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월
존 란체스터 지음, 서현정 옮김 / 서울문화사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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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자체가 이 책의 이야기 전부를 담은 <더 월>은 

(아마도 책이 안 팔리는 요즘 독자들의 시선을 잡아야 하는 필요가 다분히 느껴지는)

띠지의 2019 부커상 후보작이라는 말 없이도 내용으로 충분히 승부를 볼 수 있는 책이다.


부커상과 <파이낸셜타임즈>, <이브닝스탠다드>가 무슨 관련성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벽'이라는 단어로 연상될 수 있는 스토리를 충실히 따르지만 

책 속의 인물들에게 마음을 줄 수 밖에 없는 몰입도와 호소력이 있는 스토리텔링이

이 책의 참된 매력이라고 생각한다.


<더 월>의 저자는 존 란체스터이다.

그의 이력을 보면 '다채로움'이라는 말이 먼저 떠오른다.

영국의 언론인이고, 함부르크에서 태어나 홍콩에서 자라, 영국에서 교육을 받았다고 한다.

1962년생임을 감안해 보았을 때, 영국의 기운이 아직은 세계적으로 영향력을 미칠 시기에

영국 이외의 국가에서의 경험과 영국에 다시 들어와 교육받고 런던에서 살고 있는 현재가

그가 세상을 보는 시각을 조금 다르게 만들어준 것이 아닐까, 추측해본다.



<더 월>의 배경은 기후 변화로 인해 해수면이 상승하고, 정치적으로 분열하여 황폐화된 세계다.

한 섬나라에 모든 해안선을 둘러싸는 거대한 콘크리트 벽이 세워진다.

이 '벽'이 주는 이미지는 강렬하다.

외부에서 안락한 '섬'으로 진입하고자 하는 침입자를 경계하는 곳이기도 하고

외부와 내부를 갈라 차이와 차별을 낳는 물리적 '벽', '한계'이기도 하고

그곳을 지키기 위해 젊은이들이 2년 동안 목숨을 걸어야 하는 '도전'과 '위험'이기도 하다.


책의 주인공은 이 벽 위에 새로 발령난 신입 경계병 조셉 카바나이다.

그는 앞으로 2년 동안 벽 위에서 버티며 침입자로부터 벽을 사수해야 한다.

운이 좋아 별탈 없이 (즉 임무를 수행하던 중에 죽거나 실종되거나, 침입을 훌륭히 막는다면)

2년을 보낸다면 '벽과 관련없는 인생'을 살아갈 수 있다.


누군가는 생사를 거는 2년이, 그 기간을 이미 보내버린 사람에게는 '관련없는' 일이 되어버리는

그래서 내부인을 지켜주는 '벽'이 그 내부인들 사이에서도 '고립'과 '외로움'을 빚어내는

이 지경에 다다르면 도대체 이 '벽'을 왜 그렇게 목숨 걸고 지켜야만 하는지 의문이 생긴다.




그리고 외부인의 침입을 막던 내부인이 상황이 바뀌어,

아니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벽'을 세우고 지키기를 원하는 시스템의 요구를 충족시키지 못해

외부인으로 신분이 바뀌어 버렸을 때 

지금까지 자신들을 지켜주고 '차이'를 만들어 주었던 그 벽의 높고 차갑고 단단함을 실감하는 것.

이것은 그냥 소설 속에서만 일어나는 상황이 아니라 삶에서도 흔히 일어나는 일임을

책을 읽으며 진하게 깨닫고 느끼게 된다.


특히 섬나라에서 사는, 그리고 EU와 브랙시트가 함께 따라붙는 영국에서 글을 쓰는 저자의

정치적, 사회적 상황이 글 속에 군데군데 녹아들어있음도 감지하게 된다.



소설이 마냥 소설같지 않게 느껴지니 소설 속에서 조금이나마 희망을 만나게 되면

또 마음이 뿌듯해지기도 한다.

결국, 벽으로 갈라진 사회를 구원하는 것은, 그 사회에서 내쳐진 -혹은 그 사회에 속하길 거부한-

사람들끼리의 '그럼에도 불구하고'를 바탕으로 한 연대이고

그 연대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사람들의 '받아들임' 으로 표현되는 넉넉한 마음과 

불확실함을 극복하고 타인에게도 '기회를 줄 수 있는' 용기, 환멸을 이기는 단단함임이 아닐까.




-스포일러 없이 쓰려고 노력중이나 역시 쉽지 않다...-

주인공에게 닥친 위기, 그 위기 중에 만나는 조력자, 그리고 다음 위기를 보고 있으면

세상은 쉽지 않고, 하나의 위기와 도전을 견뎌내면 기다렸다는 듯이 다음 과제가 기다린다는

씁쓸한 진리가 머리속에 떠오른다.


벽이 만들어지기까지, 지구가 자기 것인냥 마구잡이로 사용하고

벽을 만들어 보편적인 복지와 안전을 공유하는 것을 거부하고

벽을 이용하여 -그리고 그 벽을 지키게 젊은 세대를 몰아가며- 시스템 유지를 원하는

그 지배세력/기성세대가 누구의 얼굴을 하고 있는지 현실을 문득 돌아보게 된다. 



"뭘 기대해야 할지 모르겠어."

히파가 말했다.

"난 알아. 그냥 가보자, 그게 최선이야."

히파가 다시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기 시작했다. 사다리는 상판까지 쭉 뻗어 있었다.

(중략)

드디어 맨 위에 다다라 출구 사이로 올라가 금속 상판에 벌러덩 드러눕고는

온몸을 부들부들 떨며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사다리가 한 단만 더 있었어도 상판으로 올라오지 못했을 것이다.

어쨌든 그런 일은 없었다. 우리는 해냈다.


(p.280-281)


장미빛 희망을 섣불리 말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이 소설은 마음에 무척 들었다.

현실은 내 바람이나 기대처럼 말랑하진 않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 현실을 꿋꿋이, 한 칸 한 칸 밟으며 살고 있고

그건 꼭 나만의 일은 아니다. 

내 옆에도 역시 한 칸 한 칸, 온 힘을 다해 오르고 있는 사람이 있다.

그리고 서로가 서로에게 벽을 세울 수도, 손을 뻗어줄 수도 있는 존재가 된다.

어떤 존재로 남을 것인가?


소설이 우리에게 묻는 것은 그것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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