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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이 말한다 - 세계를 바꾼 여성의 연설
이베트 쿠퍼 지음, 홍정인 옮김 / 교유서가 / 2022년 9월
평점 :
나는 연설을 무척 좋아한다. 누군가의 말이 이렇게 깊은 울림과 강한 힘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 퍽 감동적이다. 고대 그리스에서 소피스트들이 달변가가 되고 싶어 했던 것도, 직접 민주주의(제한적이었지만)의 시절에 광장에 모여 자신의 의견을 피력해야 했던 사람들이 웅변술과 수사학을 가르치고 배우는 것에 심취했던 것도 모두 이 '말의 힘'을 믿었기 때문이다. 말은 힘이 세다. 아니, 좋은 말은 힘이 세다.
하지만 막상 현대 사회에서 힘이 있는 연설을 들을 기회가 잘 없다. 국가가 위급한 상황에 처했을 때 방송에 나온 집권자가 하는 대국민 연설은 힘든 시기를 견딜 수 있게 국민의 마음을 다독여 하나로 모으기는커녕 자기변명이나 책임 회피의 얄팍한 이야기로 들리기 일쑤이다. 연설의 끝에는 섭섭한 마음이 들며 각자도생이라는 단어를 떠올리는 게 현실이다. 중고등학교나 대학의 졸업식에서 지난 노력의 가치를 인정하고 빛나는 미래를 축복해야 할 연설은 형식적이고 관습적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연설이 끝나면 우리는 환호성을 지르며 박수를 치지만 이는 연설에 대한 감사와 감동이 아닌, 지루한 연설이 끝났다는 사실에 대한 안도이다. 이는 종종 기성세대에 대한 실망을 불러일으키곤 한다. 집회나 모임에서 국회와 행사장에서, 단상에 선 사람들의 말이 진실과 신념의 이야기로 전달되지 않고 선동, 혹은 보이지 않는 폭력으로 작동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근대화 이후 우리나라 역사와 정치적 격변 등 여러 이유가 있을 텐데, 결국 좋은 말을 '듣는 귀'를 가진 이들을 기르지 못한 까닭이며, 진실과 선함의 신념을 가진 철학자를 키우지 못한 까닭이다.
이런 이유로 듣고 배우고, 생각하고 더 좋은 말을 하고 행동할 수 있도록, 그렇게 삶의 지평을 넓히고 영감을 주는 연설을 만나면 퍽 반갑다. 영국의 여성 정치인 '이베트 쿠퍼'가 엮은 <여성이 말한다>는 바로 이런 연설 모음집이다.
'여성들의 목소리는 너무나 오랫동안 열외로 취급되어왔다. 이제는 저항할 때이다. 전 세대와 전 세계에 걸쳐 여성의 공적 언어를 장려 및 토론하고 기릴 때이다.' 『여성이 말한다』의 서문은 이렇게 시작한다. 저자 '이베트 쿠퍼'는 이러한 취지로 뛰어난 여성들의 이면에 숨겨진 이야기를 전하기 위해, 독자에게 영감을 주고 더 많은 여성이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격려하기 위해 여성 연설집을 출간했다고 밝힌다.
이베트 쿠퍼는 보수적이고 남성 위주인 영국 의회에서 하원 의원을 지내는 등 소위 정치적으로 성공한 여성이다. 하지만 그녀가 그 자리에 오르기까지, 그리고 그 자리에서 여성으로서 자신의 목소리를 내며 한 인간으로서 권리를 찾고 사람들의 목소리를 대신하기까지 그 과정은 녹록지 않았다. 그녀는 힘들고 어려운 순간에 '목소리의 힘'을 믿었다. 강인하고 진실하게 자신의 목소리를 냈던 여성들의 연설에서 힘을 얻었다.
이런 이유로 그녀는 역사 속 여성들의 연설을 발굴하는 일에 몰두했다. 이 책에는 그렇게 발굴한 여성의 연설 사십 개가 실렸다. 2000년 전 고대 영국의 여왕인 '부디카'가 로마인과 최후의 전투에 출정하기 전 부족들을 상대로 한 연설을 시작으로 2020년 4월, 코로나19 팬데믹 위기 속에서 봉쇄와 단절을 거듭하는 영국 국민에게 바치는 온정적 헌사인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연설까지, 시대와 계층, 인종과 문화를 막론하고 다양한 여성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노예제 폐지 운동가 소저너 트루스, 케냐의 환경 운동가 왕가리 마타이, 극우 극단주의자에게 피살된 영국 하원 의원 조 콕스, 여자 축구의 간판 스타인 메건 러피노, 북유럽의 소녀 환경 운동가 그레타 툰베리 등, 저자는 때로는 자신이 동의할 수 없는 경우라 할지라도 진실과 신념으로 무장한 이들의 목소리를 들어줄 것을 외친다. 말하자면 이 연설집은 40명의 연설가의 목소리인 동시에 엮은이 '이베트 쿠퍼'의 목소리이기도 하고, 침묵할 수밖에 없지만 침묵하지 않으려는 수많은 사람들의 목소리인 셈이다.
