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의 빛
이스마엘 베아 지음, 송은주 옮김 / 북스코프(아카넷)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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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인간성의 극과 극

상반된 양극의 끝점의 이름은 선과 악이다.

'당신은 좋은 사람인가, 나쁜 사람인가?'

자신의 인간성이 자리한 위치가 그 두 점을 잇는 선의 어디쯤인지 확실히 답할 수 있는 사람은 결단코 없을 것이다. 상황에 따라 선 쪽에 가까울 수도, 악 쪽에 가까울 수도 있는 것이 우리 인간들의 솔직한 민낯이 아닐까. 단지 또르르 굴러가는 실타래를 잡으려 손을 최대한 뻗듯이, 온힘을 다해 좋은 사람이 되기위해 최선을 다하며 하루를 살아 가는 것, 그것 자체가 선한 인간성의 본질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여기 인간성을 부정하는 아니 인간이기를 포기한 악한 인간의 전형을 보여 준 비극이 휩쓸고 지나간 암울한 땅, 아프리카의 시에라리온이 있다. 세계 제일의 다이아몬드 산지인 시에라리온 역시 아프리카의 타 지역들처럼 끔찍한 내전을 겪어야만 했다. 인간의 역사를 지탱해온 한 축이 전쟁이라고 하지만 내전만큼 참혹한 전쟁이 또 있을까. 지구상에는 우리의 한국전쟁부터 보스니아내전, 중동지역의 분쟁, 그리고 아프리카 여러지역의 내전에 이르기까지 이념이나 종교, 종족이 다르다는 여러가지 명분 아래 인간이 인간을 학살하는 잔인한 전쟁들이 끊이질 않고 있다.

 

 특히 아프리카 지역들의 내전은 소년병들의 존재로 인해 경악과 전율을 세계인들에게 안겨 주었다. 일본작가 다카노 가즈아키의 <제노사이드>에서도 콩고내전의 희생물이 된 소년병들의 참혹상을 읽고 커다란 충격과 분노와 슬픔을 느꼈었다.십대가 채 되지 않은 소년들이 자기 키보다 큰 총으로 상대를 죽이거나 사람들의 팔을 자른다는 이야기는 알고 있었지만, 소년에게 자신의 어머니를 강간하고 죽이게 강요하며 그것을 거부한 형을 잔인하게 죽여 버린다. 그것을 보고 공포에 질린 소년은 그 일을 하고 그 때부터 영혼이 황폐해진 소년병으로 키워진다.

 

 이 책의 저자 이스마엘 베아 역시 어린 나이에 영문도 모르는 체 폭력과 강요에 의해 전투에 앞장 섰던 소년병이었다. 그가 자신의 소년병 경험을 담아 펴내 찬사를 받았던 에세이 <집으로 가는 길>이 지나간 전쟁에 대한 회상이었다면, <내일의 빛>은 전쟁이 끝난 후의 치유와 미래에 대한 희망을 노래하는 책이다.

 

 평화와 사랑이 충만했던 마을 임페리에도 어김없이 끔찍한 내전은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웠다. 순식간에 삶의 터전과 가족들을 잃고 생지옥으로 내몰렸던 마을 사람들이 하나 둘씩 전쟁이 끝난 후 마을로 돌아오며 이야기가 시작된다. 언제나 마을의 대들보로 주민들을 포용하고 이끌었던 노인들, 가족의 일부나 전부를 잃어버린 중장년층, 그리고 부모를 잃고 고아가 된 청년과 소년소녀들, 마지막으로 전쟁이 끝난 후 태어나 참상을 모르는 꼬마들. 이들이 다시 임페리로 돌아와 황폐해진 마을의 공간 속에서, 자꾸만 밀려드는 아픈 기억과 상처를 딛고 조심스레 미래를 꿈꾼다. 심지어 한가족의 팔을 강요에 의해 잘랐던 소년병과 피해가족까지 임페리에서 화해와 공존을 향해 조금씩 다가간다.

