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깥은 여름
김애란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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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학의 미문주의, 문창과 식의 학습된 문장쓰기가 어디에 도달하게 되는지를 보여주는 한 권이었다. 지나치게 예쁘고 단정한 문장, 지나치게 공들여 쓴 문장, 지나치게 꾸며진 문장들로 한 권이 빼곡하다. 상투적이고 신파적인 이야기를 예쁘게 감싸안아 그 가치를 부풀리며, 윤리적 고민과 자기반성적 성찰에 도달하기 전에 먼저 독자의 눈매와 코끝을 자극한다. 독자에게 잘 보이려 하지 않고 독자의 공감을 사려고 애쓰지 말며 독자의 감정을 자극하여 점수를 얻으려 하지 않는 것이 좋은 문학의 미덕이라고 생각하기에, 이 예쁘고 예쁜 말들은 보기 흉했다. 죄없고 약한 자들을 희생시켜 기어코 눈물 콧물 묻은 감동을 뽑아내고야 말려는 행태가 아닌가. 최루액 묻은 감동일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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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반
폴 비티 지음, 이나경 옮김 / 열린책들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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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진해에서 훈련병 시절 외곽초소 옆 개울물에 흰 밥알이 떠내려 왔다 나는 엠원 소총을 내려놓고 옹달샘 물을 마시는 노루처럼 밥알을 건져 먹었다 물론 배도 고팠겠지만 밥알을 건져 먹는 내 모습을 보고 싶어서였다 나는 나를 비참하게 만들어 생에 복수하고 싶었다.
 
 매점 앞에서 보초 설 때는, 단팥빵 맛이 조금만 이상해도 바닥에 던지고 가는 녀석들이 있었다 달려드는 중대장의 셰퍼드를 개머리판으로 위협하고, 나는 흙 묻은 빵을 오래 씹었다 비참하고 싶었다 비참하고 싶은 나를 바라보고 싶었다 내 생에 복수하는 유일한 방법처럼
 
 또 일병 달고 구축함 탈 때, 내게 친형처럼 잘해주던 서울 출신 중사가 자기 군화에 미역국을 쏟았다고, 비오는 비행갑판에 끌고 올라가 발길질을 했다 처음엔 왜 때리느냐고 대들다가 하늘색 작업복이 피로 물들 때까지 죽도록 얻어맞았다 나는 더 때려달라고, 아예 패 죽여달라고 매달렸고 중사는 혀를 차며 뒤도 안 돌아보고 내려갔다 나는 행복했고 내 생에 복수하는 것이 그렇게 흐뭇할 수 없었다
 
 그리고 제대한 지 삼십 년, 정년퇴직 가까운 여선생님 집에서 그 집 발바리 얘기를 들었다 며칠 바깥을 싸돌아다니다 온 암캐가 갑자기 젖꼭지 부풀고 배가 불러와 동물병원에 갔더니 가상 임신이라는 것이었다 그것은 내 얘기가 아니었던가 지금까지 세상에서 내가 훔쳐낸 행복은 비참의 가상 임신 아니었던가 비참하고 싶은 비참보다 더 정교한 복수의 기술은 없다는 것을, 나는 동물병원 안 가보고도 알게 되었다
 
- 이성복, '내 생에 복수하는 유일한 방법처럼',  『아, 입이 없는 것들』 ,문학과 지성사, 2003




  소설 '배반'은 미 연방 대법원 법정에서 시작한다. 미(Me) 대 미합중국(U.S.A.)의 재판. '흑인 남자답지 않게 법을 잘 지키고 살았던' 이 사나이가 피고석에 앉아 마리화나 한 대를 시원하게 말아피우며 신성한 미국의 대법원 법정을 모독하기까지에는 어떤 사연이 있었을까.

