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베리아
콜린 더브런 지음, 황의방 옮김 / 마인드큐브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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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운 것을 너무 싫어하는 내가, 아마 평생 가볼 생각조차 안하지 않을까 하는

동토의 땅, 시베리아.


끝도 없이 펼쳐진 설원과 뺨을 얼어붙게 만드는 추위 뿐 아니라, 

러시아의 스산한 역사와 유럽과 동양의 신비적 요소까지 떠오르는 곳, 시베리아.

사람들에게 버려진 땅 혹은 버려진 (벌이든, 경제적으로 궁핍해서이든) 사람들의 땅.

이런 이미지가 가득한 시베리아를 여행한 작가는 누구일까?


이 책은 시베리아 여행기이지만 흔한 여행책이 아니다.

여행객을 위한 안내서도 아니라 총천연색 지도 대신 아래와 같은 지도만 있다.

굵은 선이 저자의 여행 경로이다. 

시베리아 횡단열도를 줄기로 삼아 국경의 끝까지, 지구의 끝까지 뻗어간다.



추천사처럼 띠지에 실린 말처럼, 이 여행기는 명쾌하고 서정적이며 박식하다.

그래서 여행기를 읽는 느낌보다는 '나'라는 사람이 등장하는 소설같이 느껴진다.

작가는 어디에 가서, 무엇을 보고, 어떤 것을 먹고, 무슨 일을 했는지를 적지 않고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 한때 그곳에 있었던 과거의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우리나라만큼이나, 시대의 흐름에 따른 흥망성쇠가 굵고 짙은 나라 러시아.

겨울의 나라라는 인상답게, 광활하고 황량하며 외로움이 짙게 배인 곳을

런던의 여행가 콜린 더브런은 무척이나 생생하게 묘사한다.


선전문구와 슬로건이 가득했던 광장을 채운 광고판의 글자부터

묘지와 교회에서 기도하고 과거를 추억하는 사람들.

발전이 없고 거친 곳을 떠나 경제적 부와 성공을 위해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까지.

작가는 자신의 뒤를 쫓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KGB의 존재를 의식하지만

이 책을 냈을 때는 이미 공산 체제가 무너지고 아직 신 질서가 잡히기 전인

옐친 대통령 시대다. 

1999년에 출간된 것을 이제야 만나서, 더더욱 이 '여행기'가 

냉전시대가 완전히 무너지고 러시아가 변화되는 한복판을 배경으로 삼은 

소설처럼 느껴지는 것도 이상하지 않다.


여기에는 작가의 필력도 한 몫을 한다.

작가는 카메라도 없이 오지와 위험한 곳을 누볐다. 

그래서인지 여행책임에도 사진이 없다. 


여행의 시작을 러시아의 마지막 황제 니콜라이 일가가 무참히 살해된 도시,

예카테린부르크로 잡아, 이 <시베리아>라는 책의 전체적인 분위기를 잡는다.


시베리아 동북단에서 수십만 명의 무고한 죄수들이 강제노역을 하며 

석탄을 캐던 도시 보르쿠타.

도스토예프스키가 유배되었던 옴스크.

세계 최대의 민물 호수인 바이칼 호.

중국과 러시아를 가르는 아무르강이 흐르는 알바진.

유대인 이주 도시로 기획된 비로비잔.

악명 높은 콜리마 수용소가 있던 마가단.

을 마지막으로 작가의 여행기가 끝난다.


편안함이나 여유로움, 설렘이나 두근거림과는 거리가 먼 이 길고 긴 여행이

매우 인상적인 흑백사진 같은 이유는, 

작가 콜린 더브런이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에 대한 묘사와 대화 때문이다.

작가는 여행이 아니라, 마치 그곳에 있는 사람들을 만나러 간 것 처럼

각지에서 다양한 보통 사람을 만난다.

샤먼, 수용소에서 한평생을 보냈으면서 스탈린을 원망하지 않는 할머니.

주정뱅이, 일자리 없이 회색같은 미래에 방황하는 젊은이,

과학도시의 예산을 배정받지 못한 행정 책임자, 

신비주의자같은 러시아 정교의 신자들.


이 모든 사람들은 (옐친 대통령 시대의) 변화가 가져온 일상의 균열을

그야말로 온몸으로 버티어 내고 있는 평범한 사람들이다.

작가가 그들과 나눈 대화를 통해, 

사실 우리나라에서 아주 멀리 떨어진 곳도 아닌 

러시아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개별적으로 생각해보게 되었다.  


국가의 이미지나, 스테레오타입으로 알고 있는 민족의 특징 같은 것들로

뭉개져있었던 러시아나, 러시아 지역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의 삶을

담담하지만 감성적으로 써내려가는 작가의 흡인력은

꽤나 묵직한 464쪽, 9장으로 이루어진 책을 놓기 아쉽게 만든다.


한번도 가보지 못한 곳을 동경하게 만드는 것이 여행책이라면

한번도 만나보지 못한 사람들과 그들의 역사에 대해 궁금하게 만드는 것이 

콜린 더브런이 쓴 여행 에세이의 힘과 매력같다.

가볍고 살랑거리는 여행 에세이가 지루해질 참에 멋진 책을 만났다.

그의 다른 책들도 북리스트에 올려 놓게 만드는 책 <시베리아>


추운 겨울, 긴 기차 여행에 이 책을 들고 타서 

차가운 손끝을 호호- 불어가며 읽어보면 작가의 경험을 

한 조각이나마 공유하게 되지 않을까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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