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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 - 나를 위한 용서 그 아름다운 용서의 기술
프레드 러스킨 지음, 장현숙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4년 2월
평점 :
품절
용서에 대해 다시 생각해볼 기회라고 기대하며 짚어든 책이지만, 결국 용서는 할 수 있는 게 아님을 확인하고 말았다.
보복보다 용서가 더 어렵다. 비근한 예로, 친부 혹은 믿은 사람에게 배신을 당하거나 아주 심하게는 여성으로서 성적 모멸감을
당했다고 가정하면, 세상을 남들처럼 살아가기 위해서는 망각이 필요하다. 그러나, 망각은 불가능한 게 사실이다. 털어내지
못한 기억과 아물지 않은 상처는 어느 때고 다시 삶을 지배하고 만다. 삶의 굴곡에서 어려울 때, 반드시 총체적으로 자신을 흔들어버리는 괴로운 기억이 튀어나와 사회 생활을 어렵게 만들 수 있다. 좋은 기억은 추억이 되지만, 잊고 싶은 기억은 병이 된다.
결국 나를 위한 선택으로 용서를 택하라는 말은, 평범한 삶이라도 영위하려거든 마음에서 아픔을 털어내라는 합리적 수단임을
책을 통해 알 수 있었다. 보복이 가능한 사회라면, 사실 그렇게 보복하여 정당한 사회를 구현하는 게 옳다. 하지만, 결코 사회는 정당한 보복을 허락하지 않는다. 법적 처벌이 전부이지, 사회적 매장이나 사회적 살인은 벌어지지 않는다. 특히, 죄책감이 없는 이상 죄를 저지른 자들이 오히려 뻔뻔히 살아가는 게 현실이자 과거의 인류 모습이다. 용서를 권하는 저자, 그리고 종교의 이념은 현실 이상을 살아갈 수 없는 유약한 개인들에게 그냥 살아라 라는 눈가리고 아웅식 설득 체계를 소개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구원을 원한다면, 사회가 법적 처벌을 강화하여 완벽히 개인이 잃은 아픔을 물리적으로나마 보복해주어야 한다. 그게 사회 시스템이자 정의라고 믿는다. 그런 사회를 만들 수 없다면, 용서가 아닌 자연법에 따라 세상의 올바른 가치를 바로잡아야 한다. 우리가 배우고 함께 사회를 만들어가는 이유는, 함께 살아가는 데 불편함이 없는 사회 시스템을 만들고자 함이다. 그런 점에서 용서는 나에게 발전보다는 안주로 다가와 받아들일 수 없는 가치가 되버렸다. 저자의 이야기, 사례, 심리적 메커니즘은 충분히 이해하고 동의하는 바지만, 용서만으로 살아가기에는 너무 미래 세대에게 무책임한 선택을 전가하는 경향이 강해 저항감을 아니 느낄 수가 없었다. 일단 용서 받을 짓을 하지 말아야겠고, 잘못을 저질렀다면 사회적으로 마땅한 대가를 치러야 한다. 용서는 개인의 선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