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적과 함께 사는 법 - 오늘을 살리는 과거 청산의 현대사
김지방 지음 / 이야기나무 / 2013년 10월
평점 :
가슴을 짓누르는 돌이 있다. 긴 세월 이끼가 끼고 비바람에 깎여 나가기도 하지만 굳건하게 뿌리를 내리고 있는 돌. 그 돌의 크기와 빛깔에 따라 이름도 미움, 증오, 갈등, 원망 등 다 다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슴 속 깊은 곳에 어쩔 수 없는 돌 하나를 키우며 때로는 덮어두고 때로는 잊기도 하지만 불현듯 느껴지는 돌의 무게감에 고통스럽다.
그래도 개인으로부터 받은 상처나 피해로 인해 생긴 돌은 자신만 마음을 정하면 비록 어렵더라도 용서의 길, 화해의 길, 청산의 길로 걸어가 뽑아낼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아픈 돌이 시대의 역사로부터 비롯된 것이라면 돌을 뽑아내는 과정은 험난하기 이를 데 없다.
인종차별, 종교분쟁, 이념의 대립, 권력투쟁 등 휘몰아치는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책임을 회피하고 진실을 외면하려는 가해자들, 자신도 모르게 가해자와 피해자로 나뉜 사람들의 끝없는 고통. 이들에게 진정한 화해와 공존의 길은 없는지 저자는 개인사의 용서와 화해에도 힘들어 하며 전전긍긍하는 우리들에게 묵직한 화두를 던진다.
지금까지 성공적인 과거청산이라면 역사 속에서 정확하게 가해자를 가려내어 단죄하고 처벌하여 억울한 피해자들의 한을 풀어주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야 정의로운 사회, 희망이 있는 나라라고 믿어왔다. 하지만 이 책은 과거청산에 대한 기본인식을 완전히 바꾸어 주었다. 가해자 또한 또 하나의 피해자일 수도 있으며, 가해자를 심판하고 단죄하기만 하는 청산은 또 다른 파멸과 분열을 조장하며 고통의 역사를 반복할 뿐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저자는 과거사 청산의 새로운 해법을 제시했다.
가해자의 단죄와 처벌로 일관된 청산이 아니라 진심어린 반성과 참회를 하는 가해자들과 그것을 포용하는 피해자들이 화해를 통하여 마침내 통합과 공존의 길로 나아간 실제 사례들을 보여주었다. 그들을 통해 인간에 대한 신뢰와 역사발전의 가능성을 엿볼 수 있었다.
과거 역사 속에서 고통스러운 상처가 있는 나라들. 남아프리카 공화국, 캄보디아, 아르헨티나, 프랑스, 미국, 한국, 그 중에서도 인종차별로 인해 흑인과 백인 서로가 심각한 피해를 입었던 남아프피카 공화국. 가해자들이 자신들의 잘못을 기억하고 고백하여 진심어린 참회를 하자 이들을 악마나 괴물이 아닌 책임을 물을 수 있는 인간으로 바라보고, 용서와 화해의 가치를 붙잡으며 종교적인 차원을 적용시킨 투투 대주교의 노력은 가슴 뭉클할 정도로 감동적이었다. 나머지 캄보디아의 좌파 독재청산, 아르헨티나의 우파 군사정권 청산, 프랑스의 나치 부역자 청산, 미국의 흑인차별 역사 청산, 한국의 여수·순천 사건과 5·18 광주 민주화 운동에 이르기까지 일곱 가지 과거 청산의 현대사를 통하여 너와 나, 가해자와 피해자로 나뉜 역사가 아니라 우리가 함께 걸어갈 수 있는 길을 안내해 주었다.
이 책의 가장 큰 매력은 진지하고 무거운 주제를 소설이나 신문 기사의 형식을 빌어 서술함으로써 쉽고 재미있게 접근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현장감과 사실성을 잃지 않았으며 역사의 거대한 바퀴에 깔려버릴 수도 있는, 한 사람 한사람의 고뇌와 아픔을 외면하지 않고 보듬으려 한 점이 가슴에 와 닿았다.
좋은 역사청산이란 과거의 상처를 무조건 망각하거나 외면하지 않고 힘들어도 직시하고 인정하는 데서 출발할 수 있다. 온 몸이 부서질 듯 고통스럽고 도망치고 싶더라도 이겨내며 죄를 인정하고 진정으로 참회할 때 역사의 정원에는 꽃이 피어난다.
용서와 화해와 공존의 꽃 송이를 가진, 청산이라는 이름의 어여쁜 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