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의 재판
도진기 지음 / 황금가지 / 202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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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지원도서


법정 추리물을 좋아하는 내게 『4의 재판』은 첫 문장부터 “이번엔 가슴이 먼저 답답해지겠구나” 예고하는 소설이었다. 결혼을 앞둔 지훈이 20년 지기 친구 양길과 필리핀 여행을 떠났다가 의문의 죽음으로 돌아온다. 급히 화장된 시신, 지훈 명의 사망보험금 19억의 유일한 수익자가 양길이라는 사실, 곳곳의 정황은 한 사람을 가리키는데도 법정은 번번이 멈칫한다. ‘합리적 의심이 조금도 없을’ 만큼의 증명, 그 단단한 문턱 앞에서 약혼녀 선재는 매일 방청석을 지키며 깨닫는다. 재판이 기대만큼 “정의”를 돌려주지 않는다는 것, 법은 때때로 주먹이 아니라 신호등처럼 질서를 정리하는 데 더 익숙하다는 것을.


이 작품의 반복되는 핵심은 분명하다. 직접증거 부재, 완벽한 법리 뒤에 숨는 악인, 피해자에게 쌓이는 무기력과 분노, 그리고 형사판결이 민사(보험금)로까지 이어지는 시스템의 냉정함. 작가는 20여 년 법조 경력으로 법정의 언어와 절차를 촘촘히 재현하면서도, 그 틈을 악이 어떻게 ‘도구’로 바꾸는지 보여준다. 무엇보다 매력적인 건 선재의 변화다. 법 앞에서 작아지던 사람이, 끝내 법의 논리를 거꾸로 쥐고 “다시 재판대에 세우는” 쪽으로 걸어가며 복수극의 온도를 끌어올린다.


읽는 내내 고구마처럼 답답하지만, 그 답답함이야말로 이 소설의 의도다. “법적으로 무죄인 사람은 도덕적으로도 무죄인가?”라는 질문이 마지막 장까지 따라붙는다. 법정물의 쾌감(논리 싸움, 판세 전환, 반전)을 챙기면서도, 책을 덮고 나면 씁쓸하게 남는다. 우리가 기대는 ‘법’은 정의의 얼굴을 하고 있지만, 그 얼굴을 움직이는 건 결국 인간이라는 사실을.


#4의재판 #도진기 #황금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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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작나무 숲 ANGST
김인숙 지음 / 북다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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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지원도서


버리지 못한 여자들의 시간과 비밀을 파헤치는 이야기


이 소설을 읽으면서 나는 계속 망설이게 되었다. 추리소설인 줄 알고 집었다가 사회, 가족, 여성의 시간을 통째로 읽는 느낌이었다. 이 이야기를 무섭다고 말해야 할지, 슬프다고 말해야 할지.

『자작나무 숲』에는 쓰레기가 가득한 집이 나온다. 그 쓰레기 더미에 깔려 숨을 거둔 할머니가 유튜버의 카메라에 찍히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집에 쌓여 있는 쓰레기를 치우기 전에 그 안에서 뼈와 살아있는 사람이 발견된다.

버리지 못하는 사람 곁에서, 우리는 보통 너무 서두른다. 저장 강박에 대해 이야기할 때 사람들은 종종 이렇게 말한다. “왜 저걸 못 버려?”, “도와주면 되잖아.” 그런데 『자작나무 숲』을 읽다 보니 그 말들이 얼마나 성급한 것인지 알게 된다.

이 소설 속 할머니에게 쓰레기는 물건이 아니라 시간이고, 기억이고, 말하지 못한 이야기들이다. 그래서 누군가 대신 치워버리면 집이 깨끗해지는 대신 그 사람의 삶이 통째로 부정되는 느낌이 든다.

소설 속 손녀 모유리는 할머니를 완전히 이해하지도, 완전히 도와주지도 못한다. 그 모습은 답답하고 무력해 보이지만 오히려 그래서 현실에 가깝다. 누군가를 돕는 일은 항상 뚜렷한 해결로 이어지지 않으니까.

이 소설에서 쓰레기를 치우자 비밀이 드러난다. 하지만 동시에 이런 생각도 들었다. 치우기 전에, 들어줄 수는 없었을까. 저장 강박을 겪는 사람에게 정리는 시작이 아니라 아주 마지막에 오는 일일지도 모른다.

『자작나무 숲』은 버리지 못한 게 문제가 아니라, 너무 오래 혼자였다는 게 문제였다고 이야기하는 듯하다. 그래서 더 조용히 아프다.