학술적으로 말하자면 '연설'은 로고스, 에토스, 파토스의 합이다. 누군가의 말에 마음이 움직이기 위해서는 논리적으로 완벽하게 짜인 구조도 중요하지만, 듣는 이의 상황과 마음을 헤아릴 수 있는 공감의 능력과 표현도 중요하다. 물론, 말하는 이의 삶의 궤적이 지금 하고 있는 연설과 배치된다면 아무리 달변이라도 간사한 속임수로 전락하는 것은 한순간이다. 이 책은 각 연설가의 삶을 간략하게 소개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침묵하지 않을 용기, 목소리를 낼 수밖에 없는 이유를 독자들은 이 소개글을 통해 짐작할 수 있고, 처음 보는 연설가라고 할지라도 그 연설을 들을 준비를 갖춘다. 연설가에 대한 이베트 쿠퍼의 소개를 통해 연설가의 파토스에 설득당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책의 구성이 퍽 좋았다. 또한 대부분의 경우 연설의 전문을 싣고 있다는 점도 좋았다. 연설의 전문을 읽어야 하는 까닭은 연설이 '공적 말하기'이기 때문이다. 공적 말하기는 사적 말하기와 분명 차이가 있다. 공적인 자리에서, 많은 이를 대상으로, 공공의 목적을 위해 정제된 언어로 상대를 설득할 수 있어야 한다. 안타깝게도 우리나라 국어 교육에서는 교육과정이나 교과서의 화법 단원에서 연설 교육을 필수로 하고 있으나, 막상 학교 현장에서는 연설문을 읽고 오지선다형 시험 문제를 푸는 것에 그치고 만다. 사실 이렇게 일회적으로 연설 교육을 한다는 것에도 어폐가 있다. 우리가 교육을 받는 오랜 시간 동안, 좋은 연설을 듣고, 자신의 주장을 공적 말하기를 통해 펼치며 대중을 설득할 수 있도록, 그렇게 말의 힘을 기르는 훈련을 받아야 하는데 말이다.
아무튼 저자는 '여성의 목소리'에 방점을 찍고 있지만, 우리가 살아가며 부딪치는 벽과 어두움에도 불구하고 내일을 살아갈 희망과, 사람을 사랑할 희망과, 옳은 일을 행하기 위한 용기와 결단력을, 그리고 무엇보다 더 나은 날들을 위한 믿음을 침묵하지 않고 외친다는 점에서 이 책은 굳이 '여성'을 드러내지 않는다고 해도 충분히 공감하며 읽을만하다고 생각했다. 연설의 전문을 읽으며 그 연설 자체에서 영감을 얻는 것은 물론이고, 연설의 전략과 자질에 대해서도 공부하기에 좋다. 책의 디자인과 편집이 가볍고 부담이 없는데, 잠시 짬이 날 때, 출근길 지하철에서, 혼자 점심을 먹으며, 아무 곳이나 펼쳐 누군가의 목소리를 듣고 있으면, 이런 진지한 독서의 목적에서 벗어나 단순히 삶에 대한 영감으로 나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을 느낄 수도 있다.
아쉬운 점이라면, 첫째는 원어가 병기되지 않아서 해당 언어 그 자체의 표현과 힘을 온전히 다 느낄 수 없다는 점이다. (물론 외국어를 몰라서 병기해도 못 읽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모르는 언어여도 소리 내어 읽어볼 때 전해지는 그 느낌이 있다고 생각한다. 또한 연설은 글쓰기가 아닌, 말하기이므로, 말하는 이의 톤, 강세, 어조, 목소리의 크기 등이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겠는가!) 둘째는 40개의 연설 중 절반은 영국인의 연설, 대부분이 북미 유럽 국가의 여성들이라는 점이다. 동양인의 연설, 특히 우리나라 여성의 연설은 찾아볼 수 없는데, 이건 저자 이베트 쿠퍼의 편향성 때문이라 볼 수는 없고, 그만큼 동양 문화권에서 연설의 문화가 발달하지 못했음을 보여주는 게 아닌가 싶어 아쉬웠다. 셋째는 저자 이베트 쿠퍼의 취지가 그러한 것이지만, 사회의 취약계층으로서 여성이 겪는 문제의식을 너무 서문에서 내세우고 있어서, '여성'이 아닌 오롯이 한 '인간'으로서 수많은 갈등과 결단과 용기라는 자질이 오히려 희석된 부분이 있는 것 같다. 앞으로 우리가 살아갈 세계는 굳이 여성이라는 성별을 밝히는 것 없이도, 사회의 부조리와 부정의에 대해 이야기하고 들어줄 수 있으면 좋겠다.
* 교유당 서포터즈로 선정되어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