 

 이때 존경받는 노인들이 마을 주민들을 이끌어 가는 키워드가 바로 '우화' 즉 이야기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어린 시절 배우고 자란 그대로 모닥불 주위에 둘러 앉아 우화를 들려줌으로써 어린아이들을 전쟁의 참상으로부터 보호하고, 부족의 전통을 일러주며, 서로 사랑하고 포용하고 함께 가야하는 삶의 지혜를 일깨워 주는 등불이 된다. 그리고 그 등불은 대대손손 이어지며 임페리사람들의 마음을 밝혀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재건의 노력도 얼마 지나지 않아 외국자본이라는 괴물의 발아래 짓밟히고 만다. 마을에는 백인기업의 광산이 세워지게 되고 임페리는 밀려드는 외부인들의 자본과 폭력과 유흥의 희생물이 된다. 임페리 주민들은 무시당하고 짓밟히고 강간당하고 무엇보다 또다시 인간성을 유린당한다. 그러나 여기에 맞서는 청년들이 있다.

 

 '그러나 콜로넬과 밀러는 자신의 삶을 돈 몇 푼을 쥔 탄광회사가 좌지우지하도록 놔두지 않았다. 그들은 자기들이 습득한 방법을 통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했다. 어떤 이들은 그들의 방법이 폭력적이라고 할지 모른다. 하지만 사람들이 자기 생명의 가치를 믿지 못하게 만드는 것보다 더 폭력적인 것이 무엇인가? 하루하루 자기들의 가치가 더 추락해간다고 믿게 만드는 것보다 무엇이 더 폭력적인가?' (P115)

 '다른 놈들이 나를 쓸모없는 존재로 만들게 놔두면 나는 더 이상 자유로운 몸이 아니라는 것을 배웠어요. 막지 못하면 결국 스스로가 쓸모없는 놈이라는 것을 받아들이게 돼요.' (P150)

 

 모두가 과거의 좋았던 시절에 젖어 있거나, 현실에 좌절하여 자신과 가족의 안위를 지키기위해 점점 현실과 자본과 타협해 갈 때, 불의에 맞서 싸우며 타인의 일에 함께 분노하고 도와주는 이 청년들이야말로 '내일의 빛'이 아닐까.

 

 평생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지닌 소년병 출신의 청년들이 찾고자 하는 내일의 빛은 바로 잃어버린 자신의 인간성일 것이다. 악의 끝점까지 다다랐었지만 비참한 현실 속에서도 선을 향하여 나아가려는 희망의 몸짓. 비록 상해버린 심장이지만 다시 수선할 수 있다는 믿음. 가슴 뭉클한 그들의 행보에서 아프리카가 지닌 끈질긴 생명력과 그 힘이 앞으로 탄생시킬 무한한 가능성이 느껴진다.

 

 인간성의 바닥을 보여 준 추악한 현실

 

 아무리 삶이 힘겨워도 비관하지 않고 견디고 나아가는 강인함

 

 그 속에 '내일의 빛'이 점점 불씨를 키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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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은 결국, 누군가의 하루 - 일상처럼 생생하고, 소설처럼 흥미로운 500일 세계체류기!
정태현 지음, 양은혜 그림 / 북로그컴퍼니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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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사랑하고 여행하다.

인간이 참된 자아를 마주할 수 있는 대표적인 방법이다. 일본 작가 다자이 오사무는 인간은 '사랑과 혁명을 위해서 태어난다'라고 말했지만, 이것을 사랑과 여행으로 바꿔 살펴보아도 무리가 없다는 생각이다.

 

 사랑과 여행 모두 늘 설레며 꿈꾸지만 쉽게 해볼 수 없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 하는 도중에 자신도 알지 못했던 자신의 모습과 조우하게 된다는 본질에서 서로 통한다. 그것이 예쁘고 고운 얼굴일 수도 있지만 때때로 그것은 밉고 추한 얼굴이어서 마주하는 순간 자신을 당혹시키고 좌절과 우울의 늪으로 밀어넣기도 한다.

