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녀, 여자, 다른 사람들
버나딘 에바리스토 지음, 하윤숙 옮김 / 비채 / 2020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앰마

도시를 가로지르는 수로 옆 산책로를 따라 걷는다, 수로를 천천히 지나는 이른 아침의 바지선 몇 척

.

이 책은 소녀, 여자, 다른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다. 총 12명의 인물(여자)들의 이야기로 각자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어떤 삶을 추구하는지에 대한 서로 다른 견해들을 알 수 있다. 서로 연관이 없어 보이는 사람들은 한 명씩은 서로의 삶에 깊이 영향을 미치는 존재로 남아있다. 그리고 이 책에 나오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앰마의 희곡 <다호메이의 마지막 여전사> 첫 공연에서 만나게 된다.

.

 뭐랄까. 책을 덮은 후 과연 내가 이 책에 대한 감상을 잘 쓸 수 있을지 걱정부터 앞섰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우선 나는 이 책을 너무 오랫동안 읽었다. 원래 문장 구조 형식에 맞지 않는 문장들과 마침표가 없는 글들은 잘 읽혀지지 않았다. 하지만 읽다보면 이런 문장 형식들은 눈에 보이지도 않을 만큼 스토리에 빠져들었다. 그래서 이 책을 읽는데 이주 정도 걸렸지만 처음 앰마 이야기를 읽은 시간이 일주일 정도고 다른 11명 사람들의 이야기를 읽은 시간은 일주일도 채 걸리지 않았다.

 그리고 이 책은 그 어떤 책보다 줄거리를 쓰기가 쉽지 않았다. 어느 누구하나 주인공이 아닌 사람 없이 12편의 단편소설을 모아놓은 소설집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12명은 묘하게 다 연결되어 있었다. 앞에서 나왔던 인물들이 다시 소개될 때는 반가운 마음마저 들었다. 

 참 어려운 책이었다.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여성으로써 나는 어떤 마음을 가지고 살아야 하는지 혼란스러울 때가 많았다. 이 책은 그 혼란스러움에 답을 내려주기보다는 더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수용하기 힘든 것들도 있었다. 여기 나오는 몇몇의 사람들도 단지 백인이라는 이유로 그들의 속성을 판단하기에는 지나친 경계이지 않나? 이미 차별받지는 않을까 백인들의 시선과 행동을 크게 의식하는 것은 그들이 과민하다고 볼 수 있지는 않은가? 하지만 책을 점점 읽으면서 느낀 건 이는 내가 감히 판단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었다는 점이다. 물론 나도 흔히 백인들 입장에서 말하는 유색인종이긴 하지만 (유색인종이라는 말도 참 이상하다.) 과거 유럽인들이 침략국의 흑인들에게 했던 만행들을 단 10%도 알 수 없을 것이다. 선대의 선대에서부터 어떤 수모를 겪어왔는지 들어왔을 사람들은 더 상처받거나 더 무시 받지 않기 위해서였을지도 모른다. 당장에야 나도 유럽이나 미국에 가면 아시아에서 온 이방인으로 낯선 눈빛을 받지 않을까 걱정되는데. 

 이 책은 여기서 몇 단계 더 들어간다. 흑인 ‘여성’을 통해 인종 차별에 더해 성차별에 대해 말하고 흑인 여성 ‘성소수자(즉 레즈비언)’를 통해 성적 취향에 차별받는 사람들의 삶도 이야기한다. 소수자 중에서도 소수자인 그녀들의 이야기를 읽을 때마다 나 역시 아직까지 그들을 완전히 이해하고 있지 않았다는 사실과 나도 모르게 그들을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있다는 사실에 많이 부족하다는 점을 느꼈다. 그들은 그들이다. 그들은 우리의 이해를 요구하지 않을 것이다.

 전반적인 이야기들은 소름이 끼칠 정도로 앞뒤 문맥과 등장인물들의 관계들이 견고하게 짜여있었다. 다만 굳이 이런 설정까지 넣었어야 했을까. 괜히 이 책이 말하고 있는 본질을 잠시나마 흐리게 만드는 게 아닐까 하는 부분이 있었다. 윈섬과 레녹스의 이야기였다. 음... 내가 모르는 작가의 의도가 있겠지 하고 넘어갔지만 여전히 의문스럽다.

