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코로스, 어머니 만나러 갑니다 페코로스 시리즈 1
오카노 유이치 지음, 양윤옥 옮김 / 라이팅하우스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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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래전부터 '이 세상 살아있는 모든 것들은 가엾다.'라고 가슴으로 생각해왔다. 그것이 동물이든 식물이든 인간이든 생명 있는 것들이 자기에게 주어진 삶의 자리를 살아내느라 저마다 꼼지락 대는 것이 너무나 대견하고 애닯고 가여웠다. 그중에서도 가슴 저리게 가엾고 한없이 눈물겨운 것은 자꾸만 왜소해져 가는 내 어머니의 앙상한 뒷모습이다. 너무나 어렵고 힘든 어린시절을 보냈고 결혼 후에는 오로지 자식들을 위해 많은 시련을 감내하며 가정을 지키셨던 어머니께서 여든 두살이 된 오래는 유난히 쇠락해지는 것이 눈에 확연이 보일 정도이다. 몸이 여기저기 안 좋으셔서 입퇴원을 거듭하기도 하지만 정신적으로도 자꾸자꾸 아기로 되돌아 가신다. 기저귀를 차고 십 분 간격으로 오늘이 무슨 요일이냐고 거듭 물어오실 때는 정말 가슴이 무너져 내린다. 급속한 기억력 감퇴와 더불어 어리광도 느셨다. 매일매일이 무거웠던 인생의 짐을 하나씩 내려놓고 가볍게 가볍게 세상을 알기 이전의 천진무구의 상태로 회귀하려는 과정인 듯 하다.

 

 처음엔 이 만화가 그저 치매에 걸린 어머니를 보살피는 아들의 일상을 그려낸 것으로 단순하게 생각했다. 노쇠하신 어머니를 자주 간병하는 입장이기에 쉽게 공감하고 배울 점이 있으리란 생각으로 선택했던 책이다. 일단 그림이 정겹게 눈에 폭 안겨와 좋았다. 단순하고 동글동글한 선 속에 인간과 삶을 바라보는 저자의 선량하고 따스한 마음이 그대로 느껴졌다. 그리고 단순한 치매 어머니 간병기일 줄로만 생각했던 만화 내용은 그대로가 한 편의 시고 에세이고 소설이고 철학서였다. 역자의 말처럼 '옛날과 오늘이 교차하고 선대와 후대가 뒤섞이는 치매에서 깊은 사람 살이의 울림을 길어올린' 아름다운 서정시이자 한 인간의 역사가 담긴 대 서사시였다.

 

 일본 나가사키 지방정보지에서 일하던 오카노 씨가 치매에 걸린 어머니와의 일상을 그려낸 이 만화는 정보지 귀퉁이에 실린 것을 시작으로 전국적인 베스트셀러, 다큐멘터리, 드라마, 영화로 제작되며 큰 인기를 얻고 있다. 읽어보니 그 인기가 당연하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모두 어머니와 아버지가 없는 사람은 없으니까. 그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자식들 또 친구들 바로 우리의 삶의 이야기가 담겨있기에 그토록 큰 공감을 얻지 않았을까 싶다.

 

 길에서 서로 스쳐지나가는 저자의 치매어머니와 아기를 비유한 표현

'목숨 두 개가 나란히 엇갈려 스쳐간다. 인생의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웃음과 인생의 무거운 짐을 아직 모르는 웃음'

나날이 가벼워져 가는 어머니가 생각나 많이 울었다.   

'내가 치매에 걸려 네 아버지가 나타난 거라면 치매도 그리 나쁜 게 아닌 모양이다.'

자꾸만 돌아가신 아버지를 만나시는 저자의 어머니가 하시는 말씀.

 