 

 예기치 못했던 상황에, 예기치 못했던 반응을 보이는 자신. 예전에는 절대로 느껴보지 못했고 상상하지 못했던 감정과 행동들이, 봄날 미친듯 터져대는 꽃망울처럼 툭툭 터지는 곳이 바로 사랑과 여행의 진정한 자리다. 인간은 바로 그곳에서 상처받고 치유받으며 또 한 뼘 성장한다.

 

 그러나 사랑과 여행을 위해서 자신의 모든 것을 내던질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그것도 자신을 제어할 수 없는 불타오르는 사랑을 위해서도 아니고, 얼마든지 선택권이 주어지는 여행을 위해서 그동안 쌓아올리고 쟁취한 모든 것을 과감하게 정말 남김없이 내던져버린 한 남자가 있다.

 

 값비싼 양복과 멋진 넥타이, 구두로 치장하고 잘나가는 금융회사의 잘나가는 직원이었던 그. 서울에서 부산으로  이어지는 자전거 여행길에서 부상당한 동료를 길위에 내버려두고 기록달성을 위해 냉정하게 가버리는 남자들을 목격한 후, 그는 자신 또한 성과주의에 목매달고 살고있는 건 아닌지 진짜 소중한 것을 놓치고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고민한다. 그리고 그는 떠난다. 직장에는 사표를 내고 집에 있는 모든 물건을 나누어주고, 캐나다인 아내와 함게 배낭 하나씩 메고 떠나는 길.

 

 이미 이 결정과 행동만으로도 그는 충분히 놀라우며 보통의 우리가 가지지 못한 무엇인가를 가졌을 거라는 느낌을 준다. 이렇게 길 위에 서서 보낸 시간이 무려 500일. 북미로, 남미로, 유럽으로, 인도로...

 

 이 책은 그 500일 동안 어디에 가서 무엇을 보았는지에 대한 기록이 아니다. 누구를 만나 무슨 얘기를 하고 무엇을 느꼈는가에 대한 기록이다. 이처럼 여행지의 정보가 들어있지 않은 불친절한 여행기는 처음이다. 그가 얘기하고자 하는 코드는 관광지가 아니라 '일상'과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는 낯선 곳에서 마주친 사람들의 일상에서 눈앞이 밝아지고 가슴이 트이는 무수한 깨달음을 얻는다.

 

홍수가 나 범람한 갠지스 강에서 신 나게 다이빙하는 인도의 젊은이들. '얼마 전 집과 사람을 삼킨 강에 어떻게 다이빙을 하며 웃을 수 있는가'란 질문을 던진 그에게 '그건 이미 지나간 과거의 일, 그때문에 현재의 행복을 느끼지 않아야 하는가'라고 답하는 젊은이.

 

 저잣거리의 길바닥에 누워 안마를 받으며 충분한 만족과 행복감을 느꼈지만, 자신을 쳐다보는 주위의 시선에 불편해하는 그에게 '당신은 왜 오고있는 행복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는가'라고 말하는 노인안마사.

 

 시가의 나라 쿠바에 가서 시가를 자르고 피우는 방법에 대해 일장연설을 하려는 그에게 '방법이 왜 중요한가, 그냥 자체를 즐기면 되지'라고 말해 준 시가경력 30년의 쿠바인.

 

 '그 사람'들로 인해 그도 자라고 우리도 자란다.

그러나 진짜 반전은 따로 준비 돼 있다. 안정적인 일상을 미련없이 버리고 여행길에 올랐던 그도 여행을 하는 동안 내내, 여행이 끝난 후의 미래에 대한 불안과 주위의 시선에 대한 두려움을 무거운 짐처럼 배낭위에 얹어다닌다. 결국 그도 우리와 다른 특별한 무언가를 가진 사람이 아니라, 바로 우리 중의 하나였던 것이다.

 

 하지만 결국 여행은 그를 황홀한 마지막 깨달음의 순간으로 인도했다. 불안이란 자신의 마음이 만들어 낸 허상이며, 집착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힘 또한 자신에게 있음을 깨달은 순간, 그는 웃으며 여행을 끝낸다.