 이 책은 내 생각 쓰기가 참 조심스러운 이야기였다. 나도 모르는 것이 많기에 나의 글이 어떤 사람에게는 상처가 될 수도 있고 아무렇지 않다고 여겼던 대목이 이 글을 읽는 어떤 이의 눈에는 무지하다고 느껴질 수 있을 거란 생각에 글 한 문장을 쓸 때마다 써도 되는 글인지 고민했다. 혹시나 그런 부분이 있다면 내가 또 더 배울 수 있게 알려주셨으면 좋겠다.

 이 책이 세상에 나와서 수많은 극찬을 받은 사실 자체가 세상이 많이 바뀌었다는 증거가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역시나 이런 책이 나왔다는 것은 이런 이야기가 공감을 많이 샀다는 뜻도 될 수 있다. 이런 이야기의 책이 나오지 않는 세상(좋은 쪽으로)이 올 수 있을까.

.

그렇다면 네가 그들과 이야기를 해야지, 돔, 페미니즘의 지형을 바꿔놓는 여자들이 더 많아지고, 보통 여자들의 행동주의가 들불처럼 번지고, 수백만의 여자가 깨어나 완전한 권리를 지닌 인간으로서 우리 세계의 주인 자리를 찾는 가능성에 눈을 뜬다는 건 축하할 일이야

우리가 어떻게 이걸 반박할 수 있겠어?

.

둘이 함께 존재하는 것.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내일을 위한 내 일 - 일 잘하는 여성들은 어떻게 내 직업을 발견했을까?
이다혜 지음 / 창비 / 2021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처음 이 책을 읽고 싶었던 건 이 책을 설명해주는 한 줄 때문이었다. ‘일 잘하는 여성들은 어떻게 내 직업을 발견했을까?’ 취업을 준비하는 요즘 하고 싶은 일이 있고 그 일이 정말 내가 하고 싶은 일이라고 믿고 있지만 아직까지 생각이 불안정한 상태에서 내가 가져야할 마음가짐은 무엇인지, 혹은 새로운 선택을 할 수 있지 않을지에 대해 힌트를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특히 인터뷰이 중에 정세랑 작가님과 이수정 교수님이 계셨다는 것도 이 책을 읽고 싶은 이유 중 하나였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계신 정세랑 작가님, 그리고 최근 알게 된 매우 멋있다고 생각한 이수정 교수님의 ‘내 일’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물론 살아온 시대가 다르긴 하지만 지금 현재, 그리고 앞으로의 미래를 같이 살아갈 여성으로써 어떤 조언을 얻을 수 있을지 궁금했다. 

 역시 정세랑 작가님의 인터뷰가 가장 기억에 남았다. ‘안 되면 되는 길로 간다.’ 고등학생 때부터 무조건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할 거라고 다짐했다. 지금도 딱히 그 다짐이 바뀐 건 아니지만 해가 지나면 지날수록 내가 고집만 부려서 될 일인가 하는 의문을 가지기 시작했다. 내가 하고 싶은 일과 잘 할 수 있는 일은 다르기 때문에 고민을 하고 있었는데 이 인터뷰를 읽고 난 후 가장 기억에 남는 말은 ‘큰 테두리’였다.

 “수정한 방향이 자기한테 더 잘 맞을 수도 있거든요. 글을 쓰겠다면, 글을 쓴다는 정도만 정해 두고 어떤 형식이나 장르가 맞는지는 있는 힘껏 다양하게 접해 보고, 분위기가 나쁘면 옆으로 옮기고 옆으로 옮기고…….

……

그렇게 옮겨 다니는 걸 별로 두려워하지 않으셔도 될 것 같아요. 제 세대보다 앞으로의 세대는 옮겨 다닐 일이 더 많지 싶고요. 매체 환경이 바뀌니 그 역시 변수가 되겠죠. 큰 테두리! 큰 테두리만 생각하면 돼요.”