 이 글을 읽으면서 인간으로 태어나 노쇠의 과정을 거쳐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이 그리 나쁘거나 슬픈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인간에게는 인간만의 삶과 죽음의 방식, 뒷바라지의 방식이 있다고 한다. 인간이기에 가질 수 있는 깊은 이해와 배려와 사랑을 전제로 내 부모의 노화, 나의 노화를 조금은 덜 아프게 조금은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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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밥상 이야기 - 내 영혼을 위로하는
김현 지음, 조민지 그림 / 오션북스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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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 읽기를 즐겨하는 사람들은 누구나 좋아하는 책 장르가 따로 있기 마련인데 음식에 관한 책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다. 음식을 주제로 한 책이라면 항상 관심이 가고 읽고 싶은 욕구가 강하게 생기는 것이다. 물론 주위사람들에게서 미각이 뛰어나다는 평을 듣고 다양한 음식을 가리지 않고 즐기지만 그렇다고 식탐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곰곰히 이유를 생각해 보면 음식이야기엔 사람냄새가 나기 때문이다. 티비 프로그램도 드라마보다 실제로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주는 프로그램이나 다큐멘터리를 좋아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사람과 사람이 어울리고 부대끼며 살아갈 때 관계맺음에 있어서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 바로 밥 한 끼가 아닐까 싶다. 지인끼리 '다음에 만나면 밥 한 끼 먹자'는 인삿말을 평상 시에 많이 하고, 친구를 만나든 직장 동료들끼리 어울리든 밥상을 마주하고, 부부싸움으로 냉전 중인 부부도 함께 밥을 먹으며 대화의 물꼬를 튼다. 타향살이로 지친 몸과 마음을 이끌고 고향집을 찾아든 자식에게 어머니가 가장 먼저 하는 일도 말없이 밥상을 차려내 오는 것이다. 그래서 밥상은 그냥 밥이 아니라 우정이고 동료애고 사랑이고 연민이며 영혼을 위로해 주는 최고의 비타민이다.

 

 부산에서 성장과정을 보낸 저자의 어린시절 추억이 담긴 밥상이야기들을 읽노라니 마치 나의 이야기를 쓴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는데 저자의 부모님이 삼천포에서 생활을 했고 어머니 음식의 원류가 삼천포라는 부분을 읽고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나야 말로 교직 생활을 하시는 부모님을 따라 성장기를 삼천포에서 보냈기 때문이다. 책 속에 등장하는 삼천포 명물 쥐포, 물메기국, 장어구이와 장엇국, 방앗잎 넣은 부추전과 가오리찜 등의 음식은 바로 내 추억 속의 고향의 맛이기도 하다.

 

 직장에 다닌 어머니 대신 집안 일을 하는 사람이 따로 있었던 터라 평소에는 어머니표 음식을 먹을 기회가 별로 없었다. 그러나 절대 남의 손에 맡기지 않는 음식 두 가지가 있었다. 소풍날이면 새벽 일찍 일어난 어머니는 갓 지은 밥에 설탕을 넣어 끓인 식촛물을 부어가며 식혀서 김밥을 싸주셨다. 김밥 속에 들어가는 어묵도 시금치도 당근도 일일이 따로 양념을 했다. 그렇게 싸여진 김초밥은 그냥 단순히 김에 밥과 속을 말아온 친구들의 김밥 중에 단연 으뜸이었다. 소풍 도시락만은 당신의 손으로 싸보내고 싶었던 어머니의 마음이었을 것이다. 다른 하나는 아버지를 위한 음식이었다. 육류를 특히 좋아했던 아버지를 위해 어머니는 불고기 재우는 것만은 직접 하셨다. 밥상에 둘러앉아 양념에 재워 둔 불고기를 전기 프라이팬에 끓이며 먹기 직전 시금치 한 줌을 넣었는데, 달고 향기로웠던 시금치의 맛은 수 십년이 지난 지금도 추억으로 남아 입 안에 머물러 있다. 성인이 된 후 수도권에 거주하며 여기저기 식당에서 불고기를 먹어봐도 시금치가 들어간 불고기는 본 적이 없다.

 

 그 외에도 신문지 깐 양면 프라이팬에 쩌주시던 세월처럼 노오랗게 익은 카스테라, 일본서 살다온 교장선생님께 배웠다며 해주시던 색색깔의 꽃같은 카레라이스, 요리교실에서 배운 탕수육 실습 등 육칠십 년대에 어린시절을 보낸 사람으로서는 풍족하게 다양한 음식들을 맛보며 자랐다. 그것들이 바탕이 되어 홍어, 닭발, 돼지껍데기, 개불 등 특히 여성들에게 호불호가 갈리는 음식들도 맛있게 먹는 미각을 지니게 된 듯 하다.

 

 너무 연로해서 오늘이 며칠인 지를 기억 못하시는 어머니도 음식에 관한 기억만은 뚜렸하고 그 얘기들을 두고두고 하실 때마다 행복감으로 얼굴에 미소가 떠나지 않는다. 밥상은 받는 사람에게도 차린 사람에게도 삶을 버텨내는 힘이었고 사랑이었고 영혼의 치유제였다. 

