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죄자 - 상
오타 아이 지음, 김은모 옮김 / 엘릭시르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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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시 8분.

어느 틈엔가 약속 시간이 지났다.

여대생은 누군가를 찾는 듯이 주변을 둘러보더니 한숨 돌린 표정으로 상점 주인 풍모의 남자 대각선 맞은편으로 갔다. 그리고 분수대 테두리에 앉아 밝은 녹색 휴대전화를 펼치고 재빨리 메일을 보내기 시작했다.

모든 것이 일변한 것은 그 직후였다.

어딘가에서 모래주머니를 떨어뜨린 것 같은 둔중한 소리가 났다. 쳐다보니 상점 주인 풍모의 남자가 몹시 놀란 얼굴로 돌의자에서 몸을 일으킨 참이었다. 남자는 어중간하게 선 채 분수 쪽으로 한두 발짝 걸어가다가 느닷없이 풀썩 쓰러졌다. 상반신이 천천히 기울더니 이마가 벗겨져 시원한 머리를 돌로 된 분수대 테두리에 망치처럼 퍽 찧었다.

여대생이 그제야 성가시다는 얼굴로 휴대전화에서 눈을 들었다. 분수대 테두리에 머리를 찧은 남자는 태엽이 다 풀린 인형처럼 미동도 하지 않았다. 얇은 점퍼 등 부분에 순식간에 시커먼 핏자국이 번져나갔다.

무슨일이 일어났는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어느 틈엔가 남자가 앉아 있던 돌의자 뒤에 괴상한 뭔가가 서 있었다.

머리 전체를 푹 감싸는 검정색 헬멧을 쓰고, 깃을 세운 검정색 에나멜 롱코트에 검정색 에나멜 장갑 그리고 검정색 에나멜 부츠 차림을 하고 있었다.

다스베이더······.

그것이 슈지의 머리에 처음으로 떠오른 말이었다. (p.18)

소마는 문득 이상한 위화감을 느꼈다. 왜 이 광장이었을까.

범인은 회칼을 미리 세 자루나 구입해두었다. 사람을 죽이겠다고 단단히 마음먹었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그렇다면 어째서 사람이 더 많은 곳을 선택하지 않았을까. 회칼을 슬쩍 휘두르기만 해도 사람을 쓸어버릴 수 있을 만큼 혼잡한 곳이 도쿄에는 얼마든지 있다. 그런데 범인은 왜 이런 한산한 광장에 왔을까. (p.37)


 

“······달아나. 가능한 한 멀리 달아나.”

남자는 고개를 들고 슈지의 눈을 쳐다보았다. 무서우리만큼 창백해진 얼굴에 식은땀이 맺혀 있었다. 나잇살이나 먹은 어른이 이런 표정을 짓는 것은 처음 보았다. 외래 접수처 쪽에서 사람 말소리와 발소리가 다가왔다. 남자는 화들짝 놀라 말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눈을 돌리더니 바로 일어섰다.

“잘 들어. 알겠어?”

남자는 절실한 표정으로 슈지의 눈을 들여다보며 한 마디 한 마디 슈지의 머리에 새겨넣듯이 말했다.

“앞으로 열흘. 열흘만 살아남으면 안전해. 살아남아. 네가 마지막 한 명이야.”

말을 마친 남자는 다가오는 말소리에 쫓기듯이 순식간에 출입구로 모습을 감추었다.

슈지는 멍하니 남자가 사라진 문을 쳐다보았다. (p.58)


열흘만 살아남으면 안전하다. 즉, 죽이고자 하는 입장에서 보면 반드시 열흘 안에 슈지를 찾아내어 처리해야 한다는 말이다. 프로인 스키 마스크는 혈안이 되어 슈지를 찾을 것이다. 이번에 발각되면 끝이라고 소마는 생각했다.

“앞으로 열흘이라······.”

“벌써 자정이 지났어요.” 슈지가 말했다. “사건이 일어나고 이틀 지났으니 정확하게는 앞으로 여드래죠.”

야리미즈가 벽에 걸린 달력에 눈길을 주었다.

“4월 4일이로군.”

4월 4일.

도대체 왜 4월 4일까지 슈지를 죽여야 한다는 말인가. 4월 4일이 지나면 왜 슈지는 안전하다는 말인가. 4월 4일이라는 날짜에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 걸까······.​

세 사람이 입을 다물자 한밤을 적시는 빗소리가 갑자기 크게 들렸다. (p.153)​



 

​때는 3월. 화창한 봄의 한낮, 벚꽃이 흐드러지게 만개한 역 앞 광장에서 네 명의 희생자를 낸 무차별 살인사건이 일어난다.