 인터뷰형식으로 쓰인 글이라 작가님이 말하는 그대로를 들을 수 있어서 더 와 닿았다. 나는 새로운 도전을 조금 두려워하고 정해진 틀에 벗어나는 걸 꺼려하는 성격이다. 그래서 고등학생 때 정했던 꿈을 쉬이 바꾸고 싶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바꾸고 싶지 않았던 건지 다른 새로운 환경을 알아보기 두려웠던 건지 모르겠지만 그렇게 오랜 시간동안 한 직업을 꿈꿔왔다. 하지만 이번 정세랑 작가님의 인터뷰를 보고 나는 가고 싶은 직장이 아닌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해보게 됐다. 큰 테두리.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해야만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난다면 더 좋은 경험을 많이 할 수 있겠구나, 생각하게 됐다.

 앞서 말했던 것처럼 이 책에 더 관심이 갔던 이유는 정세랑 작가님과 이수정 교수님이었지만 읽으면서 목표가 선명하다해도 모든 일이 순탄하게 진행되지 않는다는 점, 세상은 코로나 19처럼 뜻밖의 일로 현실의 벽에 부딪힐수도, 아니면 새로운 활로를 찾을 수도 있다는 점 등 더 많은 여성들의 조언을 들을 수 있었다. 읽으면 읽을수록 나만 이런 고민을 하고 있다는 게 아니라는 사실이 또 다른 한편으로 위로가 되었다. 이 책에 나온 여성들이 그리 해왔고, 해오는 것처럼 나도 이런 고민의 성장이 이 책의 미래 인터뷰이가 될 수 있도록 되었으면 좋겠다. 


★창비에서 책을 제공 받았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고양이를 버리다 - 아버지에 대해 이야기할 때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가오 옌 그림, 김난주 옮김 / 비채 / 2020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아버지에 대해 기억하고 있는 것.

.

 이 글은 일본에서도, 한국에서도 너무나 유명한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가 썼다. 처음 이 책을 접했을 때 제목이 어마무시해서 처음에는 딱히 읽어보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 ‘아버지에 대해 이야기할 때’라는 부제를 단 것을 보면 아마 작가가 아버지에 대해 이야기를 한 것 같은데 아버지와 함께 고양이를 버리러 갔던, 어렸을 적 한 생명을 버렸을 때의 마음이 어땠는지, 그리고 그의 아버지가 그만큼 동물에 대해 무심했는지에 대한 설명이 적혀있을 줄 알았다. 오히려 이런 생각을 했다는 것이 작가에게 미안할 만큼 우려스러운 이야기는 아니었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어렸을 때 아버지와 함께 고양이를 버리러 간 적이 있다고 하면서 말을 꺼낸다. 한 생명체를 버렸다는 것에 대한 트라우마를 말하려 하는 것이라고 짐작했지만 전혀 아니었다. 그 당시만 해도 고양이를 버리는 것은 흔했다고 한다. 결과적으로 아버지와 하루키는 먼 길을 가서 고양이를 해변에 두고 집 현관문을 열었다. 그 때 분명 버린 고양이가 눈 앞에 있었다. 그의 아버지는 놀란 표정을 짓다가 이내 안도의 표정을 짓고 계속 키우기로 한다. 내가 생각하던 이야기가 아니란 걸 글 초반에 알아서 마음이 편했다. 그리고 그의 아버지가 고양이에 자신의 모습을 투영했다는 사실도 내 마음을 안심시켰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1949년생으로 그의 아버지는 일본이 엄청난 야망을 전쟁을 통해 드러낼 시기에 살고 있었다. 실제로 그의 아버지는 난징대학살을 일으켰던 부대에서 군복무를 했다. 내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글이 좋아진 이유. 그는 일본 역사에 대해 냉철하게 바라봐야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하루키는 그의 소설 ‘기사단장 죽이기’에서도 난징 대학살에서의 일본군 만행을 고발했다. 이 때문에 일본에서는 ‘일본을 매도한 이기심’이라며 비판을 받았다. 이에 하루키는 “역사란 한 나라의 집합적인 기억이니, 과거의 것으로 치부해 잊어버리거나 다른 것으로 대체하는 것은 아주 잘못된 일이다. 역사 수정주의자에 맞서 싸워나가야 하며, 소설가가 할 수 있는 일은 이야기라는 형태로 싸워나가는 것뿐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일본 작가에 관련해서는 혐한 작가라는 단어들만 듣다가 이런 일본 작가가 있다는 거에 놀랐다. 그리고 그의 이런 의지는 이 책에서도 잘 드러난다.