  배꼽 잡는 블랙 유머와 지독한 패러디 및 아이러니로 무장하고 있으나, 그 유쾌함과 발칙함 속에서도 참을 수 없이 가슴이 뜨끈해지고 마는 이 소설은, 이성복 시인의 시 중 내가 가장 좋아하는 '내 생에 복수하는 유일한 방법처럼'을 생각나게 한다. 밥알을 건져먹는 내 모습을 보고 싶어하는, 개에게 던져준 흙 묻은 빵을 허겁지겁 씹는, 나를 때리는 자에게 매달려 더 때려달라고, 아예 패 죽여달라고 매달리는 미친놈 같은, 이것은 노예 시대와 인종 분리의 시대로 돌아가고 싶어하는 니거의 이야기다. 

  인종 차별은 철폐되었는가? 미국의 수정 헌법 13조는 인종 차별을 철폐시켰는가? 폴 비티의 이 소설은 이 단도직입적인 질문에 대해 단도직입적으로 아니라고 대답한다. 미국의 수정 헌법 13조는 다음과 같다.
 
제1항 : 어떠한 노예 제도나 강제 노역도, 해당자가 정식으로 기소되어 판결로서 확정된 형벌이 아닌 이상, 미합중국과 그 사법권이 관할하는 영역 내에서 존재할 수 없다.
제2항 : 의회는 적절한 입법을 통하여 본조(本條)를 강제할 권한을 가진다.

  수정 헌법 13조가 노예 제도를 철폐한 법안이라는 것은 맞다. 그러나, 어디에도 백인과 흑인이 동등하다는 말은 없으며, 인종 차별을 미국에서 영원히 추방한다는 말 또한 없다. 수정 헌법 13조 1항은 '확정된 형벌이 아닌 이상' 강제 노역을 시킬 수 없음을 명시하고 있으나, 이 조항은 뒤집었을 때 '확정된 형벌에 의해서는' 강제 노역을 시킬 수 있음을 명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또한 미합중국이 정한 다른 법률에 의거해 (백인) 경찰의 명령을 거스르는 (유색인) 잠재적 범죄자는 언제든 징역살이와 현장사살이라는 대가를 치를 각오를 해야 함도, 우리는 알고 있다. 

  백인, 흑인, 멕시칸, 아시안, 그리고 온갖 혼혈과 혼혈이 뒤섞인 이 다인종 국가에서, 백인은 흑인을 멸시하고 흑인은 멕시칸을 혐오하며 이들 모두는 아시안을 우습게 본다. 인종 통합과 차별 철폐라는 기만의 덮개 아래 인종 간의 갈등과 분노는 언제나 들끓고 있고 증오와 차별은 엄존한다. 소설은, 엄연히 그게 거기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거기 없다고 말하는 것, 엄연히 다른 대우를 받고 있는데 우리는 다 똑같다고 말하는 것, 똑같기 때문에 똑같은 선에서 출발하여 동등하게 경쟁해 과실을 따먹어야 하는 거라고 말하는 미국식 인종 통합의 기만성을 통렬하게  비웃는다. 
   

  이러니 인종의 통합이라는 것은, 니거가 세상에서 훔쳐낸 행복 같은 것. 백인에 의해 끌려와 백인에 의해 지배받다가 백인의 손에 해방되어 백인과 같은 대우를 받고 산다고 하지만 정치 경제 문화 모든 면에서 백인의 밑깔개로, 미국의 하층민으로, 저임금과 저학력의 굴레 속에 그것들을 대물림하면서 살아가면서도 우리는 백인과 동등한 미국 시민이라고 착각하며 멕시칸과 아시안을 멸시하며 자위하는 것. 그것은 비참의 가상 임신 아니었던가. 그래서 오랜 세월 야유받는 흑인 꼬마 역을 연기해온 원로 배우 호미니는 미(Me)에게 노예 생활을 자처하는 것이다. 백인에게 자리를 양보하는 비참한 흑인 역할을 재연하는 것이다. 그에게 짓밟히고 조롱당하는 흑인의 역할은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 그는 오랜 세월 그것을 연기해왔고 그것은 사실 논픽션이었기에. 독자는 호미니와, 경찰에게 사살당한 미(Me)의 아버지 니거 위스퍼러를 통해, 현실을 부정하려고 발악했지만 결국 자기 머리에 총구를 겨누고야 마는 포이 체셔를 통해, 니거로 태어난 이상 머리부터 발끝까지 흰 페인트를 뒤집어 쓰는 삶을 산다고 해도 니거는 니거일 수밖에 없으며 엄연히 존재하는 차별적 현실에서 눈을 돌리려고 해봤자 비참해지기만 할 뿐(포이 체셔) 차라리 그 앞에 정면으로 옷을 벗고 패 죽여보라고 덤비는 것(호미니)만도 못함을 인정하게 된다. 비참하고 싶은 비참보다 더 정교한 복수의 기술은 없다는 것.