검정색 헬멧을 쓰고, 검정색 에나멜 롱코트에 검정색 에나멜 장갑 그리고 마찬가지로 검정색 에나멜 부츠 차림으로 다스베이더를 떠올리게 하는 그는 자신이 가지고 온 회칼으로 광장에서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에게 손을 뻗치더니 순식간에 그 곳을 피바다로 만들어 버렸다. 무차별 칼부림 사건이 일어났다는 연락을 듣고 형사들이 현장으로 달려갔지만 범인은 이미 도주한 상태. 역 앞은 사이렌 소리에 놀라 몰려든 구경꾼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무차별 칼부림 사건은 피해자와 범인에게 접점이 없어 보통 살인 사건처럼 동기로 피의자를 가려낼 수 없기 때문에 범인이 일단 현장에서 무사히 빠져나가고 나면 미해결로 끝나는 경우가 적지 않은데 골치 아프게도 이번에는 헬멧을 쓴 범인의 맨 얼굴을 본 사람이 아무도 없기에 범인의 대략적인 나이와 국적조차 불분명하다. 초동수사에서 놓치면 이 사건은 십중팔구 미궁에 빠지는 터라 소마 형사는 범인을 찾기 위해 주변을 이잡듯이 샅샅히 뒤지고 사건 직후 얼마 지나지 않아 이어폰으로 범행현장과 가까운 길 건너편 빌딩에서 범인으로 확실시되는 남성이 붙잡혔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소마 형사가 그 곳에 도착했을 때 범인은 약물과용으로 넋이 나간 상태, 결국 진술은 들어보지도 못한 채 사망하게 되고 역 앞 광장에서 참혹한 살육극을 벌였음을 증명하는 엄청난 양의 피가 묻은 옷과 사건에 사용되어진 칼의 포장박스가 연달아 발견되면서 정황상 범인으로 체포되어 사건은 이렇게 마무리 지어진다. 하지만 유일한 생존자인 슈지는 범인이 체포되어 사건이 종결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치료를 받고 병원을 나서던 중 의문의 남성으로부터 “앞으로 열흘. 열흘만 살아남으면 안전해. 살아남아. 네가 마지막 한 명이야.”라는 수수께기같은 말을 듣게 되고 사건을 혼자서 수사하던 소마 형사는 경찰 수사에 의문을 품고 친구 야리미즈와 함께 슈지를 도와 독자적으로 사건의 진상을 파헤치기 시작한다.


 

​이 책은 <파트너>, <TRICK2>등 유명 드라마의 각본을 써온 작가 오타 아이의 데뷔작으로 각본가 출신 작가의 작품답게 한 치 앞을 예상할 수 없는 대담한 전개와 빠른 속도감으로 책을 읽는 사람을 꼼짝없이 책 앞에 붙들어 놓는다.

​시작과 동시에 일어나는 살인사건, 처음에는 그저 아무런 이유없이 무차별적으로 벌어진 살인사건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내 소마 형사와 사건의 유일한 생존자 슈지가 각각 사건을 조사하며 점점 다가갈수록 누군가 계획하고 벌인 일임이 드러나기 시작하고 한순간도 눈을 뗄 수 없을 만큼 긴박하게 ​흘러가는 이야기에 나도 모르는 사이 순식간에 빠져든다. 얼굴조차 알 수 없는 범인은 도데체 누구며, 왜 이런 일을 저지른 걸까? 그리고 피해자가 알려지지도 않은 상황에서 그가 피해자임을 알아보고 별안간 슈지에게 달려들어 앞으로 열흘만 살아남으면 안전하다고 말한 사람은 범행을 알고 있었음에도 왜 사전에 막지 못한건지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의문을 더해가고 궁금증이 극에 달할 때즘 이야기가 끝이 난다.

이게 데뷔작이라니!!! 데뷔작이 이렇게 컬리티가 높을수가 있나? 티저북이라는 특정상 내가 본 건 책의 일부분에 지나지 않지만 스토리 구성 자체가 무척이나 탄탄하고 손에 땀을 쥐게 만드는 긴장감과 순식간에 책 속으로 빨아당기는 흡입력까지 책의 완성도가 기존의 유명작가들 못지 않게 높다. 이러면 역시 정식 출간본을 살 수 밖에 없다. 이건 무조건 소장각! 책을 읽는 것도 좋아하지만 내가 좋아하는 작가를 만나게 되는 것도 책을 읽는 즐거움 중에 하나인데 오늘 그 즐거움을 찾은 것 같아 너무도 행복하다. 아직 전 권을 다 읽지도 않았는데 다음에는 어떤 작품을 내놓을지 벌써부터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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