 이 책의 마지막 목차, 작가 후기에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역사는 과거의 것이 아니다. 역사는 의식의 안쪽에서 또는 무의식의 안쪽에서, 온기를 지니고 살아있는 피가 되어 흐르다 다음 세대로 옮겨가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여기에 쓰인 것은 개인적인 이야기인 동시에 우리가 사는 세계 전체를 구성하는 거대한 이야기의 일부이기도 하다.” 나는 시대적 배경이 일제강점기나 한국 근현대사인 작품들을 보기를 꺼려한다. 그런 드라마나 영화, 책들을 보고나면 적어도 3일 간은 마음이 좋지 않았고 먹먹해서 머리가 아팠다. 보는 동안에도 작품으로 너무 빠져들어 감정에서 헤어나오지 못할 것이 두려워 일부러 집중하려하지 않은 채 보기도 했다. 역사적 사실에 대해 알아야 하고 정의롭고 용기있는 분들의 행동에 깊게 감사드리며 그 역사를 직면해야 한다는 도리는 충분히 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내가 너무 힘들어서 볼 수 없었다. 하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그랬던 내 자신이 얼마나 부끄러웠는지 모른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란 없다.’라는 말을 드디어 이해할 수 있었다. 내가 지금 살고 있는 편한 세상은 그 분들의 용기와 적극적인 행동이 아니었다면 가질 수 없는 것이었다. 나는 그냥 거저 얻은 것이므로 감사함과 역사적 사실만 잊지 않으면 되는 일인데 그 조차 하지 않으려고 했다는 게 참 부끄러웠다.

 이번 년도에 읽은 수필, 에세이 중에 가장 내 머리를 울렸고 큰 깨달음을 준 책이 이 책이라고 자부할 수 있다. 책은 작고 얇고 가볍지만 그 책이 나에게 안겨준 생각은 결코 작지 않았다. 작은 책 하나가 살아오면서 굳혀진 인식을 순식간에 바꿀 수 있다는 사실을 이 책을 통해 알게 되었다. 

.

어쨌거나 아버지의 그 회상은, 군도로 인간을 내려치는 잔인한 광경은, 말할 필요도 없이 내 어린 마음에 강렬하게 각인되었다. 하나의 정경으로, 더 나아가 하나의 의사 체험으로, 달리 말하면, 아버지 마음을 오래 짓누르고 있던 것을 -현대 용어로 하면 트라우마를- 아들인 내가 부분적으로 계승한 셈이 되리라. 사람의 마음은 그렇게 이어지는 것이고, 또 역사라는 것도 그렇다. 본질은 ‘계승’이라는 행위 또는 의식 속에 있다.

.

그리고 죽음에 대해서 생각하고, 저 먼 아래, 눈앞이 어질어질해지는 지상을 향해 수직으로 내려가는 어려움에 대해 생각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1931 흡혈마전
김나경 지음 / 창비 / 2020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그는 더 이상 자신의 능력을 의심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

 진화여자고등보통학교에 갓 입학한 열 네 살 ‘희덕’은 희덕을 공부시키라는 할아버지의 유언으로 전주에서 경성으로 올라올 수 있었다. 때는 1930년대, 독립운동으로 인해 일제의 탄압은 더 심해지고 학교에선 조선에 관한 것은 전혀 배울 수 없었으며 민족이라는 단어조차도 쓰지 못했다. 조선인 여학생 멸시가 심하던 아키마 사감이 나간 자리에 새로 들어온 조선인 여성 ‘계월’은 아이들에게 무관심한 듯하나 사소한 것 하나하나 신경 쓰지 않는 계월 덕에 여학생들은 그녀들을 옭아매던 올가미가 잠시 풀어진 것을 느낀다. 희덕은 사감실에 갔다가 가죽 수첩을 발견하고 이걸 몰래 읽어보려다 계월이 사람 피를 마시는 걸 보게 된다. 아무한테도 말할 수 없고 말해도 아무도 그녀의 말을 들어주지 않아 희덕은 혼란스럽다. ‘계월’은 정말 책에서만 보던 흡혈마인 걸까? 인간이 아닌 흡혈마라면 이 사실을 사람들에게 알려야 하는 게 아닐까?