  그러나 이 소설이 마냥 무겁고 독설적이지만은 않은 건, 주인공 미(Me)의 건강하고 명랑한 언행들 때문이리라. 그리고 그의 매력적인 여자친구 마페사의 능동성도 소설에 탄력을 더해준다. 미와 마페사와 러브라인은 단순한 로맨스가 아니라, 미의 모든 행동의 핵심 동인이며, 소설의 담론을 이끄는 견인차가 된다. 특히 마페사의 버스에서 이루어지는 호미니의 생일파티는 소설에서 묘사된 흑인 사회의 명랑발칙한 카니발성을 활짝 펼쳐 보여준다. 로자 파크스의 현대판이라 할 수 있는 마페사는 핍박받는 흑인 여성 캐릭터의 상투성을 벗어나, 진취적이고 활력 넘치는 여걸의 면모를 유감없이 선보여 독자를 기분 좋게 한다. 마페사 외에도 미(Me)를 조력해주는 많은 사람들의 쾌활하고 적극적인 모습은 이 소설을 결코 냉소와 분노 안에 축 처져 있지 않게 한다. 농부라는 미의 직업 또한 흑인들과의 건강한 유대성을 강화해주는 좋은 소재이기도 하다. 일본산 귤과 같은 외래종을 재배하고, 그것을 아낌 없이 지역 사회인들과 공유하며 자연스럽게 공동체적 연대를 이루어나가는 미의 모습은 흡사 '호밀밭의 파수꾼' 같다. 아버지 니거 위스퍼러는 한 명의 똑똑한 이론가를 양성하여 흑인 사회를 발전시키는데는 실패했다. 그러나 아들 미는 자신의 직분에 최선을 다하는 것으로 어린 아이들의 수호자가 되었고, 갱스터들의 화합을 이끌었으며, 유색인의 카니발을 성사시켰고, 미 연방 대법원에서 '편견 없는 태도를 가지고 있다는 미국인들이 평등을 바라보는 시각에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는 것을 지적'1)하게끔 만들었다. 비참을 허용하지 않는 사회에서 기어코 복수하는 그 방법이 그렇게 흐뭇할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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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p.3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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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 요람
커트 보니것 지음, 김송현정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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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므로 저는 여러분께 제안합니다. 만약 우리가 샌로렌조의 죽은 아이들 백 명에게 진심으로 조의를 표하고자 한다면, 그들을 죽음으로 내몬 모든 인간들의 어리석음과 사악함을 경멸하는 것이 이날을 보내는 가장 좋은 방법일 것입니다.

  전쟁을 기념하려면, 아마도 우리는 옷을 벗어던지고 온몸에 파란 칠을 한 다음 하루종일 네발로 기어다니며 돼지처럼 꿀꿀대야 할 겁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분명 고상한 웅변, 깃발과 기름칠한 대포를 동원한 볼거리보다 훨씬 더 적절한 기념 방식일 겁니다.       -  p.301

  "아이들이 서서히 미쳐간다고 해도 놀랄 일은 아니죠. 고양이 요람이라는 게 두 손 사이에 있는 X자 다발에 불과한데도, 꼬맹이들은 그 X자를 보고, 보고, 또 보고...... 그런데, 빌어먹을 고양이도 없고, 빌어먹을 요람도 없죠."       - P.200




  들어보라.

