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꽃들의 조용한 맹세
미야모토 테루 지음, 송태욱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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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기쿠에 올컷의 조카로, 지금 일본에서 전화를 걸고 있다. 기쿠에는 해외여행보험 계약서에 긴급 연락처로 두 군데를 적었다. 기쿠에는 일본 시간으로 4월 14일 저녁 열한 시쯤 슈젠지라는 온천지의 여관에서 급사했다. 혼자 온천을 즐기고 있을 때 협심증 발작이 일어난 것이다. 객실 안의 욕조여서 아무도 알지 못했다. 여관 사람이 발견한 것은 아침 여섯 시로, 경찰이 나에게 연락을 해온 것은 일곱 시경이다. (p.12)

27년······. 이 얼마나 긴 세월인가. 겐야는 태평할 만큼 파란 하늘을 올려다보고 살갗을 찌를 듯이 강렬한 햇빛을 받으며 한동안 가만히 있었다.
레일라가 살아 있고 자신들에게 돌아오지 않을까, 하는 한 가닥 희망을 품은 채 이언은 약 26년간, 기쿠에 고모는 27년간 괴롭고 힘든 나날을 보냈던 것이다. (p.44)

 

- 꽃에도, 풀에도, 나무에도, 마음이 있단다. 거짓말 같으면 진심으로 말을 걸어보렴. 식물들은 칭찬받고 싶어 한단다. 그러니 마음을 담아 칭찬해주는 거야. 그러면 반드시 응해올 거야.
아주 어렸을 때가 몇 살 때쯤이었는지는 생각나지 않았다.
할머니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받고 가르쳐준 비밀 의식은 나무나 풀꽃들에게 말을 걸어 칭찬하고, 칭찬하고, 또 칭찬해주면 나무도 풀꽃들도 답한다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마음이 있으니까.
지금까지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올컷가에서의 첫날 저녁 문득 생각 난 것은, 겐야의 귀인지 마음인지에 분명히 풀꽃들의 은밀한 목소리 같은 것이 들려온 뒤였다. (p.159)

 

 

북쪽 동의 긴 차양이 거베라를 오후의 강한 햇빛으로부터 지켜주고 있었다. 레일라도 서른세 살. 거베라 화분도 서른세 개. 겐야는 마음속으로 이건 억지로 같다 붙인 것도, 우연도 아니라고 확신했다. (p.273)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한 선택과 운명에 관한 이야기

겐야는 로스앤젤레스에서 홀로 살던 기쿠에 고모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미국으로 건너가게 되고, 그곳에서 변호사에게 놀라운 이야기를 듣게 된다. 그녀가 자신에게 400억 원이 넘는 유산을 남겼다는 것. 그러나 고모의 유언장에 적힌 마지막 문장은 겐야를 더욱 큰 충격에 빠뜨린다. 여섯 살 때 백혈병으로 죽은 것으로 알려져 있던 그녀의 딸이 사실은 보스턴의 집에서 차로 15분쯤 걸리는 곳에 있는 대형 마트에서 유괴를 당해 행방불명된 것이었다는 사실이었다. 이언과 기쿠에는 수백 만 장이나 되는 전단지를 만들어 미국 전역의 대형 마트나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에 배포하기도하고 컴퓨터 그래픽 사진을 만들어 비치하는 등 막대한 돈을 들이며 레일라를 찾기 위해 노력을 계속 했으나 결국 찾지 못했다고. 그녀의 유언장이 마음에 걸렸던 겐야는 변호사 수잔의 소개를 받아 이미 마주친 적 있던 니콜라이 벨로셀스키라는 사립탐정을 고용해 진실을 추적하기로 마음먹는다. 이 후 겐야는 기쿠에가 홀로 생활했던 저택에서 작은 단서들을 발견하고 비밀 상자에 숨겨져 있는 의문의 편지와 노트북의 비밀번호, 창에 달린 무수한 화분 등. 마치 누군가가 알아주었으면 하는 것처럼 교묘히 숨겨진 단서들을 바탕으로 그는 비극적인 비밀을 감춘 채 생을 마감한 고모의 일생을 되짚어가기 시작한다.

이야기의 배경은 대부호들이 모여 살고 있는 미국 캘리포니아주의 팔로스버디반도로, 겐야가 머무르는 기쿠에의 저택에는 수십 가지의 꽃과 커다란 나무들이 가득하고, 넓디넓은 정원 바로 앞에는 푸른 바다가 펼쳐진다. 평화롭기만 한 그 곳에서 고모의 사후정리만 마무리되면 다시 일본으로 돌아갈 예정이었던 겐타는 갑작스럽게 막대한 유산을 상속받게 되고 죽은 고모가 남긴 유언장에는 행방불명이 된 레일라를 그가 찾았으면 좋겠다는 강한 바람이 담겨 있었다. 다시 한 번 레일라를 찾는 노력을 해봐야 했다. 그래서 그는 사립탐정을 고용해 레일라를 찾아 나선다. 분명 레일라는 유괴를 당해 행방불명이라고 했다. 하지만 하나 둘 수수께끼가 풀려가고 겐타가 마주한 진실은 정말 상상을 초월했다. 27년 전 보스턴의 올컷가에서 벌어진 일은 그야말로 충격적이었다. 세상에나,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녀는 자신에게 주어진 상황에서 그게 최선의 선택이라 여기며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기 위해 아낌없이 자신을 희생하고 27년이나 넘게 언제 발각되지 모르는 불안이나 공포와 싸우며 살아올 수밖에 없었다. 그 모든 것을 떠안고 떠나버린 그녀에게 더 이상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해 그런 선택을 할 수 밖에 없었던 상황이 너무 안타깝고 기나긴 세월동안 무거운 비밀을 혼자 짊어지고 걸어온 그녀의 삶이 잔혹하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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