.

 올해 의도치 않게 흡혈귀에 관련된 작품들을 많이 읽어본 것 같다. 진짜 흡혈귀가 나오진 않지만 범행수법이 흡혈귀처럼 피를 빨아먹는 것이었던 요 네스뵈의 형사 해리 홀레 시리즈의 최근 작품 ‘목마름’, 이번 책과 비슷하게 일제강점기시대의 흡혈귀 이야기를 그려낸 네이버 웹툰 홍작가의 ‘현혹’, 그리고 이번 김나경 작가님의 ‘1931 흡혈마전’. 아무래도 ‘목마름’은 진짜 흡혈귀의 내용은 아니기 때문에 이번 책을 읽으면서 자연스럽게 웹툰 ‘현혹’을 많이 떠올리며 읽게 됐다. ‘현혹’과 ‘1931 흡혈마전’은 모두 여자 흡혈귀가 주인공이 되어 나온다. 그리고 보통 흡혈귀하면 부정적인 인식이 강한 반면 이 두 작품의 여자 흡혈귀들은 피를 마셔야 이성의 끈을 붙잡고 살아갈 수 있는 그녀들의 삶에 한탄하고 그녀들을 그렇게 만든 이들을 원망하며 그들이 할 수 있는 한 흡혈귀로부터 인간들을 보호하려 애쓴다. 자신들과 같은 불행을 겪게 하지 않기 위해서. 물론 작품 내 설정 상 다른 점이 더 많고 각각의 흥미요소가 달랐지만 이런 큰 공통점으로 연계되어 두 작품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저번 창비 장르 소설인 ‘스노볼’을 재밌게 읽었던 터라 이번 작품도 기대를 많이 했다. 기대를 한 것에 비해 책 속으로 빨려 들어갈 듯한 흡입력은 부족했으나 역시 장르소설답게 새로운 이야기를 하나 읽은 것 같아 흥미로웠다. 이 작품의 두 주인공인 여학생 ‘희덕’과 흡혈마 ‘계월’의 유대도 보기 좋았다. 특히 일제시대에 많은 것이 억압되고 조선 남자들에 의해서도 은연 중에 무시 받지만 이에 굴하지 않고 그녀들의 목소리와 계몽의 의지를 느낄 수 있어서 책에 나오는 등장인물들이 다 멋있어보였다. 시대 설정이나 묘사에 대해서는 머리로 충분히 그려질 만큼 세세한 것도 이 작품의 장점이었다.

 그러나 스토리 진행은 이 모든 설정에 비해 아쉬웠다. 책의 중반부까지는 재밌게 읽어나갔다. 희덕이 어떤 인물인지, 경애는 어떤 인물인지, 계월은 어떤 인물인지에 대해서 하나하나 알아갔고 책이 진행되는 배경이 어떠한지 이해를 빨리 할 수 있었다. 그렇게 읽어나가던 중 책의 남은 양을 보고 조금 걱정이 되었다. 벌써 이만큼 밖에 남지 않았는데 후반부에 너무 빨리 전개가 되는 건 아닐까? 우려하던 것이 현실이 될 만큼은 아니었지만 역시 이 아쉬움이 가장 컸다. 발단과 전개는 좋았지만 너무 기대를 해서인지 위기, 절정은 생각보다 빠르게, 그리고 긴박감 없이 진행되었다. 그래서 책을 다 읽었을 때는 아쉽고 약간 허무하다는 감상을 지울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 때 당시 여학생들의 학교 생활과 그녀들이 받았던 시선, 그리고 그 시선에 굴하지 않고 스스로 자신의 가치를 찾아내는 식민지 여성들의 모습을 볼 수 있어서 좋았다. 김나경 작가님의 다음 작품이 기대된다. 

.