 

 밥이 가지는 사람살이의 의미가 이 책을 읽은 오늘따라 묵직하고 눈물겹게 또 따스하고 사랑스럽게 느껴지는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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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시작하는 인문학 2 - 우리 시대를 읽기 위한 최소한의 인문 배경지식 지금 시작하는 인문학 2
주현성 지음 / 더좋은책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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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인문학의 열풍이 거세게 불고 있다. 가볍고 속물적인 세태를 반영하는 반어법적인 현상이 아닐까 싶다. 대학을 다니던 80년대 초만 해도 대학은 학문을 연구하는 상아탑이었고 대학생이라면 당연히 인문학에 관심을 가지는 것이 기본이었다. 인문학의 중심이라는 문사철, 어릴 때부터 문학을 동경하는 문학소녀였고 역사를 전공하는 역사학도였고 철학과 강의실 뒤편에 앉아 도강하곤 했다. 그 외에도 심리학, 사회학, 인류학에 관심이 많았다.

 

 하지만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생활을 시작하고 세월이 흘러가면서 인문학에 대한 관심은 서서히 멀어져 갔다. 요 근래 들어 인문학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다시 관련도서들을 손에 잡아보려 했으나 결과는 참담했다. 무슨 책부터 읽어야 하는지 어떻게 확장시켜 나가야 하는지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고 무엇보다 어렵게 느껴졌다. 세월을 무게를 얹은 두뇌 때문인지 가벼운 소설이나 에세이류를 읽은 탓에 사고의 영역이 고정돼 버린 탓인지 방향을 설정하기가 힘들었다. 그러던 중에 이 책을 접하게 되었고 무엇보다 '지금 시작하는 인문학'이라는 제목이 눈에 들어왔다. 글자 그대로 출발점이 되어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책을 펼쳐 보았다. 우리 시대를 읽기 위한 최소한의 인문 배경지식을 제공하는 책이라니 인문학 공부를 시작하려는 기초지식이 부족한 초보자들에게 안성맞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과연 인문학이란 무엇인가. '사람에 대한 모든 것을 다루는 것이 인문학이다'라는 쉬우면서도 명쾌한 개념정의가 마음에 들었고 어렵지 않을까라는 부담감을 해소시켜주었다. 회화, 문학, 과학, 사회학, 미학의 다섯 가지 장르를 다루며 분야를 옮겨가며 읽을수록 지식이 확장되는 계단식 목차 구성도 특이하고 좋았다.

 

 첫째. 모네 이전의 회화는 원시시대 미술에서부터 마네에 이르는 미술사의 긴 여정을 다루어 각 시대 마다 유행하던 미술사조들을 소개함으로써 우리가 회화사의 흐름을 온전히 파악하고 조망할 수 있도록 했다.

 

 둘째. 문학과 문예사조는 문학작품과 시대를 아우르는 문예사조의 변화와 그 유형적 차이를 파악할 수 있도록 짜여져 있다. 대작가들의 명작들이 만들어내고 있는 쟁점을 통하여 문학의 정신적 배경을 이해할 수 있도록 했다.

 

 셋째. 우리는 인문학 서적에 과학이 소개되었다는 것에 의문을 가질 수도 있다. 하지만 필자는 과학은 인류의 지식이 생성되는 과정이고 과학이론들은 새로운 세계관을 만들고 세계를 변화시켜 온 중요한 전화점이므로 인문학과 떼어서 생각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넷째. 이론에만 치우쳐 자칫 탁상공론으로 끝날 수 있는 인문학을 사회에 접목시킨 실천분야인 사회과학분야를 다루었다. 사회이론의 거장들을 인물중심으로 다루어 그들이 중요한 논쟁을 중심으로 어떻게 대립하고 계승하는지 독자들이 알 수 있도록 했다.

 

 다섯째. 근래에 많은 관심을 모으고 있는 미학을 다루었다. 그 실체를 알 듯 하면서도 손에 잘 잡히지 않는 미학의 위치를 예술과 철학에 준하는 역할로 자리매김하고 사회학적 미학의 관점으로 본 대중문화를 소개하고 있다.