  원자폭탄의 아버지 (아버지들 중의 한 사람, 이 아니다) 필릭스 호니커 박사는 죽기 직전 아이스-나인을 만들었다.
  아이스-나인은 너무나 무서운 물질이라 온 세상에 비밀로 부쳐졌다. 
  그러나 박사의 어린 세 아이들, 앤절라와 프랭크, 뉴트는 그 존재를 알았다.
  그리고 미국과 소련도,
  그리고 샌로렌조 공화국의 미래의 대통령으로 예정되어 있는 (그리고 그 아이스-나인으로 최초로 자살한 인간으로 예정되어 있는) '파파' 몬자노도,
  아이스-나인을 알았다.

  귀여운 리트리버와 사랑하는 아버지 필릭스는 아이스-나인 때문에 죽었다.
  모든 물을 단단한 고체로 만들어 버리는, 따라서 생물체의 몸 안에 있는 수분도 순식간에 고체로 굳혀버릴 수 있는 아이스-나인 같이 위험한 물질을 부엌에서 대충 만들고 바닥에 질질 흘려놓는다면
  이런 결과를 얻게 된다.

  원자폭탄의 아버지 (아버지 중의 한사람이 아닌) 이자 인류가 낳은 가장 위대한 과학자이며 가장 미친 과학자였고, 추하기 이를 데 없었던 필릭스 호니커 박사는 
  어쩌다 보니 아이들에게 아이스-나인이 가득 든 냄비를 남겨 놓고 죽었다.
  앤절라, 프랭크, 뉴트는 어린 아이들이었다. 그들은 그 냄비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몰랐다.
  그들은 처음엔 메이슨 자에, 나중엔 서모스 보온병에 그 지옥의 물질을 나누어 담았다. 그리고 세 사람만의 비밀로 삼았다.
  그리고 미국의, 소련의, 미래의 샌로렌조 대통령 '파파' 몬자노의 비밀로.

  미국은 앤젤라에게 사랑스러운 남편 해리슨 C.코너스를 보내 아이스-나인의 비밀을 캐냈다.
  소련은 뉴트에게 우크라이나 출신 난쟁이 무용수 진카를 보내 아이스-나인의 비밀을 캐냈다.
  샌로렌조 대통령은 프랭크에게 그의 후계자 지위와 미녀 모나 아몬스 몬자노와의 결혼을 제공하여 아이스-나인의 비밀을 캐냈다.
  앤젤라, 프랭크, 뉴트. 그들은 어린아이들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아버지, 저들을 용서하십시오.

  아이스-나인은 너무나 위험한 물질이었다. 단 한 방울만 물에 닿아도 그 물을 고체로 굳혀 버릴 수 있었다.
  고체가 된 물이 또 다른 물 - 예컨대 강이나, 바다 - 에 닿으면 그 물들도 모두 아이스-나인 고체로 바뀌어 버렸다.
  '비밀 요원 엑스-나인'으로 불리워지는 것이 싫었던 소심한 소년 프랭크는 아이스-나인 조각을 '파파' 몬자노에게 주고 장군의 별을 얻었다. '파파' 몬자노는 그 지옥의 물질로 죽었다. 그리고 온 세상에 그 물질을 퍼뜨려 놓았다. 
  인류는 멸망했다. 


  뉴트와 앤절라와 프랭크는 크리스마스 이브에 자신들이 이 세상에 공급된 아이스-나인을 나누어 가진 일에 대해 이야기했다 하지만 범죄에 대한 세부사항에 이르자 이야기는 점차 불명확해졌다. 호니커의 자녀들은 아이스-나인을 사유재산으로 나누어 가지면서, 누가 어떤 식으로 그 이유를 정당화했는지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 그들은 아버지의 뇌 늘리기를 떠올리며 아이스-나인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말했지만, 윤리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 P. 297