 

 결코 목소리를 높이거나 강하게 얘기하지 않는다. 그저 여행 도중 자신이 겪은 일상을 일기처럼 적어놓았다. 하지만 어떤 개그프로보다 톡톡 튀고 재미있으며, 어떤 소설보다 빨리 읽히며, 어떤 자기 계발서보다 가슴에 와닿는 가르침을 주며, 어떤 철학서보다 깊은 울림을 준다.

 

킥킥거리고 웃으며 읽고난 후 마음이 성큼 자란 느낌

 

내 옆의 사람에게 읽어주고 이야기 해주고 권해주고 싶은 책

 

잘 익은 포도주 한 모금을 음미한 순간처럼, 참으로 기꺼운 마음

 

나의 일상 속에서 만나게 될

스승들이 궁금해지는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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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로그컴퍼니 2014-06-18 17: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안녕하세요. 북로그컴퍼니 출판사입니다.
다음주 토욜일인 6월 28일 오후 5시에 영풍문고 종로점에서 <여행은 결국, 누군가의 하루>의 정태현 작가의 강연회가 있습니다. 무료 강연회이고 선착순 입장이니 관심 있으시면 덧글 남겨주세요. 자리 맡아 드릴게요. ^^
 
완전변태
이외수 지음 / 해냄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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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수하늘소>로부터 그는 왔다.

세상의 이기와 탐욕과 폭력적인 빛깔에 상처받은 이십 대 초반의 영혼은 사냥꾼의 총칼에 상처입은 어린 짐승처럼,이외수라는 이름의 동굴로 피신해 들어갔다. 그곳은 어둡고 습한 공간이 아니라 순정하고 고아하고 아름다운 영혼의 이미지들이,세속의 먼지와 티끌에 오염되지 않고 푸르른 창공의 깃발처럼 펄럭이는 곳이었다.

 

 <꿈꾸는 식물>은 이슬방울로 맺혔고, <들개>는 붉은 꽃으로 피어났고 <칼>은 맑은 바람이 되어 인간성의 본질, 예술가의 삶의 전형, 인간으로서의 살아가야할 길을 독보적이고 감성적인 언어로 이끌어내 주었다.

 

 특히 극한의 상황 속에서 진정한 예술혼을 불태우려는 주인공의 자유롭고 야성적인 삶을 그린 <들개>는 예술가를 흠모하던 가슴에,뜨거운 화인처럼 깊은 흔적을 남겼다.

 

 그 뒤에도 꽤 오랫동안 이외수바라기는 계속되어 <벽오금학도> <황금비늘> <괴물> <장외인간>까지 소설들을 모두 읽으며, 스스로 집에 감옥을 만들고 자신을 가두어 글을 쓴다는 작가의 문학적 열정에 매혹당했다.

 

 그러나 이 또한 통과의례였을까. 세월이 흐르며 나의 감성이 무뎌졌는지, 작가의 삶이 변했는지 가늠하지 못한 채 세상 속으로 섞여들어가는 그의 생경한 모습에 거리감을 느끼며 책도 손에서 떠나가 시작했다.

 

 참으로 오랫동안 작품을 접해보지 않던 작가의 <완전변태>를 선택한 이유는 단 하나, '소설'이었기 때문이다. 작가도 인간이거늘 어떻게 한 길로만 갈 수 있겠는가. 하지만 이십 대 초반의 영혼을 소낙비처럼 두들겨 댔던 작가. 가난과 외로움 속에서 오로지 문학의 열정 하나만 품고 고아한 정신의 세계를 지향하던 작가였기에, 세상과 소통하는 모습은 마치 분칠한 무대위 피에로처럼 슬프고 낯설었다. 그래서 쏟아져 나오는 책들이 감성팔이 같아 절대 읽어보지 않는 소심한 복수를 했다.