“하지만 아까 이야기는 다시 생각해 보게. 돈을 누가 전한단 말인가? 그 사람이 정말 믿을 만한 사람인지, 아닌지는 지아비가 누구인지를 보고 알 수 있는 법이네.”

“그 사람은 지아비가 없습니다.”

“보증해 줄 사람이 없다라……. 그렇다면 누구의 딸인고?”

희덕이 대답했다.


“그분은 단지 그 자신일 뿐이에요.”

.

그리고 살짝 미소를 지은 채, 새의 너울거리는 움직임이 작아져 더 이상 눈에 보이지 않을 때까지 지켜보았다.







창비에서 책을 제공 받았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스노볼 (양장)
박소영 지음 / 창비 / 2020년 10월
평점 :
절판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할머니가 두툼한 퀼트 이불을 무릎에 덮고 거실에서 텔레비전을 보고 있다.

.

스노볼. 겨울 평균 기온이 영하 41도로 꽁꽁 얼어붙은 세계에서 스노볼은 유일하게 따뜻함을 유지하고 있는 지역이다. 스노볼에 사는 사람들은 액터라고 불리며, 액터의 삶은 리얼리티 드라마로 편집돼 만천하에 방송된다. 스노볼이 아닌 차갑디 못해 시린 바깥 세상에 살고 있는 전초밤은 스노볼의 디렉터를 배출해 내는 최고 교육 기관인 필름 스쿨에 진학하는 것이 꿈이다. 물론 이미 떨어진 전적이 있지만 포기하지 않는다. 그런 초밤에게 어느 날 초밤이 가장 존경하는 디렉터 차설이 그녀에게 찾아온다. 차설이 그녀를 찾아온 이유는 바로 닮다 못해 똑같이 생긴 스노볼의 최고 인기 스타 고해리를 대신 해달라는 것. 초밤은 그렇게 사랑 받는 해리가 하루밤에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실과 자신이 그 해리의 삶을 살아가달라는 차설의 부탁에 혼란스러워진다. 하지만 해리의 역할을 수행하여 아름답게 차설의 드라마가 마무리 된다면 필름 스쿨에 입학할 수 있게 도와준다는 차설의 말에 초밤은 해리가 되기로 결심한다. 생각보다 스노볼의 삶은 낭만적이지 않았다. 딱딱한 가족관계지만 카메라가 켜지면 돌변하는 사람들, 모두가 카메라에 찍히고 있다는 의식에 비롯된 행동, 하지만 역시 따뜻한 스노볼에서 사는 것은 행복한 일이다. 어느 날 잠시 카메라가 꺼졌을 때 전화 한 통이 결려온다. “안녕.” 이 목소리는.. 설마.. 고해리?

.

어렸을 때 눈의 여왕이라는 동화를 참 좋아했다. 생각해보면 줄거리조차 자세히 기억나지 않는 동화였지만 그 특유의 차갑고 냉정한 겨울 분위기의 묘사가 어린 나이였을 때 계속 맴돌았던 것 같다. 그렇게 스노볼은 나에게 차가운 겨울 분위기를 상상하게 해준 두 번째 책이 되었다.

겨울에는 영하 40도가 되는 세상에 유일하게 따뜻한 곳은 스노볼. 스노볼에 사는 액터들은 바깥 세상에 사는 사람들보다 얻을 수 있는 것이 많았다. 마치 봉준호 감독의 영화 설국열차와 비슷했다. 살이 튿어질 거 같은 추위에 매일같이 발전소로 일을 나가는 사람이라면 하루에 몇 백번이고 스노볼에 가고 싶다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기회는 쉽게 오는 것이 아니다. 그렇기에 전초밤은 차설의 제안이 너무 달콤했을 것이다. 안 된다는 건 알지만 마시고 싶은 독이 든 성배 같은 게 아니었을까. 그렇다고 초밤이 자신의 꿈만 생각한 아이는 아니었다. 추운 날씨에 힘들게 발전소에서 일하고 있는 엄마와 쌍둥이 오빠 온기에게 스노볼에서의 맛있는 음식과 진귀한 물건들을 보낼 수 있다는 생각은 그녀가 결정을 더 빨리 내리게 도와주었다. 아마 나라도 초밤이와 같은 선택을 하지 않았을까?