  커트 보니것의 1963년작 '고양이 요람'은 그의 또다른 대표작 '제5도살장'과 함께, 차가운 블랙 유머로 무장한 뜨거운 반전소설이다. '제5도살장'의 부제와 같이, 전쟁은 결국 아이들의 십자군 전쟁이며, 인류의 멸망은 이 어리석은 십자군 전쟁의 종착점, 죽음과 추는 의무적인 춤이다. 전쟁과 멸망은 어른의 몸을 하고 어른의 말을 쓰고 있지만 실제로는 아무 생각도 윤리도 없는 자들, 헛된 '그랜팔룬'1)을 자신의 질서로 삼고, 헛된 '포마'2)를 자신의 신조로 믿고 복종하며 사는 이들이 벌인 '아이들의 장난질'이다.
  필릭스 호니커는 위대한 과학자였다. 그는 자신의 행동이, 자신의 과학적 업적이 인류에게 어떤 결과를 가져오게 될지는 생각하지 않는 자였다. 그는 길거리에 차를 세워놓고 혼자 내려버림으로써 거대한 교통 마비와 아내의 죽음을 유발했다. 그는 세상을 날려버릴 폭탄을 만들어 노벨상을 탔고, 매우 재미있는 아이디어를 만나면 그걸 꼭 현실화 시켜야 하는 과학자였으므로 별 생각 없이 '저렴하게' 인류를 절멸시킬 물질을 만들었다. 그는 무엇이든 궁금해 하고 무엇이든 재미있어 하며 무엇에든 배우는 사람, 어린아이처럼 천진난만하고 매우 행복한 사람이었다. 인류는 행복하고 순수한 사람의 손에 의해 절멸될 수 있다. 아이히만은 수천 명의 유대인의 목숨을 빼앗은 날 집에 가서 아이들에게 슈베르트를 연주해주었고 사랑스러운 아내가 차려준 저녁 밥상을 먹으며 화목한 아리안 족의 저녁 시간을 보냈다. 그는 행복하고 순수한 자였으며 머리가 좋고 성실했다. 그리고 주어진 일과 따뜻한 저녁 식탁 외에는 관심이 없는 자였다. 모사드 또한 주어진 일에 관심이 많았기 때문에 그는 1962년 6월 1일 교수형당했다. 그렇게 가는 거지. 
   호니커 박사의 세 자녀들도 행복하고 순수한 아이들이었다. 
  앤절라는 아버지 호니커 박사를 진심으로 사랑했다. 그녀의 아버지가 히로시마에서 수만 명의 목숨을 앗아가 전쟁에서 승리하였기 때문에 그녀는 아버지를 사랑했다. 그녀에게 있어 아버지는 의심할 여지 없는 위대한 과학자였다. 
  프랭크는 호니커 박사처럼 위대한 과학적 업적을 이룰 수는 없었다. 대신 그는 신이 되는 길을 택했다. 거대한 모형 세상을 만들고, 어제까지 산이 있던 자리를 뒤엎고 호수와 교량을 대신 세웠다. 개미들을 병과 유리판 속에 가둬두고 실험했다. 아버지에게 얻은 위대한 물질로 한 나라를 얻었다. 그는 자기가 감당할 수 있는 것은 개미굴 한 개 뿐이라는 것을 너무 늦게 깨달았다. 
  뉴트는 아이스-나인을 자기가 핀셋으로 집어 병에 넣은 자랑스러운 사실을 결코 잊지 않았다. 
  아버지를 끝까지 추앙했던 큰딸은 아버지의 업적에 의해 죽었다. 아버지를 계승하지 못한, 혹은 계승하기를 거부한 두 아들은 그래도 살아남았다.
  인류는 이 행복하고 순수한 아이들의 앙큼한 거짓말, 우스꽝스러운 장난질로 멸망했다. 그렇게 가는 거지.