 

 그런데 이번에 너무나 오랜만에 소설이 출간된 것이다. 이외수의 감성이 그리워, 아니 그 시절 나의 감성이 그리워, 향수에 젖어 읽어보았다. 장편소설인 줄 알았는데 단편소설집이라 살짝 실망했고 십 편의 단편소설 중에 네 쪽 반짜리 소설도 있어 조금 당황했다. 물론 단 한 줄의 글에 온 우주를 담아낼 수 있다는 것도 안다. 하지만 초간단 소설은 깊은 울림보다는 미진함과 당혹감을 안겨주었다.

 

 그러나 환상적이거나 정신적인 영역을 통하여 현실을 이야기하려는 이외수만의 어법은 그대로였다. <소나무에는 왜 소가 열리지 않을까>라는 질문을 던지는 노인이나 <명장>에 등장하는 노인은 구도자의 면모를 보여주며 현실을 대변해 준다. <청맹과니의 섬>은 배경이 되는 안개가 피어오르는 호수 가운데 섬처럼 몽환적인 분위기에 빗댄 심리묘사가 탁월했다.

 

 그는 십 편의 작품 속에 매우 다양한 직업을 가진 주인공들을 등장시키고 있다. 법조계, 교육계, 예술계, 종교계 등 우리의 삶을 둘러 싼 강자 혹은 갑의 영역에 속한 이들의 속살을 망설임없이 파헤쳐 약자와 을의 아픔과 눈물을 보여주려 한다.

 

 쩡, 하고 갈라질 것 같은 차가운 겨울하늘, 그 푸르름을 그대로 받아내는 호수의 맑은 물, 손가락을 갖다대기도 전에 베일 것 같은, 날 선 칼날 같은 감성의 언어는 아니었다. 마치 사랑방에서 할어버지가 화롯가에 앉아 불씨를 뒤적이며 들려주던 옛날이야기의 편안함으로 세상사를 풀어내고 있었다. 작가는 여전히 예리한 칼날을 들이대고 있다지만 그건 아마도 세월의 더께가 앉은 나의 감성 탓이지 싶다.

 

 읽으면서 편안했다

강물을 흘러오는 화선지를 자국도 없이 가르고 지나가던 예리한 칼날은 없었다. 하지만 이젠 문학성 뛰어난 작품으로서가 아니라, 진정한 인간의 삶의 모습을 그려내고 있다는 안도감 한자락이 가슴에 남았다.

 

 

 이제 감성의 언어들이 푸른곰팡이처럼 돋아나던 동굴 속보다 여유롭고 편안한 너럭바위 위에 앉는다

 

 따스한 햇살 아래 몸을 말리며 흐르는 구름따라 세월을 낚는, 노인의 낚싯대가 가슴을 건드린다

 

 바로 <완전변태>는 그런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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폰 괴테를 읽다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지음, 류시건 옮김 / 오늘의책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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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원(어려움이나 위험에 빠진 사람을 구하여 줌, 인류를 죽음과 고통과 죄악에서 건져내는 일)이라 적고, 나약한 인간의 솔직한 고백과 인정이라 읽고 싶다. 평생 교회의 문턱도 밟아보지 못했고 오히려 기독교를 싫어했던 사람들이 죽음의 문턱에서 신께 귀의하고 세례를 받고 편안하게 눈을 감는 모습을 수차례 지켜보았다.


 무신론자이며 종교에 대한 어떤 편견도 가지고 있지않은 입장에서 바라볼 때 생뚱맞다 싶은 그마지막 과정은 구원받고 싶은 소망의 표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인간으로 태어나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테두리 속에서 살아보고자 발버둥치면서 크든 작든 죄짓지 않은 자가 어디 있으랴.


 산 자의 오만함에 가려져 보이지 않던 자신의 죄가 삶의 마지막 순간이 시시각각 다가오자 자신의 목을 죄어오며 공포의 얼굴로 다가온다.