 

 이 책의 최고의 매력은 뭐니뭐니 해도 쉽게 읽힌다는 것이다. 구슬도 꿰어야 보배라는 말이 있다. 아무리 훌륭한 지식도 독자가 이해를 하지 못하면 무용지물인데, 인문학을 어려워하는 독자들이 자신감을 가지고 다양한 인문서를 접해볼 수 있도록 기본배경 지식을 제공하기 위해 집필했다는, 저자의 의도가 확실하게 느껴졌다.

  

 또 한가지는 한 권의 책으로서 다양한 지식의 만찬을 맛볼 수 있어 흥겹고 만족스러웠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더욱 깊이있고 풍성한 인문학의 세계로 여행을 떠나보는 것, 그것이 이 책이 진짜 우리에게 전해주고 싶은 이야기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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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자, 장미여관으로 - 개정판
마광수 지음 / 책읽는귀족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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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0년대 초반 '마광수'라는 이름 석 자는 금지된 그 무엇이었다. 당시만 해도 완전히 터부시 되던 성을 주제로한 책이 나왔다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켰고 호기심으로 책을 읽어본 대부분의 사람들은 충격을 받았고 외설과 변태라는 수식어만이 난무하였다. 그 후폭풍은 결국 판금조치, 구속수감, 직위해제로 이어졌다. 대한민국 법정이 소설이 외설스럽다는 이유로 작가에게 실형을 선고하는 웃지못할 해프닝이 벌어진 것이다. 모름지기 문학작품의 평가는 독자에게 맡겨야하거늘 법으로 문학작품을 저울질 하는 촌극 같은 일이 일어났다는 것은 우리의 문화인식의 수준이 미성숙 하고 편협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나 또한 이십대 청춘의 호기심으로 '즐거운 사라'와 '광마일기'를 읽고 야하다고 치부해버린데 대한 면죄부를 받고싶은 심정에 그 소설들의 모티프가 되었다는 시집을 읽어보게 되었다.

 

 마광수 교수의 대부분의 소설이나 에세이가 이 시집에 실린 시의 제목이나 이미지를 빌려 꽃피우고 열매 맺은 결과라고 하니 과히 그의 문학적 상상력과 정신세계의 응축물이라고 할 수 있겠다. 오십의 나이에 읽어도 여전히 야하다. 그러나 이십대에 느꼈던 야함과는 빛깔과 향기가 다르다. 그때는 그저 야하기만 했다면 이젠 그 야함을 통해 뭔가를 전달하고 싶어하는 시인의 이야기가 들려온다.

 

 장미여관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다 가지고 있는 마음속 자기만의 은밀한 공간을 말하는 게 아닐까. 여관의 불빛이 꼭 빨간색이 아니어도 좋고 꽃무늬이불이 깔려있지 않아도 좋다. 자신을 옭아매고 짓누르고 있는 현실의 속박과 굴레에서 벗어나 마음껏 자유로울 수 있는 곳, 체면과 위선의 탈을 벗고 일상에서 탈출하여 해방감을 느낄 수 있는 공간, 바로 그곳이 자신만의 장미여관이다.

 

시인은 단지 우리보다 조금 더 솔직했을 뿐이다. 글로서 금지된 성에 대한 상상력과 욕구를 관능적으로 표현하고 유미주의에 바탕을 둔 쾌락주의를 추구한 것이다. 거기에서 끝났다면 시인은 '변태'라는 예전의 오명을 벗기가 힘들 것이다. 그러나 그의 시에는 놀랍게도 인생에 대한 날카로운 통찰이 있고 유머가 있고 슬픔이 있다. 평범한 일상의 이면에서 허무와 무기력과 평화와 자유와 퇴폐미를 건져올려 풍자적이고 문학성 있는 한 편의 시를 써내는 시인을 누가 감히 변태라고 손가락질 할 수 있는가.

 

 우리도 마음 속에 자신만의 장미여관을 지어보자. 밤이 오면 네온사인에 불을 밝히고 무한한 상상력과 자유만이 주어지는 곳.

 

 당신, 그곳에서 부디 행복하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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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도 - 제3회 혼불문학상 수상작
김대현 지음 / 다산책방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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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밤새 꿈 속에서 꽃비가 내렸다. 푸른 하늘에서 떨어져 내리는 수많은 꽃잎들 사이사이 햇살이 아롱지고, 잠자리 날개처럼 얇은 날개를 단 홍도 그녀가 사랑을 찾아 수백 년의 시공간을 쉼없이 날아다니고 있었다. 홍도의 뒷목덜미에 내려앉은 연하디 연한 꽃잎 몇 점이 슬퍼서 아름다웠다.