  샌로렌조를 만든 것은 매케이브라는 이름의 탈영병과 라이어널 보이드 존슨이라는 모험가였다. 그들은 우연히 이 척박한 섬에 표류해온다. 그들은 대통령이, 신이 되기를 원했고 각각 그 위치를 차지했다. 그리고 샌로렌조를 '하나의 나라'로 단합시키기 위해서 적을 만들었다. 매케이브 상병은 존슨-보코논을 샌로렌조의 적으로 규정하고, 보코논교를 믿는 자들은 모두 갈고리에 매달겠다고 선언했다. 실제로 몇몇 사람들이 갈고리에 매달려 죽었다. 매케이브와 보코논은  인간은 적이 있어야 단합하고, 종교는 박해를 받아야 더욱 신실해진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괴로운 현실을 벗어나는 데는 거짓만한 게 없었다.
  샌로렌조의 헐벗은 국민들은 신이 필요했다. 그들은 프랭크를 신으로 믿는 개미와 다르지 않았다. 보코논은 최후의 순간에, 그들 모두 신의 뜻에 따라 죽어야 한다고 선언했고 수만 명의 사람들은 간단히 죽었다. 되묻지 않은 자들, 의심하지 않은 자들, '정해진 뜻'에 따른 자들의 죽음이었다. 죽음은 신의 뜻이고 예정된 것이니 그저 따르기만 하면 되었다. 

  이 세상의 중요하고 또 중요하다고 믿는 가치들 - 국가, 민족, 종교와 무슨무슨 주의들, 
  아이들을 달래기 위해 만드는 심심풀이 끈놀이, 끈 속의 어여쁜 고양이와 요람. 
  모두 그랜팔룬이며 모두 포마다.
  깊고 어리석은 안도감에 젖어, 그 살지고 축축하고 천박한 바보에게 몸을 기대자.3) 그것은 때때로 조금 추하지만, 조국을 승리로 이끌며, 따뜻하고 평화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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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보코논교에 따르면 아무 가치도 없는 허울뿐인 조직을 뜻한다. 예로는 공산당, 미국 혁명 자매회, 제너럴 일렉트릭사, 오드펠로스 국제 비밀 결사, U.S.A. 등이 있다.
2) 보코논교에 말하는 '거짓'.
3) P.325~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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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나쁜 쪽으로
김사과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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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을 쓰기 위해 2013년 11월, 김사과의 '천국에서'를 읽고 기쁜 마음 감추지 못하며 일필휘지 써내려간 나의 감상문을 다시 읽었다. '씨발 그래 좋다, 어차피 인생 좆같고 아무 의미도 없으니까 지금부터라도 돈이나 졸라 벌어서 부르주아가 되자, 그럼 되나? 그럼 이 고통이 해결이 되나?'1) 라는 명문장으로 내 가슴에 깊은 감동을 안겨준 수작이었다. 그 이후 4년, 나는 김사과의 신작을 간절히 기다려 왔으나 그녀는 두 권의 산문집만 내놓으며 내 간을 보았다. 약자인 나는 늘 짭쪼롬하게 기다렸다. 씨발 그래 좋다, 어차피 문학판 좆같고 아무 의미도 없으니까 계속 김사과나 졸라 기다려서 일류독자가 되자, 그럼 이 고통이 해결되겠지? 대충 이런 심정이었다.

  고통을 두 권의 책 한꺼번에 내놓는 걸로 해결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인내심이 없는 자는 믿음이 없는 자라. 믿고 인내하며 기다리니 보상이 크구나. 비록 한 권은 개정판이지만 그래도 감사합니다.

  '더 나쁜 쪽으로'는 일단 얇다. 단편소설 묶음인가 했는데 읽어보니 그건 아닌 듯. 하나의 테마를, 연작이라고 하기는 그렇고, 여러 개의 소설, 혹은 산문, 어쩌면 운문, 아니면 그냥 파편적인 문장들로 막 내던지다시피 해서 묶어놓은 책이다. 3부에 이르면, 시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이게 시인가? 싶게, 그냥 파편화된 문장들이다. 