 이때 인간은 자신의 나약함과 죄를 고백하고 인정함으로써 마침내 영혼의 평화를 얻는다. 한 목숨이 편안한 마음으로 마지막 호흡을 내쉴 수 있게 이끌어주는 것이야 말로 종교의 종류를 떠나 진정한 구원의 의미가 아닐까 싶다.


 청소년 시절부터 수없이 다른 문학작품들 속에서 인용된 것을 보았고, 또 청소년용 문고본으로 읽어보았던 구원의 상징 '파우스트'. 줄거리는 흐릿해졌지만 파우스트와 메피스토펠레스의 이름만은 늘 뚜렸이 남아있었고,구원을 다룬 작품인 것만은 가슴 속에 깊이남아 이번 기회에 고전 다시읽기에 도전해보게 되었다.


 고전의 가치는 오랜 세월이 지나도 재미와 감동의 빛이 바래지 않으며 특히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현실에 적용 가능하다는 것이다. 파우스트 역시 1800년 대에 쓰여졌지만 오랜 세월 동안 속죄와 구원의 상징으로 수없이 회자되어 왔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과 <이탈리아 기행>을 통해 익히 알고 있었던 독일 고전주의 문학의 거장 괴테. 그의 순수 창작물인 줄 알았던 파우스트가 원래 16세기 후반부터 민간에 전설로 전해지던 파우스트 박사의 이야기를 수록한 민중본이 토대가 되었다고 한다. 민중본도 시간이 흐르면서 수없이 개작되고 그때마다 파우스트의 강렬한 인간적인 면, 오락중심적 요소 강조, 진리추구자로서의 파우스트 등 초점이 다르게 맞춰지게 된다.


 어린시절부터 인형극이나 민중본을 통해 파우스트 전설에 매료된 괴테가 초고 파우스트를 발표한 이래 추고와 개작을 되풀이하며 완성본이 나오기까지의 세월이 무려 60년. 우리는 여기서 한 인간의 창작에 대한 집념과 헌신과 성실성과 노고에 머리를 숙이지 않을 수가 없다. 따라서 괴테 필생의 대작이라 불리우는 파우스트는 괴테 본인의 인간적 성장과 생애가 그대로 투사된 결과물이며 기념비적인 명작인 것이다.


 농부의 아들이었으나 지식욕이 강했던 파우스트는 신학, 의학은 물론이고 천문, 수리, 마술 등 모든 우주만물의 궁극적 이치를 알려는 욕망에 사로잡힌다. 하지만 인간의 힘으로는 불가능함을 깨닫고 악마 메피스토펠레스와 계약을 맺는다. 24년 간 지상의 모든 지식과  쾌락을 얻는 대신 악마에게 영혼을 판 것이다. 그리하여 파우스트는 메피스토펠레스와 모험을 떠나 온갖 쾌락을 경험한다. 그러나 마지막 순간 파우스트는 양심의 가책에 시달리며 용기있게 외친다.


 '그렇다! 나도 어디까지나 이 생각에 따르리라.

 인간의 예지의 최후의 말은 이렇다-

 자유와 생명은 날마다 싸워서 쟁취하는 자만이

 누릴 자격이 있는 것이다.

 그러니 여기서는 위험에 둘러싸여서

 아이도 어른도 노인도 유익한 세월을 보내는 것이다.

 나도 그러한 사람들을 보면서

 자유로운 땅에서 자유로운 백성과 함께 살고싶다.

 그러면 나는 그 순간을 향해 이렇게 부르짖어도 좋을 것이다.

 멈추어라! 너는 진정 아름답구나!

 내가 이 지상에 남겨놓은 흔적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이런 더없는 행복을 예감하면서 이제 나는 이 지고의 순간을 즐기는 것이다.'


 비록 악마에게 영혼까지 팔며 이 세상의 모든 것을 파악하고 싶은 거인적 인간이었으나 끝내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속죄를 통해 천상의 구원을 받은 파우스트.


 희곡의 형식을 띠었기에 오히려 읽는 부담이 덜했으며, 무대 위의 상연 장면을 머릿속에 그려보며 읽어나가노라면 훨씬 현실감있게 다가오는 느낌이었다.


