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영 이별 영이별
김별아 지음 / 해냄 / 2014년 2월
평점 :
품절



 삶은 살아가는 것일까? 견뎌내는 것일까? 

 
 전자는 능동적인 자유의지로 자신의 운명을 개척하며 적극적인 자세로 살아가는 삶의 대처방식이다. 그에 비해 후자는 어깨와 등에 지워진 삶의 무게에 짓눌려 숨 한 번 제대로 쉬지 못하지만 묵묵히 그것을 견디어 내는 수동적인 삶의 대처방식이다.
 
 하지만 나이가 들어갈수록 이 둘이 결코 다름이 아님을, 인간으로 태어나 눈을 감는 순간까지 지고 살아가야하는 삶이란 바윗돌의 두 얼굴임을 깨닫는다. 하나의 동전이 가지는 양면성처럼 그 둘은 하나의 뿌리에 맞닿아있다.
 
 흔히 타인이 보기에 지질하고 남루해 보이는, 견뎌내는 삶이야 말로 진정 가치롭고 위대하다는 진실을 깨닫는 순간 하루를 한 순간을 견뎌내는 우리 모두의 노고에 경의를 표한다.
 
 그러나 그 견딤이 현재의 고통과 난관을 견뎌내는 적시성이 아니라 과거 이 년 남짓한 은애의 기억을 보듬고 예순 다섯 해를 그리움으로 버텨낸 사랑의 대서사시라니, 읽기 전부터 애닯은 세월이 흘린 눈물이 가슴을 적시고 시냇물이 되고 강물이 되어흘러 마침내 바다에 이르러 고단한 몸을 풀었다.
 
 남성 위주의 역사 속에서 소외될 수밖에 없는 여성들의 삶을 조망하는 의미있는 작업을 계속해 온 저자가 비운의 왕 단종의 비 정순왕후의 지난하고 애절한 삶의 일대기를 펴내었다. 사극이라는 형식이 인기몰이를 하기 전인 육칠십 년 대에도 단종애사는 책으로 라디오로 내 어린 귀와 마음을두드렸고 그 이후로도 수없이 여러 매체의 소재로 다루어져 왔다. 그래서 역사의 문외한들도 어린 단종과 세조의 왕위찬탈을 둘러싼 흥미있는 이야기며 단종의 유배지 청령포의 지명정도는 익히 들어 알고있을 정도이다.
 
 그러나 단종의 여인 정순왕후의 이름과 삶은 우리에게 낯설다. 역사의 뒤안길에서 소리없이 스러져간 한 여인의 인생이 저자의 마음결과 손끝에서 생명을 얻어, 긴 세월을 건너 우리의 마음 속으로 스며들어 왔다.
 
 단종과 열다섯 살에 혼인하여 열여덟 나이에 남편을 잃은 후 권력으로부터 버림받은 비운의 여인들이 모여살던 정업원에서 여든 두살에 세상을 떠난 정순왕후. 그녀가 한서린 눈을 감은 후 저승으로 넘어가기 전 사십구 일 동안 머무는 중음의 세계에서 지난 세월을 회상하는 독백 형식의 글이다.
 
 자신의 삶에만 천착하지 않고 자신과 마찬가지로 권력의 희생물이 되어 사랑에게 마저 버림받아, 살아있는 귀신으로 살아야 했던 다른 여인들의 삶을 보듬어 안고 절절한 노랫가락으로 서리서리 풀어낸다.
 
 너무나 어린 나이에 남편 단종과 운명을 달리했던 그녀는 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중종에게 버림받은 신 씨마저도 부러워한다.
 
 '그래도 그녀는 어찌 되었던 사랑하는 사람과 같은 하늘을 이고 숨쉬지 않는가'(p65)
 비록 만날 수 없어도 한 하늘아래 숨쉴 수만 있기를 바라는 지극하고도 깊은 슬픔.
 
 한 사내의 아내로 소원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이별은 졸(卒), 수명을 다해서 늙어죽는 것이라는데, 그 복마저 누리지 못하고 예순다섯 해를 망부가를 부르며 다가오는 시간을 묵묵히 받아들여 견디어내면 그 시간이 지나간 자리에 또 새로운 시간이 밀려왔다.
 
 '과연 인간이 자기 운명에 대하여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몫이란 얼마나 될까요? 기실 거대한 운명에 포박 당한 채 아무것도 선택할 수 없도록 지어진 것은 아닐까요? 그 무력함과 허망함에 몸서리를 치게 됩니다.'(P73)
거대한 역사의 소용돌이에 옴짝달싹 할 수 없이  휘말려들어 어떤 선택도 할 수 없이 견디고 견디고 또 견뎌내야 했던 형벌 같은 삶.
 
 그러나 결국 견디었더니
 '살아있을 만 하구나. 그 모든 시간이 덧없이 헛되지는 않았구나. 끝내 살아남았기에 얼마나 천만다행, 만만다행인가.'(P75)
 
 강한 자가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살아남는 자가 강하다는 말이 문득 떠오른다. 저자도 결국 한 여인의 여리디 여린 사랑의 독백을 들려주려고 한 것이 아니다. 정순왕후의 시선을 통해 바라본 미약하나 끈질긴 인간들의 질긴 삶의 의미와 가치, 길고 긴 질곡의 세월을 건너가면서도 결코 빛이 바래지 않는 사랑의 위대함을 아름다운 마흔 아홉 폭의 수채화로 펼쳐보인 것이다.
 
 하지만 옛말의 맛을 살리려고 의도적으로 사용한 듯한 단어들. 게염, 거먕빛, 궤란쩍게도 등의 말들은 오히려 몰입에 방해가 되었고 사전을 찾느라 독서의 감정선이 툭툭 끊기기 일쑤였다. 또한 단종을 향한 정순왕후의 애끓는 사랑에 초점을 두고 이 책을 선택했다면 실망스러울 수도 있다. 사랑가 보다는 단종 이후 중종에 이르기까지의 역사기록에 가깝기 때문이다.
 
 내 어깨 위에도 당신의 어깨 위에도 무겁게 지워진 삶의 무게에 등이 휜다. 하지만 자신에게 주어진 서러운 운명을 결코 거부하거나 외면하지 않고, 끝까지 삶의 궤적을 그려나간 역사 속 그녀들의 삶을 떠올리노라면 조금은 위안이 되고 조금은 힘이 생긴다.
 
 '사람은 결국 삶을 이기고 승리자는 될 수 없는지도 모릅니다. 그 쟁투에서 이기는 것은 오직 삶, 그 자체이겠지요.'(P96)
 
 묵묵히 삶을 견디어나가는 힘
 그것이 바로 삶을 살아나가는 위대한 원동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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