#자작나무숲 #김인숙 #북다 #일파만파독서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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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
장강명 외 지음 / 북다 / 202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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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지원도서


일곱 작가가 길어 올린 ‘한강’의 무지개 빛


주말의 돗자리, 치킨과 라면의 낭만, 러닝의 트랙, 퇴근길 창밖의 검푸른 물로만 보았던 한강을 매일 같아 보여도 결코 같은 물줄기일 수 없는 강으로, 일곱 작가가 서로 다른 장르의 옷을 입혀서 보여준다. 그중에서 가장 흥미로웠던

장강명의 〈한강의 인어와 청어들〉은 한강을 도시의 현실에서 미끄러뜨려, 반인반수의 세계로 데려간다. 인어와 청어의 전쟁이라는 설정은 화려하지만, 더 무서운 건 터전과 생존을 둘러싼 논리다. 누가 이 강을 가질 자격이 있는지, 누가 밀려나야 하는지, 그 질문이 판타지의 비늘 아래에서 현실처럼 반짝인다.

정해연의 〈한강이 보이는 집〉은 한강을 욕망의 프리미엄으로 만든다. 모두가 부러워하는 뷰(종묘 뉴스가 생각나는 건 나뿐일까), 그림 같은 집, 그리고 그 안에서 벌어지는 살인. 특히 '한강에는 CCTV가 없다'는 문장이 던지는 공포가 좋다. 도시가 자랑하는 공간이, 동시에 죄가 숨을 구멍이 될 수 있다는 사실. 미스터리는 사건을 추적하지만, 정해연은 그 집을 욕망의 구조로 해부한다.

차무진의 〈귀신은 사람들을 카페로 보낸다〉는 한강 변 ‘유리 카페’라는 근사한 공간을, 기묘한 군중심리와 괴담의 무대로 뒤집는다. 손님이 없던 카페가 한순간에 북적이는 이유, 젖은 머리의 여자, 그리고 어딘지 석연치 않은 흐름. 차무진 특유의 리듬은 '이상한데, 다음 문장을 안 볼 수 없게' 만든다.

박산호의 〈달려라, 강태풍!〉은 이 책에서 가장 예상 밖의 온도를 준다. 주인에게 버림받은 과거를 가진 시바견 ‘태풍’이 엄마(새 가족)를 찾아 달리는 이야기. 한강이 늘 인간의 서사만 품는 게 아니라는걸, 이 작품이 보여준다. 떠나간 존재를 찾는 마음은 종을 가리지 않고, 그 마음의 속도가 때로 가장 잔혹한 현실을 이긴다.

『한강』의 기획이 돋보이는 점은 일곱 편이 서로를 잡아먹지 않는다는 것이다. 각자의 장르가 선명한데, 한강이라는 하나의 물줄기가 느슨하게 연결하고 있다.

이제 한강을 지나칠 때 나는 예전처럼 보지 못할 것 같다. 강물의 검은 윤곽 뒤로 인어의 비늘, 유리창의 반사, 달리는 발의 리듬, 젖은 머리의 환영, 개의 숨소리, 폭염의 어지럼, AI의 안내 멘트가 겹쳐 보일 것 같다. 이 앤솔러지에 나는 감염되었다.(콜록)


#한강 #장강명 #정해연 #임지형 #차무진 #박산호 #조영주 #정명섭 #북다 #일파만파독서모임 #앤솔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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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 관찰자의 기후 노트 - NASA 과학자 이은지의 기후 특강
이은지 지음 / 한길사 / 202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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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지원도서


기후 뉴스가 하루도 조용히 지나가지 않는 시대에, 나는 다음 세대에게 어떤 지구를 건네줄 수 있을까?

아이를 키우다 보면, 이 질문은 더 이상 거창한 담론이 아니라 일상 깊숙이 스며드는 죄책감의 그림자처럼 따라온다. 그래서 『지구 관찰자의 기후 노트』를 펼쳤을 때, 마음이 먼저 조용해졌다. 막연함을 조금이라도 이해로 바꾸고 싶었던 내 마음을 책이 먼저 알아봐 주는 듯했다.

기후 위기를 공포나 도덕적 비난이 아닌, 정확한 관측을 바탕으로 차분하게 설명하고 있다. 지구 온도의 흐름, 탄소의 이동, 물의 순환처럼 우리 곁에서 늘 일어나고 있는 일이지만 제대로 알지 못했던 이야기들이 하나의 서사처럼 이어진다. NASA가 하늘에서 바라본 지구의 기록은 우리가 살고 있는 집의 ‘의무기록지’와도 같다. 아픈 이유를 알아야 제대로 돌볼 수 있듯이 말이다.