 운율감 있는 문체는 시를 읽는 느낌이었고 그리스  신화가 인용되었으며,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신학 등 문학과 역사와 미학과 철학이 어우러진 방대한 명작이었다.


 당연히 그 맛을 제대로 확실히 느끼려면 여러차례의 되풀이 읽기가 필요한 작품이다. 괴테의 인생역정이 담겨있고 수많은 해설을 낳고있는 작품이기에,앞으로 살아가면서 다시 꺼내어 읽을 때마다 느끼는 깨달음과 배우는 지식은 다를 것이라 여겨진다.


 그러나 결코 변할 수도 잊을 수도 없는 것은 파우스트가 '구원'의 상징이라는 것이다.

 

 악마에게 영혼을 팔고 온 세상의 비의를 다 거머쥐었던 파우스트도 결국은 나약한 한 인간임을 겸허히 인정하고 속죄하며 구원받았다.


 어떤 종교여도 좋고 종교가 아니어도 좋다

 

 인간의 오만함을 벗어던지고 겸허하게

 주어진 삶을 사랑하며 살아가는 것


 자신의 미약함을 인정하고 진실되고 소중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것


 그리하여 종내 마음의 평화를 얻는 것

 

 그것이 구원의 진짜 얼굴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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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영 이별 영이별
김별아 지음 / 해냄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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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삶은 살아가는 것일까? 견뎌내는 것일까? 

 
 전자는 능동적인 자유의지로 자신의 운명을 개척하며 적극적인 자세로 살아가는 삶의 대처방식이다. 그에 비해 후자는 어깨와 등에 지워진 삶의 무게에 짓눌려 숨 한 번 제대로 쉬지 못하지만 묵묵히 그것을 견디어 내는 수동적인 삶의 대처방식이다.
 
 하지만 나이가 들어갈수록 이 둘이 결코 다름이 아님을, 인간으로 태어나 눈을 감는 순간까지 지고 살아가야하는 삶이란 바윗돌의 두 얼굴임을 깨닫는다. 하나의 동전이 가지는 양면성처럼 그 둘은 하나의 뿌리에 맞닿아있다.
 
 흔히 타인이 보기에 지질하고 남루해 보이는, 견뎌내는 삶이야 말로 진정 가치롭고 위대하다는 진실을 깨닫는 순간 하루를 한 순간을 견뎌내는 우리 모두의 노고에 경의를 표한다.
 
 그러나 그 견딤이 현재의 고통과 난관을 견뎌내는 적시성이 아니라 과거 이 년 남짓한 은애의 기억을 보듬고 예순 다섯 해를 그리움으로 버텨낸 사랑의 대서사시라니, 읽기 전부터 애닯은 세월이 흘린 눈물이 가슴을 적시고 시냇물이 되고 강물이 되어흘러 마침내 바다에 이르러 고단한 몸을 풀었다.
 
 남성 위주의 역사 속에서 소외될 수밖에 없는 여성들의 삶을 조망하는 의미있는 작업을 계속해 온 저자가 비운의 왕 단종의 비 정순왕후의 지난하고 애절한 삶의 일대기를 펴내었다. 사극이라는 형식이 인기몰이를 하기 전인 육칠십 년 대에도 단종애사는 책으로 라디오로 내 어린 귀와 마음을두드렸고 그 이후로도 수없이 여러 매체의 소재로 다루어져 왔다. 그래서 역사의 문외한들도 어린 단종과 세조의 왕위찬탈을 둘러싼 흥미있는 이야기며 단종의 유배지 청령포의 지명정도는 익히 들어 알고있을 정도이다.
 
 그러나 단종의 여인 정순왕후의 이름과 삶은 우리에게 낯설다. 역사의 뒤안길에서 소리없이 스러져간 한 여인의 인생이 저자의 마음결과 손끝에서 생명을 얻어, 긴 세월을 건너 우리의 마음 속으로 스며들어 왔다.
 
