 우연한 계기로 영국 런던을 여행하고 일본으로 가는 길에 인도를 방문했다. 이때부터 그는 자신도 의식하지 못한 채 10여 년간 인도, 티베트, 중근동 등을 방랑하게 된다. 방랑 초기에 낸 <인도방랑>은 1970년대 초·중반 일본에서 일어난 ‘인도 붐’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고, <티베트방랑> 역시 첫 여행기에 버금가는 충격을 주었다. 훗날 지은이는 한국어판에 덧붙여진 어느 대담에서 인도와 티베트를 “양 극단”으로 설명했다. 전자는 사람을 기진맥진하게 하는 “인력이 강한 땅”, 후자는 하늘이 사람을 “위로 끌어당기는 반대의 인력”이 있는 땅이라는 것이다.
두 권의 책으로 사진작가이자 에세이스트로  명망을 날리기 시작한 저자는 그 뒤로도 여러 차례 인도와 티베트를 다시 들렸다. 작가정신에서 새 번역으로 선보이는 <동양방랑>은 앞선 두 책의 보유이자, 청년기의 결산하는 3부작의 대미라고 할 수 있다.

터키 이스탄불에서 시작해 시리아, 이란, 파키스탄, 인도, 티베트, 미얀마, 태국, 중국, 홍콩, 한국을 거쳐 일본에 이르는 400여 일간의 기나긴 여정. 저자는 스스로를 그저 길을 걷는 자, 보고 느낀 것들을 보고하는 자라 이야기하며 빼거나 보탬 없이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기록한다. 평소의 나라면 발조차 들이밀지 않았을 것 같은 공간들, 사진이 흐릿하든지 말든지 뭔가에 얽매이지 않고 본인이 내키는 대로 하나하나 담아내는 사진에서 저자의 감성이 짙게 묻어난다. 내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가고 싶은 것만 보는 여행과는 달리 내가 아닌 타인의 시선으로 바라본 여행은 앞으로도 평생 차마 가려고 시도 조차 하지 못할 곳이라 그런지 저자가 담아 내는 사진은 새롭고 그 만큼 자극적으로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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