  파편화. 부서진 조각들. '더 나쁜 쪽으로'를 정의하기에 이것보다 더 나은 단어는 없을 것 같다. 결코 합쳐지지 않는 것들. 1부의 표제작 '더 나쁜 쪽으로'는 낯선 거리를 헤매 다니는 '나'가 증언하는 'NEO 지옥의 묵시록'이다. '우리, 우리들...... 같은 책을 읽고, 같은 음악을 들으러 같은 공연에 가고 같은 영화를 보러 같은 극장으로 향하던, 같은 추억으로 얻어맞고 더럽혀진 우리들은 물론 같은 거리에 속해 있다. 같은 시간 같은 유머에 웃고 같은 불면에 시달린다. 같은 외로움, 버림받은 느낌에 운다. 같은 사랑에 빠지고 같은 이별을 한다. 이 늦은 밤 우연히 여기 모인 우리가 바로 그들이다. 끔찍하게 쌓아올려진 이 모든 것이자 그것을 쌓는 데 인생을 탕진한 바로 그자들이다.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우리가. 그런게 그게 무슨 의미가 있나?'2)  여기서의 '우리'는 한병철이 '타자의 추방'에서 말한 것처럼 '같은 것의 지옥' 속을 살고 있는 '우리'-의미도 실체도 없는 무리-복제된 클론들이나 다름 없는 '같은 것의 공허한 창궐'이다. 이후의 1부는 여러 장소들을 배경으로 하는 것 같지만 사실 이 거대한 복제의 더미 안에, 서울도 뉴욕도 샌프란시스코도 포르투갈도, 파리와 도쿄도 의미는 없다. 모든 것은 동일하다. 지옥 같은 반복, 같은 것의 연쇄, 모든 삶의 영역으로 확산되어 세상 곳곳을 돌아다니면서도 하나의 경험도 하지 못하고, 모든 것을 인지하면서도 어떤 것도 인식하지 못하는 '사회의 소멸'이다.3) 그리하여 일찌감치 김사과는 '천국에서'의 결말부에서 9.11 테러와 연관해 '모든 것이 무너져내리고 있는데 (사회의 소멸) 어떻게 멀쩡할 수 있단 말인가.' 라고 비극배우처럼 부르짖었다. 전세계에 생중계 되었던 월드 트레이드 센터의 쌍둥이들, 그들의 부서져 내리고 무너져 내리는 파편과 먼지들이 바로 21세기 우리의 세계를 예시하는 지옥도였던 것이다. '내가 꽃같이 활짝 피어나는 사이 모든 게 이렇게 철저히 무너져내리리라고는......'4)

  따라서 2부의 세 소설, '박승준씨의 경우'와 '카레가 있는 책상', '이천칠십X년 부르주아 6대'는 모든 게 무너져내린 시대, 모든 것이 파편으로 흩어진 시대의 클로즈업들이라고 할 수 있겠다. 목동의 아파트 단지에서 옷을 주워 입는 대학생 박승준 씨는 '출신 성분'을 배반하고 강남의 힙스터가 된 대가로 김밥천국 안에 처박혀 죽음을 맞는다. 몸에 좋은 카레를 먹으며 살아가던 '나'는 결국 버블티 여자를 위협하고 조선족 살해 앞에 침묵하며 햄버거로 투항한다. 그 투항은 철저히 자발적이며 기쁨에 차 있다. 그리고 도래하는 이천칠십X년. 이 미래의 픽션은 여러 모로 앨프리드 배스터의 '타이거! 타이거!'를 연상시킨다. 모든 것이 진일보한 시대에 힙스터됨의 극치는 반대로 돌아가는 것 - 한복 혹은 빅토리아 시대의 복식을 하고, 말을 타는 것, 직접 쓴 서찰을 전하는 것, 셰익스피어 식의 연애를 하는 것, 사랑 때문에 자진하는 것이다. 모든 것은 취향의 문제이며 전시되어야 하는 거리가 된다. 모든 것은 보여져야 하고, 노출되어야 하고, 공유되어야 하며, 과시적이어야 한다. 인간이 순간공간이동을 할 수 있게 되자 말과 마차를 타고 다니며 시간을 허비하는 것을 과시적 소비로 삼던 '타이거! 타이거!'의 유한계급들처럼, 이천칠십X년의 부르주아 6세대들은 남녀가 내외하고 앉아 시를 쓰고 러시아 소설 같은 애칭을 짓는다. 로미오와 줄리엣 같은 이 서정적 사랑은 결국 '과천시 거주민의 비참함'으로 끝난다. 이 소설은 '끝없는 말들의 정원', '계절도 장소도 알 수 없는 기이한 정원'의 풍경이며, '현실을 역겨워하며, 죽음을 저주하며, 하지만 아무것도 손에 쥐지 못한 채, 끔찍한 증오 속에서, 무력감 속에서, 천천히 썩어갈 것임을 직감'5)케 하는 김사과 식의 예언적 지옥도이다.