 단종과 열다섯 살에 혼인하여 열여덟 나이에 남편을 잃은 후 권력으로부터 버림받은 비운의 여인들이 모여살던 정업원에서 여든 두살에 세상을 떠난 정순왕후. 그녀가 한서린 눈을 감은 후 저승으로 넘어가기 전 사십구 일 동안 머무는 중음의 세계에서 지난 세월을 회상하는 독백 형식의 글이다.
 
 자신의 삶에만 천착하지 않고 자신과 마찬가지로 권력의 희생물이 되어 사랑에게 마저 버림받아, 살아있는 귀신으로 살아야 했던 다른 여인들의 삶을 보듬어 안고 절절한 노랫가락으로 서리서리 풀어낸다.
 
 너무나 어린 나이에 남편 단종과 운명을 달리했던 그녀는 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중종에게 버림받은 신 씨마저도 부러워한다.
 
 '그래도 그녀는 어찌 되었던 사랑하는 사람과 같은 하늘을 이고 숨쉬지 않는가'(p65)
 비록 만날 수 없어도 한 하늘아래 숨쉴 수만 있기를 바라는 지극하고도 깊은 슬픔.
 
 한 사내의 아내로 소원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이별은 졸(卒), 수명을 다해서 늙어죽는 것이라는데, 그 복마저 누리지 못하고 예순다섯 해를 망부가를 부르며 다가오는 시간을 묵묵히 받아들여 견디어내면 그 시간이 지나간 자리에 또 새로운 시간이 밀려왔다.
 
 '과연 인간이 자기 운명에 대하여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몫이란 얼마나 될까요? 기실 거대한 운명에 포박 당한 채 아무것도 선택할 수 없도록 지어진 것은 아닐까요? 그 무력함과 허망함에 몸서리를 치게 됩니다.'(P73)
거대한 역사의 소용돌이에 옴짝달싹 할 수 없이  휘말려들어 어떤 선택도 할 수 없이 견디고 견디고 또 견뎌내야 했던 형벌 같은 삶.
 
 그러나 결국 견디었더니
 '살아있을 만 하구나. 그 모든 시간이 덧없이 헛되지는 않았구나. 끝내 살아남았기에 얼마나 천만다행, 만만다행인가.'(P75)
 
 강한 자가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살아남는 자가 강하다는 말이 문득 떠오른다. 저자도 결국 한 여인의 여리디 여린 사랑의 독백을 들려주려고 한 것이 아니다. 정순왕후의 시선을 통해 바라본 미약하나 끈질긴 인간들의 질긴 삶의 의미와 가치, 길고 긴 질곡의 세월을 건너가면서도 결코 빛이 바래지 않는 사랑의 위대함을 아름다운 마흔 아홉 폭의 수채화로 펼쳐보인 것이다.
 
 하지만 옛말의 맛을 살리려고 의도적으로 사용한 듯한 단어들. 게염, 거먕빛, 궤란쩍게도 등의 말들은 오히려 몰입에 방해가 되었고 사전을 찾느라 독서의 감정선이 툭툭 끊기기 일쑤였다. 또한 단종을 향한 정순왕후의 애끓는 사랑에 초점을 두고 이 책을 선택했다면 실망스러울 수도 있다. 사랑가 보다는 단종 이후 중종에 이르기까지의 역사기록에 가깝기 때문이다.
 
 내 어깨 위에도 당신의 어깨 위에도 무겁게 지워진 삶의 무게에 등이 휜다. 하지만 자신에게 주어진 서러운 운명을 결코 거부하거나 외면하지 않고, 끝까지 삶의 궤적을 그려나간 역사 속 그녀들의 삶을 떠올리노라면 조금은 위안이 되고 조금은 힘이 생긴다.
 
 '사람은 결국 삶을 이기고 승리자는 될 수 없는지도 모릅니다. 그 쟁투에서 이기는 것은 오직 삶, 그 자체이겠지요.'(P96)
 
 묵묵히 삶을 견디어나가는 힘
 그것이 바로 삶을 살아나가는 위대한 원동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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