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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인 ㅣ 원전으로 읽는 움라우트 세계문학
알베르 카뮈 지음, 이정서 옮김 / 새움 / 2022년 2월
평점 :
![](https://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22/0311/pimg_7284372463337820.jpg)
기억한다. 민음사 김화영 번역가의 <이방인>을 두고 58개 항목을 오역이라며 "우리가 읽은 <이방인>은 카뮈의 <이방인>이 아니다."라는 띠지로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2014년도의 문학계를.
<이방인>의 그 유명한 첫 문장! 프랑스어 원문은 "Aujourd'hui, maman est morte."이고, 민음사 김화영 번역가는 "오늘 엄마가 죽었다."로, 새움 출판사의 이정서 번역가는 "오늘, 엄마가 죽었다."라고 해야 한다고. '오늘' 뒤에 있는 쉼표가 중요하다고.
<이방인>의 줄거리는 간단하다. 뫼르소는 양로원에서 엄마가 돌아가셨다는 연락을 받았고, 장례식을 치르고, 해수욕장에서 수영을 하고, 마리를 만나고, 이웃에 사는 레몽의 여자문제로 아랍인들과 싸우게 되고, 권총을 쏘게 된다. 뫼르소는 체포되고, 심문을 받고, 사형을 선고받게 된다.
뫼르소는 아랍인을 죽일 의도가 없었다고 말을 했지만 법정에선 아무도 믿어주지 않았고, 자신도 터무니없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태양 때문이었다는 말에 웃음소리만이 들릴 뿐이었다. 빛과 어둠에 민감한 듯 보이는 뫼르소는 거짓을 말하지는 않았다. 알베르 카뮈가 직접 미국판 서문에서 "우리 사회에서는, 자기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울지 않은 사람은 누구나 사형선고를 받을 위험이 있다."라고 얘기하고 있다. 거짓을 이야기하지 않고, 자신의 감정에 솔직한 뫼르소는 정말 죽음을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인 것일까?
1부에서 엄마의 죽음 이후에도 뫼르소의 삶은 달라지지 않았음을 보여주고 있다. 2부에서는 아랍인의 죽음 이후에 뫼르소의 삶은 법정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해석된다. 뫼르소는 마치 다른 사람의 일인 것처럼 재판 과정을 관찰하게 된다. 그리고 자신의 부조리한 삶을 받아들인다.
'부조리'는 실존주의 철학 용어로 현실에서 삶의 의미를 발견할 가능성이 없는 절망적인 한계상황을 나타내는 용어인데, 이방인이란 어떤 존재일까? 뫼르소가 느꼈을 부조리한 삶처럼, 이 지구에 왔다가 사라지는 인간은 누구나 이방인이 아닐까? 법정에서 뫼르소의 영혼까지 탈탈 털어 버리는 장면을 읽으면서 '4주 후에 뵙겠습니다.'라는 명대사를 남긴 <부부클리닉 사랑과 전쟁>이라는 드라마가 생각났다. 가장 가까웠던 두 사람이 이혼이라는 재판 과정에서 서로의 바닥까지 다 드러내 보이고서야 끝나는 이혼이라는 과정이 부조리와 낯선 이방인을 가장 잘 보여주는 이야기가 아닐까?
낯선 이방인의 감각을 키우기 위해 여행을 떠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익숙하고 자연스러운 곳이 아닌 곳에서 느끼게 되는 낯섦. 영화 <트루먼 쇼>의 세상에서 살고 있는 게 아니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COVID-19로 처음엔 매우 낯설고 불편했던 마스크를 쓰는 행동이, 이제는 마스크 없이 집 밖을 나간다는 상상조차도 할 수 없는 습관이 되어버린 시간을 살아가고 있다. 자연스러웠던 것들이 자연스럽지 않은 시대를 경험하고 있는 우리는 언제나 이방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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