책을 읽는 동안 가장 깊게 와닿았던 문장은, 결국 기후 위기의 해답은 특별한 누군가가 아니라 ‘우리 모두’라는 사실이었다.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느리지만 꾸준한 변화가 결국 판을 바꾼다고 말해주는 그 목소리가 오래 남는다.

기후 공연을 기획하며 대중과 연결되려 했던 저자의 경험도 인상적이었다. 과학자가 느낀 마음의 빚을 예술로 풀어내려 한 그 고백은, 아이에게 미안한 마음으로 작은 실천을 시작해온 내 일상과도 닮아 있었다.

『지구 관찰자의 기후 노트』는 기후 위기를 ‘두려움의 언어’가 아니라 ‘이해와 희망의 언어’로 바꾼다.

읽고 나면 거대한 책임감 대신, 내가 할 수 있는 한 걸음부터 시작해도 괜찮다는 용기가 스며든다. 플라스틱을 덜 쓰는 습관처럼, 난방 온도를 조금 낮추는 선택처럼, 혹은 아이와 함께 나무 이름을 외우며 자연을 더 사랑하게 되는 작은 순간들처럼.

이 책은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에 이제 나의 대답은 부끄러움에 머무르지 않고, 미안함을 행동으로 바꾸는 어른이 되고 싶다. 그림자 같은 죄책감을 걷어내게 해준 책, 내게는 그런 의미였다.


#지구관찰자의기후노트 #이은지 #한길사 #일파만파독서모임 #기후노트 #기후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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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작가의 사유와 글쓰기
김보영 지음 / 디플롯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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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지원도서


김보영 작가의 책을 펼칠 때마다 느끼는 건, 차갑지 않은 상상력이다. 과학적 개념이 앞서기보다 인간과 비인간의 마음결을 끝까지 붙잡는, 특유의 따뜻한 단단함. 나는 그것을 오래 좋아해왔다. '책방소풍'에서 열렸던 북토크에서, 작가가 말하던 낮고 단단한 목소리를 한 번 듣고 난 후로는 더더욱. 그때 들었던 말들이 책 속 문장과 겹쳐 흐르는 느낌이 들어 더욱 친밀하게 읽었다.


『SF 작가의 사유와 글쓰기』는 소설이라는 세계를 살아 움직이게 하는 힘, 그리고 그 힘을 다루는 창작자의 태도를 정직하게 보여준다. SF를 규정하려 들지 않고, SF가 어떤 방식으로 세계를 확장하고 인간을 바라보게 만드는지, 작가가 직접 체화한 방법을 통해 보여준다.


“당신이 한껏 자유로워진다면 그 글은 어쩌면 SF에 가까워질지도 모른다.”

마음을 움직이는 것에서 출발하고, 그 관심을 자유롭게 따라가라는 것. SF는 ‘모르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에서 태어난다고.


작가가 강조하는 ‘주설정’ 개념도 흥미롭다. 그의 소설에서 배경이 단순한 무대가 아니라 또 하나의 주인공처럼 작동했던 이유가 설명된다. 《저 이승의 선지자》의 세계관이나 《종의 기원담》의 감각은 바로 이 설정이 인물과 함께 서사를 이끌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두 자신의 삶이라는 설정 안에서 살아가는 존재이기도 하기에, 이 설명은 묘하게 현실과도 겹쳐진다.


가장 짜릿했던 부분은 ‘뻔뻔하게 틀리라’는 조언이었다. 핵심은 과감하게 틀리되, 나머지는 철저히 엄밀하라는 것. SF의 쾌감이 바로 이 대비에서 온다는 설명은 작가의 작품을 떠올릴수록 고개가 끄덕여졌다.


또 하나 중요한 비책은 이중 스토리라인이다. 과학적 서사와 감정의 서사를 동시에 흐르게 하여 독자를 끝까지 붙잡는 방식. 〈인터스텔라〉의 부성애가 블랙홀의 과학만큼 강렬했던 이유처럼, 김보영의 작품도 언제나 감정의 줄기를 잃지 않는다.


삶도 소설과 닮아 있다. 정답을 말하려 하기보다, 하루하루의 디테일이 결국 세계를 만든다. 작가의 이 조언은 단순한 창작론을 넘어, 세계와 다시 연결되는 방식에 대해 속삭이는 듯했다.


오랫동안 김보영 작가를 사랑해온 독자로서, 이 책은 ‘어떻게 쓸 것인가’를 가르치는 책이 아니라, ‘어떻게 다시 살아볼 것인가’를 조용히 묻는 책이었다.



#SF작가의사유와글쓰기 #김보영 #디플롯 #일파만파독서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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