 

 소설 '홍도'를 밤에 품지 말라는 정유정 작가의 평을 무시하고 새벽까지 읽기를 끝내고 잠자리에 들었다. 온통 꿈자리는 홍도 그녀의 차지였다. '혼불'의 작가 최명희의 정신을 기리는 혼불 문학상을 수상한 작품인 데다가 사백 년 동안 늙지도 죽지도 않고 사랑을 기다리는 홍도의 이야기라니 그 누가 매력을 느끼지 않을 수 있으랴.

 

 소설의 두 주인공 동현과 홍도가 헬싱키 반타 공항에서 탄 비행기 내에서 우연히 옆자리에 앉게 되고 한국의 인천 공항까지 오는 여덟 시간 정도의 비행 시간 동안 서로 이끌리며 이야기를 주고받는 것이 큰 플롯이다.

 

 사백 년이 넘는 긴 세월을 늙지도 죽지도 않으면서 윤회하는 자신의 사랑을 기다리고 사는 홍도. 그 사랑이 등장할 때마다 배경이 되는 우리 역사의 큼지막한 사건들. 어떤 개인도 역사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지만 홍도의 개인사 그것도 사랑이야기에 역사적 사건들을 녹여내는 작가의 의도와 필력이 작위적인 느낌이 들면서도 재미있고 매력적이었다.

 

 이야기의 시초는 정여립 사건이다. 우리가 흔히 역적으로 알고있는 정여립은 홍도의 외할머니와 의좋은 남매 사이였다. 정여립의 시종으로 따라온 사내아이에게 홍도가 재미삼아 자치기라는 이름을 지어준 순간부터 둘의 인연은 시작되었고, 그 사랑은 사백 년의 시간의 강물을 따라 현재까지 이어져 오게 되었다.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지위나 신분의 귀천이 없이 다 함께 잘 사는 대동의 세상을 꿈꾸다가 모반죄로 몰려 정여립이 처형을 당하면서 할머니, 아버지도 죽음을 당하게 되고 고아가 된 어린 홍도는 오직 자치기에게 의지하여 고달프지만 행복한 삶을 살게 된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뿐 역사의 소용돌이에 휘말린 들은 헤어지게 되고 그 뒤로도 여러 번 재회와 이별을 반복하게 된다.

 

 기축옥사, 임진왜란, 천주교 박해, 하와이 노동자 파견···

 조선, 일본, 진주만, 암스테르담, 핀란드···

 홍도 그녀는 언제나 살아있었고 어디에서나 사랑했다. 불멸의 수명을 가진 항아 님으로부터 기운을 얻어 자신은 늙지도 죽지도 않기에, 보통의 인간으로서 생로병사를 거치며 소멸해가는 사랑하는 이와의 재회를 기다리며 사백 년 이상의 세월을 건너온 것이다. 여덟 시간의 비행 시간 동안 이야기를 주고받았던 홍도와 동현 아니 홍도와 자치기가 마침내 서로를 알아보면서 그녀의 사랑은 또 한 번 완성된다.

 

 이 허무맹랑한 이야기가 너무나 가슴저린 실제 이야기로 다가오는 건 왜일까. 바로 소설 속에 스며있는 작가의 진심 때문일 것이다. 허구의 세계인 소설이라는 틀 속에 허구의 극치를 보여주는 내용을 썼으면서도 온 진심을 담아 그 사랑이 실재 하기를 바라는 간절함을 담아냈다는 것이 가슴으로 느껴졌다. 초반부에서는 이야기가 너무 헐렁하니 밀도감이 떨어졌고 어디서 많이 들어본 옛날이야기 같은 느낌에 몰입이 잘 되지 않았다. 하지만 소설이라는 매체를 읽으면서도 어떤 철학적인 의미나 무게감을 찾으려는 자신의 독서 태도를 반성하고 마음을 풀어놓은 순간, 홍도 그녀는 한 마리 아름다운 나비가 되어 자유롭게 사백 년의 시공간을 날아다니기 시작했다.

 

 그녀와 함께 웃고, 그녀와 함께 가슴 아파하며 울었고, 함께 행복했다.

 

 오랜 시간을 건너 온 두 주인공의 사랑이, 아름다운 우리 말의 옷을 입고 생생하게 되살아나 진정한 사랑의 의미를 가슴으로 깨우치게 해 준 귀한 소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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