  '더 나쁜 쪽으로' 라는 제목에서 그래도 '가장 나쁜 쪽으로'(베케트)라도 나아갈 수 있으니 일말의 희망이 있는 것 아니냐는 글을 보았는데, 과연 그럴까? 완전히 나쁜 것은 아니라는, 어찌 됐건 최상급은 아니고 비교급에 그친 것이니 희망은 남았다는 말. 글쎄,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나쁜 것은 나쁜 것. '나쁘다-더 나쁘다-가장 나쁘다'는 희망의 여지가 50%-25%-0%이렇게 점점 줄어드는 형태로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그냥 0%-0%-0%인 것이다. 나쁘다는 것은 그냥 나쁜 것이다. 조금 나쁘고 덜 나쁘고 조금 더 나쁘고 살짝 나쁘고 알게 모르게 나쁘고 끔찍하게 나쁘고 최악으로 나쁜 것이 있는 게 아니라, 그냥 나쁘다. 이성복 식으로 말하자면 '나쁜 것은 언제나 미치게 나쁜 것, 나쁜 것은 언제나 전속력 전방위적으로 나쁜 것, 왜 어떻게 나쁘냐고 물으면 왜 어떻게 나쁘다고 대답할 뿐, 코팅한 입으로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6) 김사과의 소설에서 '희망'이라는 것을 찾는 것만큼 무용한 시도는 없다고 생각한다. 김사과의 소설은 철저히 허무하고, 냉소적이며, 자기혐오적이고, 자기를 혐오하는 이상으로 타인과 세상을 혐오하여, 그 예전 김사과의 단편소설 속 주인공처럼, 식당 아줌마를 칼로 찔러 죽이고 집에 가서 아버지를 때려죽이는 발광의 행동으로밖엔 해소할 수 없는 파괴적 욕동이 있다. 그것이 오늘날, 이 시대의 젊음이다. 꼰대들은 받아들일 수 없고 기승전결로는 씌어질 수 없으며 결코 교훈의 카테고리 안에 묶일 수 없는 난폭함과 제멋대로성. 그것이 김사과가 보여주는 이 시대 코스모폴리턴들의 초상이다. 이해할 수 없음. 말로 설명할 수 없음. 끝없이 이어지는 이미지와 브랜드, 자학과 공격성의 난폭한 조합, 고급과 저급 사이의 봉제선이 그대로 드러나 있는 천박한 조합. 조 말론의 향수 냄새와 고시원 방의 카레 냄새가 뒤섞인 이 저주스럽고 힙한 풍경. 이것이 2017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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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김사과, '천국에서', 창비, 2014, P.186
2) 한병철, '같은 것의 테러', "타자의 추방", 문학과지성사, 2017,  P.10 참조
3) 김사과, '더 나쁜 쪽으로', "더 나쁜 쪽으로", 문학동네, 2017, P.28
4) 김사과, '지도와 인간', 위의 책, P.96
5) 김사과, '이천칠십X년 부르주아 6세대', 위의 책, P.174
6) 이성복, '언제나 미치게 아름다운' ,"아, 입이 없는 것들", 문학과지성사, 2003에서 변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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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고] 꿀벌과 천둥
현대문학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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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유치해서 머리가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따끈따끈 베이커리 보는 줄 알았네. 노다메 칸타빌레가 이책보단 더 재미있다. 천재 타령 이제 좀 안할 수 없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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