전초밤은 어색하지 않게 고해리에 스며들었다. 계속해서 전초밤의 모습을 지우고 고해리로 변해가는 모습이 눈의 여왕에서 기억을 잃은 채 새로운 자리에서 살아가는 카이와 게르다를 떠올리게 했다. 카메라가 돌아갈 때만 따뜻한 가식적인 할머니와 엄마. 거울을 통해 알게 된 스노볼의 이면. 하지만 이상적인 스노볼의 생활에 점점 적응해가던 초밤은 모든 이들이 자신에게 호응하고 관심을 보이는 삶을 두 번 다시 이룰 수 없다는 생각에 스스로가 고해리가 되기로 결정했다. 이 대목을 읽으면서 자연스럽게 현재 스노볼과 비슷한 생활을 하고 있는 연예인들의 삶이 떠올랐다. 연예인이 아니기 때문에 그들의 삶을 감히 판단할 수 없지만 수많은 카메라 앞에 모든 사람들을 의식해야 하는 그들은 많은 명예와 돈을 손에 얻었지만 행복해 보이는 사람은 극소수였기 때문에 그들은 연예인을 선택한 걸 후회한 적은 없었을까 몇 번 생각해본 적이 있다. 안타까운 일들을 뉴스로 접하면서 역시 연예인의 삶은 쉽지 않다고 늘상 생각해왔는데 초밤이에게 이입해서 읽고 있던 터라 스노볼의 화려한 모습에 쉬이 결정을 내린 초밤을 말리고 싶었다.

결국 초밤이 차설의 계획을 눈치채고 또 다른 고해리인 명소명을 만나러 간다. 어렵사리 만난 명소명은 이미 차설에게 초밤과 같은 제안을 받았었다. 하지만 그녀는 내가 왜 고해리로 살아요, 난 명소명인데.” 라고 말하며 차설을 따라가지 않았다. 명소명이 내뱉은 한 마디는 전초밤도 물론이고 나에게 일침을 날리는 듯 했다. 항상 나보다 잘난 사람을 보면서 나는 왜 저렇게 되지 못할까. 저렇게 되고 싶다. 따라가고 싶다. 라고 생각했는데 소명의 말처럼 그 사람은 그 사람이고 나는 나였다. 나는 나만의 재능과 하고 싶은 일을 하면 되는 거였는데. 마음만 조급하고 불편했던 나를 알아보는 듯 이 문장이 유독 크게 들어왔다.

사실 아직 이해가 가지 않는 대목들이 있다. 이본 미디어 그룹의 속셈, 외전에 나왔던 화자의 정체, 그리고 스노볼의 미래 등 더 궁금한 이야기들이 많았지만 책의 마지막장은 이미 끝난 뒤였다. 명쾌한 결말로 끝나지 않아서 조금 아쉽긴 했지만 오랜만에 동화의 환상을 불어넣어준 기분 좋은 이야기를 하나 읽은 기분이다.

.

그 애도 너랑 비슷했어. 내가 별을 쥐여 주니 별이 자기 손을 찌른다고 징징거렸지. 배가 불러 죽은 거고, 행복에 겨워 익사한 거야. 그러니까 쓸데없는 죄책감에 휘둘리지 마.”

행복에 겨워 죽음을 결심하는 사람도 있나요?”

쿠퍼의 드라마가 왜 재미있었는지 아니?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바이애슬론 챔피언 자리를 오 년 연속으로 꿰차고 있으면서도 사람을 죽였다는 죄책감에 불행해했거든. 그리고 사람들은 그 모습에 공감했어. 인간은 행복 속에서도 불안과 불행을 찾는 데 선수니까. 본능적으로 쿠퍼 라팔리에게서 자기 자신을 본거야.

모두가 부러워하는 삶을 살아 볼 수 있는 기회를 얻어 놓고 쓸데없는 걱정만 하고 있는 너처럼, 그 애도 자꾸만 불행을 찾아 다녔어. 그러지 말라고 아무리 설득해도 소용이 없었지.”

.

그때, 누군가 방문을 두드렸다.

 

창비에서 책을 제공 받았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