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를 읽는 이유 :편집자 후기 -홍인기:(중에서 )
필자는.궁금증이 생기곤 한다.
`왜 과학소설을 읽는 것일까?`미래에 대한 엄밀한 통찰력을 위해서?....(중략, 이하 괄호는 중략)
영국작가 허버트 웰즈는 the land ironclads(1903)에서 탱크를, the war in the air 에서 항공기를 이용한 폭격을, the world set free 에서 원자폭탄을 훌륭히 묘사했다.에드워드 e 헤일은 the brick moon(1869)에서 인공위성을, 키플링은 with the night mail(1905)에서 대륙간 항공우편을 에드윈 발머는 the achievements of luther trant(1910)에서 거짓말탐지기의 초창기 형태를 제시했다.그뿐이랴! 로버트A 하인라인과 델 레이, 그리고 카트밀은 1904년 초에 이미 히로시마에서와 같은 원자폭탄의 비극적인 사용을 예견했다.게다가 하인라인은 waldos 에서 믈침대와 리모트컨트롤 까지 상상해 냈을 정도이다.
사람들은 위와 같은 예를 들어가며 과학소설 작가들이 보여 주는 미래에 대한 놀라운 통찰력을 칭찬하곤 한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과학소설 작가들은 트랜지스터의 발명을 예견하지 못하였다.그 다음부터 벌어진 놀라운 혁명인 컴퓨터 역시 예측하지 못했다. 물론 그들은 로켓과 우주여행에 관해서 시대를 앞서갔다.
그러나 과학소설 작가들중 어느누구도 달에 착륙한 아폴로 11호의 모습을, 전지구인이, TV라는 기계를 통해서, 그것도 편안히 집에 앉은채 구경하리라는 것은 상상해 내지 못했다.
결국 미래의 정확한 예측을 위해서 과학소설을 쓰고 읽는 것은 무익한 것은 아닐지라도, 과학소설의 본연의 목적이나 결과는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와 과학 소설을 읽는 것일까?
너무 지엽적인 질문이라 곤란하면 시야를 좀더 넓게 잡는 것도 괜찮을 것이다.우리는 왜 소설을 읽는 것일까?
박완서, 양귀자, 조반니노 꽈레스키, 최인호, 헤밍웨이
자식을 잃은 어머니의 고통, 이 시대를 살아가는 여성의 파격적인 공격성, 각종 주의주장에 휩쌓이면서도 자신의 정체성을 잃지 않는 시골 사람의 잔잔한 인생살이, 끝없는 윤회를 떨치고 일어나는 구도자의 숨결, 그리고 잔인하리만큼 엄숙한 자연의 법칙 속에서도 꿋꿋하게 나아가는 인간의.장엄한 행진,()
그런 것들을 느끼고 싶어서 아닌가?
우리는 모든 소설, 아니 훌륭한 소설 속에서 인간의, 바로 우리 자신의 `전형`을 읽는다. `성격`을 본다. `삶`을 경험한다. 과학소설 작가들이 아무리 신기한 배경으로 색칠을 한다고 하더라도 그곳에는 항상 `인간`이 있고, `인간의 문제`가 있기 마련이다.()
모든 소설들이 길 모퉁이에 있는 할머니로부터 시작 되듯이, 과학 소설 작가들 역시 `성격`을 창조하는 것이다.그들은 과학 소설을 쓴다. 왜냐하면 자신이 얘기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도구가 바로 과학이기 때문이며, 장인은 자신에게 어울리는 도구를 아는 법이기 때문이다.(Le Guin, Ursula K.(1976), ˝Science Fiction and Mrs. Brown˝ in Science Fiction At Large, Peter Nicholls, ed., Harper and Row, pp. 15~33.)(중략)
그것은 과학소설이 독자들에게 `격렬한 지적 참여`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바로 거기에 과학 소설이 다른 문학 장르와 구별되는 독특한 성격이 숨어있다.˝가장형편없는 과학 소설조차도 격렬한 지적참여를 요구한다. 그러한 긴장은 정의상 과학소설의 대부분은 어딘가 다른 곳에서 벌어지는 사실이라는 데에서 발생한다. 어딘가 이상한 곳. 아직껏 존재하지 않았거 지금 현재에도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과학소설은 시작된다.과학소설에 첫발을 들여놓으면 독자는 한번도 본적이 없는 것을 상상해 내고, 작품안에 담긴 이정표와 단서들을 이용하여 알지도 못하는 지역을 머리 속에 그리는 급진적인 행위를 수행해야 한다.(Card, Orson Scott(1992),˝Introduction˝in Future on Fire, Tor.)
오늘날에는 셰익스피어나 움베르트 에코를 읽는 것 자체가 `힘든 노력`을 필요로 하게 되었다. 셰익스피어는 시대적으로 우리에게서 너무 멀어졌으며, 에코조차 우리가 숨쉬는 세계와는 사뭇 다른 중세라는 환경에 머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신이 꿈꾸는 `전형`과 `성격`과 `삶`을 제대로 묘사하기 위해서는.. (중략)..`과학`이 인간의 물질적인 삶뿐만 아니라 지고한 정신에까지 무시무시한 주먹을 휘두르고 있는 현실에서...(중략)...그러나 과학이 속속들이 스며든 우리 삶은 야누스적인 측면을 가지고있다. 컴퓨터는 커녕 전자 제품이 조금만 복잡해도 아예 건드리지도 않으려는 어른들, 여전히 주판을 튀기는 상인, 원고지를 메우는 작가, 빨간펜으로 직접 채점을 하고 성적을 옮겨 적는 선생님, 그 모든 이들의 마음 속에는 변화에 대한 두려움과 미래에 대한 아득한 현기증이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그뿐만 아니라...(중략) 과학이 건드리는 도미노 게임에 충격을 느끼는 것이다.
역사소설이건 과학소설이건 가림이 없이 소설은 모두 일종의 이야기 이다.
모든 소설에는 살아 숨쉬는 사람들의 희노애락이 담겨 있다. 독자들은 바로 그 때문에 소설을 읽는다.
그러나 모든 소설이 재미있고 좋은 소설이 아니듯이 과학소설도 90퍼센트는 쓰레기이다.(테오도르 스터전) 결국 우리에게는 선택의 문제가 남는다. 숱하게 쏟아지는 정보의 홍수 속애서 한정된 정력을 사용해서 골라잡아야 한다.(중략)
고등학교 수준의 과학 지식에다가 앞으로 펼쳐질 기이한 배경을 감칠맛나는 도전으로 여기는 독자라면 누구라도 과학소설을 즐길 수 있다.
그렇게 부담없이 과학소설을 읽거 내려가는 동안에 독자들은 자신도 모르게 많은 것을 얻게 된다. 지금껏 생각지도 못했던 방식으로 삶을 바라보는 눈이 있음을 깨닫게 되고, 그런 삶 속에서 인간이 어떻게 반응할 수 있는지 가늠하게 되며, 주인공들의 감정과 행동을 통해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그리하여 종국에 가서는 자신이 스스로 변화하게 되는 것이다.(중략)
편역자로서 (중략) 이건 정말 과학소설답군 하는 생각이 드는 작품을 골라내는 작업은 까다로운 것이었다 ...(중략) 열세편의 이야기를 읽고 난 독자가 과학소설에 대한 인식을 새로이 하게 되고, 기회가 닿을 경우 주저하지 않고 다시 과학소설을 접할 수 있다면 그런 고생은 감내할 만한 것이라고 하겠다..(중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