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1 흡혈마전
김나경 지음 / 창비 / 2020년 12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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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더 이상 자신의 능력을 의심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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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화여자고등보통학교에 갓 입학한 열 네 살 ‘희덕’은 희덕을 공부시키라는 할아버지의 유언으로 전주에서 경성으로 올라올 수 있었다. 때는 1930년대, 독립운동으로 인해 일제의 탄압은 더 심해지고 학교에선 조선에 관한 것은 전혀 배울 수 없었으며 민족이라는 단어조차도 쓰지 못했다. 조선인 여학생 멸시가 심하던 아키마 사감이 나간 자리에 새로 들어온 조선인 여성 ‘계월’은 아이들에게 무관심한 듯하나 사소한 것 하나하나 신경 쓰지 않는 계월 덕에 여학생들은 그녀들을 옭아매던 올가미가 잠시 풀어진 것을 느낀다. 희덕은 사감실에 갔다가 가죽 수첩을 발견하고 이걸 몰래 읽어보려다 계월이 사람 피를 마시는 걸 보게 된다. 아무한테도 말할 수 없고 말해도 아무도 그녀의 말을 들어주지 않아 희덕은 혼란스럽다. ‘계월’은 정말 책에서만 보던 흡혈마인 걸까? 인간이 아닌 흡혈마라면 이 사실을 사람들에게 알려야 하는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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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올해 의도치 않게 흡혈귀에 관련된 작품들을 많이 읽어본 것 같다. 진짜 흡혈귀가 나오진 않지만 범행수법이 흡혈귀처럼 피를 빨아먹는 것이었던 요 네스뵈의 형사 해리 홀레 시리즈의 최근 작품 ‘목마름’, 이번 책과 비슷하게 일제강점기시대의 흡혈귀 이야기를 그려낸 네이버 웹툰 홍작가의 ‘현혹’, 그리고 이번 김나경 작가님의 ‘1931 흡혈마전’. 아무래도 ‘목마름’은 진짜 흡혈귀의 내용은 아니기 때문에 이번 책을 읽으면서 자연스럽게 웹툰 ‘현혹’을 많이 떠올리며 읽게 됐다. ‘현혹’과 ‘1931 흡혈마전’은 모두 여자 흡혈귀가 주인공이 되어 나온다. 그리고 보통 흡혈귀하면 부정적인 인식이 강한 반면 이 두 작품의 여자 흡혈귀들은 피를 마셔야 이성의 끈을 붙잡고 살아갈 수 있는 그녀들의 삶에 한탄하고 그녀들을 그렇게 만든 이들을 원망하며 그들이 할 수 있는 한 흡혈귀로부터 인간들을 보호하려 애쓴다. 자신들과 같은 불행을 겪게 하지 않기 위해서. 물론 작품 내 설정 상 다른 점이 더 많고 각각의 흥미요소가 달랐지만 이런 큰 공통점으로 연계되어 두 작품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저번 창비 장르 소설인 ‘스노볼’을 재밌게 읽었던 터라 이번 작품도 기대를 많이 했다. 기대를 한 것에 비해 책 속으로 빨려 들어갈 듯한 흡입력은 부족했으나 역시 장르소설답게 새로운 이야기를 하나 읽은 것 같아 흥미로웠다. 이 작품의 두 주인공인 여학생 ‘희덕’과 흡혈마 ‘계월’의 유대도 보기 좋았다. 특히 일제시대에 많은 것이 억압되고 조선 남자들에 의해서도 은연 중에 무시 받지만 이에 굴하지 않고 그녀들의 목소리와 계몽의 의지를 느낄 수 있어서 책에 나오는 등장인물들이 다 멋있어보였다. 시대 설정이나 묘사에 대해서는 머리로 충분히 그려질 만큼 세세한 것도 이 작품의 장점이었다.

 그러나 스토리 진행은 이 모든 설정에 비해 아쉬웠다. 책의 중반부까지는 재밌게 읽어나갔다. 희덕이 어떤 인물인지, 경애는 어떤 인물인지, 계월은 어떤 인물인지에 대해서 하나하나 알아갔고 책이 진행되는 배경이 어떠한지 이해를 빨리 할 수 있었다. 그렇게 읽어나가던 중 책의 남은 양을 보고 조금 걱정이 되었다. 벌써 이만큼 밖에 남지 않았는데 후반부에 너무 빨리 전개가 되는 건 아닐까? 우려하던 것이 현실이 될 만큼은 아니었지만 역시 이 아쉬움이 가장 컸다. 발단과 전개는 좋았지만 너무 기대를 해서인지 위기, 절정은 생각보다 빠르게, 그리고 긴박감 없이 진행되었다. 그래서 책을 다 읽었을 때는 아쉽고 약간 허무하다는 감상을 지울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 때 당시 여학생들의 학교 생활과 그녀들이 받았던 시선, 그리고 그 시선에 굴하지 않고 스스로 자신의 가치를 찾아내는 식민지 여성들의 모습을 볼 수 있어서 좋았다. 김나경 작가님의 다음 작품이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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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아까 이야기는 다시 생각해 보게. 돈을 누가 전한단 말인가? 그 사람이 정말 믿을 만한 사람인지, 아닌지는 지아비가 누구인지를 보고 알 수 있는 법이네.”

“그 사람은 지아비가 없습니다.”

“보증해 줄 사람이 없다라……. 그렇다면 누구의 딸인고?”

희덕이 대답했다.


“그분은 단지 그 자신일 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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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살짝 미소를 지은 채, 새의 너울거리는 움직임이 작아져 더 이상 눈에 보이지 않을 때까지 지켜보았다.







창비에서 책을 제공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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